대학축전 표어 당선, 잠원동 목장집 입주 가정교사 자리.
1970년 5월인가?
문교부당국은 어찌하면 대학생의 시국인식을 바꿔보려고 전방위 노력을 들이고 있었다.
그중 하나가 ‘대학축전’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는 것.
서울대학본부가 실무를 총괄하고 있었던 것일까?
서울대에서 발행되는 ‘대학신문’에 전국 대학축전에 걸맞는 표어를 모집한다는 안내문이 있었다. 나는 무심코 지나쳤는데 불쑥 순간적으로 대학축전에 마땅히 어울리는 표어가 머리에 들어왔다. 정말 갑자기 그 자리에서 바로 나왓다.
'자나깨나 불조심, 꺼진불도 다시보자'류의 상투적이고 진부한 표현이 아닌...'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류의, 모두가 모자를 똑바로 쓰는데 혼자만 모자를 삐뚤어 쓰고 싶은 심정이랄까? 파격, '파격의 묘'같은 거였다.
‘모였다.뭉쳤다.한국의 지성’
그날로 대학신문에 응모하엿다. 응모하고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창신동 하숙집에서 동아일보 조간을 보는데 ‘모였다. 뭉쳤다. 한국의 지성’ 표어 아래 ‘대학축전’ 행사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기사를 내보내고 있었다.
‘어, 이거 내가 낸 표어인데 왜 동아일보에 나왔지?’
혼자 중얼거렸지만 또 곧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날일까 며칠 지났을까?
교양과정부에는 커다란 안내판 칠판이 있었다. (거기에는 각종 모임 안내등 학내행사안내는 물론 개인적안내문까지 너절하게 여기저기 어지럽게 또 난잡스럽게 쓰여져있었다.)
한 구석자리에 ‘SC5반 박동희 대학본부로 올 것’
무슨 일로 날 대학본부에서 찾을까? 혹시 좋은 ‘가정교사’자리 하나 줄라고 그러나?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래도 무슨일일까 궁금또궁금.
그러나 아무리 궁금해도 화학실험이 잡혀있는 수요일까지 기다려야했다.(그때 농대의 화학실험은 공대가 아닌 문리대 화학과의 교수진과 실험실을 이용하고 있었다. 일반화학 실험이 있는 날이면 동숭동 문리대로 스쿨버스를 타고 갔다.)
대학본부창구로 가서, 나로 말할 것같으면 여차여차해서 찾아왔노라 했더니, 안내직원이 교무처장실로 안내하는 것이었다.
‘이 표어 학생이 쓴 거 맞아요?’
나;넹.(속으로 그럼 내가 썼지 누구에게 부탁까지 해가면서 표어쓰는 놈이 어디 있나요?)
처장님; 하기야, 우리 서울대생은 머리가 좋으니까...하하하.
상금으로 얼마를 받았는지 기억이 없다. 적지않은 금액으로 아마도 한달 하숙비를 하고도 얼마쯤 남았던 것 같다.
(가까운 친구들과 모처럼 짜장면 한그릇씩 한턱 낸 기억은 있다.)
곁가지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그일로 인하여 나는 SC5반에서 유명인사가 되었다. 꾀재재한 촌놈이 그래도 한방이 있다 싶었을 것일까?
우리반의 홍일점 경기여고출신 임학과 여학생.임순0. 그의 어머니는 신광여고 선생님.(서울대 교양과정부는 공릉동 공대옆에 신축건물을 짓고 70학번이 첫 교양과정을 이수하게 되었다. 각 단과대학은 반편성을 학과불문하고 무작위로 하였다. 그래서 식품공학과인 나와 임학과인 그가 한반이 된 것)
그여학생; 동희씨, 가정교사 자리 구하고 있지않나요?
나; 네.어떻게 그 귀한 정보를 다 알고계시는지요 gg
그여학생; 다 아는 수가 있지요 gg 특히 우리반의 스타 아닌가요?
어머니가 신광여중 선생님인데 나의 처지를 알고서 부탁했다는 것. 잠원동 목장집 동북고 3년, 입주가정교사. 조건은 좋지않지만 괜찮다면 당장 입주해도 된다는 것.
똑같은 이야기. 찬밥더운밥 가릴형편이 못되고도 또 못됨.
그 다음날로 목장집을 찾아가보니 아니글쎄, 서울인데도 아직 전기불이 들어오지않아 자체발전기를 돌려서 전기를 만들어 쓰고있었다.
기억을 하실는지, 막 제3한강교=한남대교가 개통되어 한강변 자갈밭이 버스종점이었다. 버스종점에서 한참 걸어가야 목장집에 다다랐다.
아마도 지금의 강남고속버스터미널 부근 아닐까?
좋은점은
아침마다 뜨끈뜨끈한 그리고 우유기름이 둥둥떠있는 우유를 마실 수 있었는데 뭐 좋지않은 점은, 역쉬나 서울사람들은 보통이 아니었다.
나의 위치는 가정부 바로 위이며 잠잘 곳은 문칸방. 그리고 가르쳐야할 학생은 동북고3년생은 기본이고 거기에 신광여중3년생 또 거기에 초등학교 6년생. 합이 모두 셋.
그러나 마다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동안 두 번에 걸친 여고3년생 실패에 비하면 목장집 가정교사자리는 거저먹기나 다름 없었다. 창덕여고 3년생의 경우에서 뼈저리게 느낀바, 이번에는 신광여고선생님께 어떻게 가르치면 좋겠는지 조언을 구했고 선생님은 목장집사모님과 협의를 하여, 나의 의견인 그날 그날의 교과서 중심으로 지도하기로 하였다.
고3 교과서야 몇페이지 왼쪽 오른쪽에 무슨 문제가 나오는지 모두 내가 꿰고 있었으니 새로 무슨 공부를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또 좋은점은, 토요일만 되면 자유로이 외출을 할 수 있다는 것. 점차 서울생활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토요일만 되면 나는 숙대옆에 하숙하고 있던, 재수를 하고 있던 J를 찾아가 하룻밤을 지내고 돌아왔다.
세 번째만의 가정교사.
나는 예의 대담한 결론을 내고있었다. 가정교사 뭐 별거인가? 서울생활 뭐 별거예요?
서울생활이 좀 익숙해지고 또 가정교사노릇도 목장집에서 그런대로 안정을 되찾았는지 별일 없이 몇 달이 지났다.
무슨 일때문이었을까? 나는 한번 더 가정교사 자리를 옮겻다. 이번에는 고3이 아닌 고1이고, 입주가 아닌 주5일 자유과외로 목장집 입주과외보다는 조건이 훨씬 좋았다.
절친중 하나 서울공대생 S의 소개로, 서울에서 네 번째 가정교사를 하게 되었다.
서울숙부님이 사시는 갈현동 연신내옆 동네, 대조동.
국내굴지의 모건설회사 전무의 아들.
학생누나가 매번 방긋웃으며 과일과 코코아밀크를 내왔다.
그때만 해도 커피는 흔하지않았고 코코아만 집에서 마셔도 잘사는 집이었다.
이제야 가정교사지만 그나마 조금 ‘선생님’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농대식품공학과가 있는 수원에 내려가기 전까지 나는 대조동에서 곧 끝날 서울생활을 정리하고 있었다.//2018.8.17.금.치앙마이 그린밸리콘도 902비에서, 회고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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