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구, 빈대가 싫었다.
요즈음 고교친구들을 만나면 그 끝은 언제나 당구장행.
등산을 마치거나 골프를 끝내고나서, 결혼식이 끝나면 또 상가집 문상이 끝나도, 그 다음 행선지는 대개 당구장.
그럴 때 마다 나는 언제나 비당구파가 된다.
친구들; 동희야 너는 당구치러 안가냐?
나; 나는 다 잘하는 데 딱 3가지를 못 배웠다.
동기친구들;/?????
나;1.여자 꼬시기 2.술마시기 3.당구
친구들 모두 웃기지말라고 나에게 핀잔 주면서 장난을 이어가지만, 나로서는 당구 이야기만 나오면 그때 대학1년때,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하루 세끼식사값이 확보되지않아서 아침과 점심을 한꺼번에 해결하기 위해 점심시간 가까이 늦잠을 자고, 강의시간을 적당히 넘기거나 대리출석해야 했었으니 당구칠 비용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모두들 대학에 들어가면 해보고싶은 것이 하나둘이 아니겠지만 그중에서도 단연 으뜸인 것은 미팅과 당구.
통제만 받던 고교생이 이제 대학생이 되었으니 자유를 만끽하는 데는 미팅과 당구가 최적의 대표선수.
나도 몇 번은 친구들과 함께 당구장에 드나들었다. 구슬치기와는 다르지만 빨간볼과 하얀볼을 나눠 서로 맞추는 놀이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산만한 정신을 집중시키는 묘한 마력이 있었다.
동네 구슬치기의 왕자인 나에게는 당구 그것은 새로운 놀이였다.
문제는 게임비.
한두번은 소위 빈대를 붙어 게임비를 문댈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빈대할 수 없었다.
나의 체면상으로도 안되는 것이고 현실적으로도 어느 친구가 매번 나의 빈대를 용납해줄 수 있겠는가?
강의가 끝나고 또는 휴강을 하면 모두들 당구장으로 가지만 나는 떨어져서 다른 곳으로 갈 수밖에 달리 길이 없었다.
가끔 친구들의 성화에 또는 분위기상 할수 없이 나도 게임에 반강제 타의반자의반으로 게임을 하긴하엿지만 당구에 대한 열정이 생길 수 없었고 따라서 당구하는 재미를 느끼지못하였다.
‘너 당구 얼마 치냐?’ 고 물으면 바로 대답할 말이 궁해진다.
한 60? 70?
그러면 친구들은 그럴 리가 없다 하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찌하랴.
요즘 친구들이 당구장으로 몰려가는 것을 보기만 하고 함께 동참하지못하면서 한편으로는 조금 후회를 해본다.
그때 빈대붙는다고 눈치를 줘도 모른 체 빈대붙어 당구좀 배워둘 걸.....
그랬더라면 친구들과 어우렁더우렁 싸우고 농담해가면서 나의 성격도 더 부드러워지고 더 둥글어졌을 터인데....
모든 사안을 비판적으로 보고 시시비비를 가리고나서야 진도가 나가는 특이성격은 그때부터 만들어졋을까?
논리가 뒷받침되지않으면 한걸음도 앞으로 나가지않는, 나가지 못하는 나의 고집불통과 또 집요함은 그때부터 생겼을까?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지는 것일까?/치앙마이에서 회고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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