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창신동 달동네, 가정교사 신문광고 그리고 청량리 야채시장 독서실
내가 서울에 올라와 맨처음 자리를 잡은 곳이 동대문 창신동.
그때는 몰랏지만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달동네였다.
동대문 근처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한참을 걸어올라가야 나의 하숙집이 나왓다. 아마도 거의 산꼭대기수준?
나의 하숙집이라 하엿지만, 실제는 내가 하숙비를 내고 숙식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함양박씨 먼일가 대부의 하숙집에 더부살이 하숙이었다.
대부라는 분은 일찍이 이농하여 서울에서 택시운전수를 하고 있었는데 시골의 동생도 데려와 택시운전을 함께 하고 있었으며, 거기에 또한분 친구도 함께 하숙하고 있었다. 나까지 포함하여 모두 4명. 그러나 택시운전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 함께 자는 사람은 매일 2명이 최대였다.
나의 더부살이 하숙은 내가 가정교사를 구할 때까지의 한시적이었지만, 가정교사 구하는 것이 생각했던 것보다는 쉽지않았다. 들리는 바로는 서울대생은 가정교사 자리가 널려있다고 하엿는데 나에게는 그렇지 아니하엿다.
동아일보에도 내보고 광고를 내보았지만, 물어보는 전화 한통화 없었다.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후일 깨달은 바이지만, 서울대생도 전공 나름이고 그것도 지방학생은 인기가 없다는 것이었다. 나처럼 농대생에다가 광주일고출신이면 어느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소위 그런 ‘비인기상품’이었다.
서서히 세상을 알아가기 시작한 셈이었다. 사회가 그렇게 싸가지없이 무지막지하다는 것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광주일고에서 이과전체 수석할 정도의 우수학생이며 ‘식품공학과’를 최우수성적으로 입학하였다고 한들 그들 일반사회인들에게는 그 속깊은 사정따위는 참고할 필요도 없다는 것. 바쁜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리 시시콜콜 따져가며 가정교사를 구하겠느냐는 것. 겉만 봐도 금방 어느쪽이 더 유리한지 알 수 있는데 속사정까지 들여다볼 시간이 없다는 것. 널고 널려있는 것이 일류서울대생이고 화려한 전공생들이 줄을 서는데 어찌 농대생 어찌 광주하와이출신에게까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느냐 것이엇다.
그들에겐 백만번천만번 맞는 말씀이지만 그들이 이해되지않는 촌놈 나에게는 천부당만부당 잘못된 상식이었다.
내가 이해못한다고 해서 사회가 나를 따라 다가와서 이해해줄 것인가?
정말로 아니올씨다 였다.
나는 가정교사 자리를 구하지못하고 더부살이 하숙생활을 더 이상 하지못하고, 벼룩도 낯짝이 있다고 하지않던가? 아무리 친척이라해도, 어떻게 몇 달을 공짜로 하숙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새로운 하숙집을 구해 나갈 형편이 죽어도 아니되었다.
독서실.
달리 방법이 없었다. 숙식이 해결되는 독서실. 지금의 고시원보다 더 밑바닥?
고시원과 독서실은 하늘과 땅.
고시원은 개인단독방이지만, 독서실은 개인독서대가 있고, 잠을 자는 공동침상이 별도로 있었다.
공부만 하고 귀가하는 일반학생과 독서대는 거의 사용하지않고 오로지 잠만 자는 필요로 독서실을 이용하는 나같은 학생에게는 독서실보다 더좋은 곳이 없었다.
청량리 야채시장 안에 아담한 독서실이 하나 있었다. 비슷한 처지의 식품공학과 일고동기생 김00과 고대 화학과생 노00과 함께 독서실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서둘러 짐을 옮기고 창신동에서 시작한 서울공부, 사회공부를 야채시장 독서실로 옮겨서 시작하게 되었다.
독서실 사용료가 얼마인지 기억에 없지만 여관비.여인숙 비용보단 훨씬 저렴하였을 것이고, 잠자리가 보장되니 나같은 주머니가 얇기만하고 거의 바닥인 시골학생들에게는 그만이었다.
식사는 야채시장 안에 있는 단골 백반집에서 해결하면 되었다. 식권을 구매해서 하는데 삼시세끼를 모두 해결할 수는 없고 강의 시간에 맞추어 또는 때로는 결강하면서까지, 보통 아침과 점심을 한번에 하는 아점심 식권을 주로 애용하엿다.
아점심을 함께 해야하는 나의 사정을 짐작한 백반집 누나는 가끔씩 밥을 고봉으로 준다거나 저녁식사를 하는 경우, 반찬을 푸짐하게 주기도 하고 때로는 고기까지 주기도 하면서 배려해주었다.
청량리 독서실에서 강의실이 있는 태능 공대옆 교양학부까지는 청량리역에서 스쿨버스가 다녔다. 버스창으로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사이 나의 옷에서는 이가 기어나오고 있었다.
기겁을 하고 나는 잽싸게 이를 처리해보지만, 독서실 침상에서 함께 기거한 그놈을 확실하게 멀리하는 방법은 없었다.
하는 수없이 제일 좋은 방법은 침상옷과 학교외출복을 따로따로 관리하는 것. 잠잘 때 입는 옷과 외출복을 따로 하면 이로 인한 문제는 다시 발생하지않았다. 주머니에 여윳돈이 없었을 터인데 어떻게 옷을 두벌 만들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청량리 독서실 생활을 얼마나 하였을까? 두 달? 세 달?
동아일보 주최 ‘대학축전’의 표어가 당선되고, 농대SC 5반(그때 서울대 교양과정부는 각 단과대학별로 과상관없이 무작위 반편성하였다.) 경기여고출신 여학생이 어머니가 신광여고선생님이셨는데 나의 어려운사정을 듣고, 입주가정교사 자리 하나를 마련해 줄때까지.
밑바닥 시장바닥 체험공부는 그래도 할만큼 했다.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맡고 그들의 밑바닥 생활,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주변사람들.
독서실 식구들까지, 서울의 시장바닥은 언제나 바빳고 항상 활기차게 흐르고 있엇다.2018.8.16. 치앙마이 그린밸리콘도902B에서 회고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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