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않은 길'..... 평생 따라다니는, '농대 디스카운트'
또다른 출구는? 서울대 식품공학과 .
'일반상식의 오류', 평생 따라다니는 '농대 디스카운트'
안암장학생이 되어 문과로 진로변경하는 것이 실패하고나서 나는 나의 진로를 어찌해야할지 고민고민하게 되었다.
(나의 진학사정지수는 65?67? 수준으로 서울대 어느 학과든 모두 지망가능한 지수였다.보통 63정도면 전자공학과.기계과.화공과.의예과등, 그때는 의예과는 우등생정도면 가능하였으며... 60정도면 서울대중위권 학과.)
(누구는 내가 비인기학과인 서울대농대진학하였으니 일반적으로는, 나의 일고성적이 별로였을 것이라 지레 추측하지만, 이것이야말로 '일반상식의 오류'...내가 사회생활하면서 가장 속상해하는 일중의 제일 큰것...외제차를 타지않고 국산차를 타면, 꼭 돈이 없어서인가? 다른이유는 없는가? 개인취향상 죽어도 외제차가 싫을 수도 있고, 설익은 '국산품애용'도 있을 수 있는데, 왜 '그 특별한 경우'의 수는 생각해주지않는가? 나의 일고졸업성적은 최상위급... 일고 1학년,2학년,3학년 모두 우등상=졸업생500여명중 3개년우등상을 받은 학생은 15명정도였으니, 대단한 상이었다..프로야구성적으로 비유하면, 3할대 타율을 기록하는 선수가 많아야 10명내외, 그것도 3년연속 3할타율이라는 것은, 기초가 매우 탄탄하고 거기에 매년 향상하는 성적이니 무서울 것이 없다는 것 , . 3-7반, 60명중 1등, 이과전체297명중 4등을 하였으니, 이과 빅5안에 들었으니 화려하고또 화려하였다..서울대 어느학과에 지원해도 모두 합격한다는 진학사정등급= 특A급)
서울대공대는 그냥 무작정 싫었다. 그렇다고 문과로 전향하여 서울대 문과쪽 법상대 지망은 솔직히 누구나 합격을 장담하지못했다. 아무리 내성적이 이과에서 날고긴다해도 서울대법상대는 재수를 각오해야한다는데 집안의 경제사정을 감안하면 그것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대학입학후 물리화학을 깊이 하지않아도 되는 서울대의대를 내심 생각해보고 보성에 내려가 내 의향을 말씀드렸다.
그런데 뜻밖에도 어머님과 작은형이 크게 나를 나무라는 것 아닌가? 의대는 6년을 다녀야하고 등록금은 물론 그 비싼 책값을 누가 감당할 수 있다고 의대를 진학하려 하느냐는 것이었다. 어서 빨리 대학졸업하여 취직하고 집안경제를 도와야지 6년씩이나 대학을 다니고 언제 집안을 돌보려고 하느냐였다.
왜 의대를 가려고 하느냐? 서울대의대갈 성적이 되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장한 일이냐 해야 마땅할 것인데도, 집안형편이 어려운 데 6년이나 다니고 책값도 비싸다는 데 꼭 의대진학을 해야 하겟느냐고 타박을 주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
그때 우리집안형편은 그랬다. 나는 돈문제가 나오면 입을 꾹 다무는 것외 달리 할 일이 업섰다.
나는 두말도 못하고 서울대의대ㄹㄹ 접고, 그러면 다른 선택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궁리궁리해보았다.(그동안 1년내내 치른 학력과사.모의고사점수를 바탕으로, 학교가 마련해놓은, 나의 진학사정점수는 66-67점 정도로, 이과기준..., 서울대 어느 과를 선택해도 가능한 최고등급이었다.)
운명이란 얄궂은 것인가?
마침 그당시 라디오에서는 새로운 시엠송이 인기를 끌고있었다. 식품회사의 선전시엠송들인데 진로등의 흥겨운 노래소리가 마음속으로 들어왓다. 그래 식품이야, 먹는 것이 얼마나 좋은가. 배불리 먹는 것 이상 더 무엇이 있는가?
나도모르는 사이 나는 급속히 식품공학쪽으로 마음이 급속히 기울었다. 운명이라 해야하는가? 식품공학과는 이제 막 새로이 개설되어 신설학과에 기대하는 프래미엄까지 붙어서 그때그당시 인기가 높았다. 공대 상위학과의 커트라인과 거의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나는 서울대식품공학과 지망으로 나의 진로를 확정지었다. 담임선생님은 가타부타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내심 단과대학 수석을 바라셨을까? 그렇게 되면 4년장학금도 받을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농대전체 수석은 하지못하고, 식품공학과 수석을 하여 입학금과 수업료를 면제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때 농대수석은 임학과를 지망한 마산고출신의 임수태로서, 그와 나는 교양학부시절 ‘새농촌’이라는 써클을 만들어 함깨 활동하였는데, 그는 애초부터 농촌에 대한 투철한 철학과 사명의식을 가지고 농대에 진학하였으며, 졸업후 나중에는 노동진보운동계에서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정말 운명이었는가? 이는 나의 의지가 반영된 나의 운명적 선택이었는가?
아니면 나의 의지가 잘못 반영된 운명적 선택인가?
왜 그때 나는 서울대의대진학을 그리 쉽게 포기해버리고, 생각지않던 농대식품공학과를 선택했을까?
(만일 그때, 내가 고집부려 의대진학을 포기하지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비싼책값을 어찌됐든 마련하고 6년의 의대공부를 어렵게 하여 내 친한친구 누구처럼 대학병원 교수가 되었을까? 교수가 되었어도 지금과 같은 여유있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을까?
시류에 맞추어 친구가 강남가니 나도 가듯이 그때 모두가 선망하던 공대 인기학과에 진학하였다면, 나는 상사맨이 될 수 있었을까? 직장생활하면서 세계시장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내가 하고싶은 일들을 하면서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을까?
누구도 알 수 없는 일. 나의 운명은 누가 좌지우지 하는 것일까?)
서울대농대 식품공학과를 선택하면서 나의 대학생활은 불만과 반항속에서 보내게 되었다.
(신설학과로서 식품공학과의 프레이엄만 고려하였지, 농대에 대한 사회적 무관심 또는 냉대라는 농대디스카운트를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 일생일대의 착오.패착이었던 셈이다. 농대디스카운트는 두고두고 나의 족쇄.질곡.낙인이 되어 대학생활 내내 따라다녔고 졸업하고 회사생활을 할때도 여전히 나의 발목을 잡아끌고 다녔다...사회생활에서는 디스카운트1=농대, 디스카운트2=호남출신이라는 딱지낙인이 붙어다녔다.)
(꿈에도 생각지못한 사회적 편견과 사회적 냉대와 심지어 무시속에서 나는 대학생활을 하게되었다...농대에 대한 사회의 객관적 평가는 기대할 수가 없었다. 졸업후 자리가 힘있느냐 별볼일 있느냐에 따라 사회적평가가 나오는 것이니 어쩌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인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거의 병적인 수준까지 이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눈과 코는 얼굴의 중요한 부분으로서 그러나 눈과 코의 기능이 다른데, 말하자면 왜 눈만이 최상의 평가를 받고, 반대로 코는 푸대접을 받는다면 우리 신체 각부분이 평등한 평가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가? 신체 각부분이 합당한 평가를 받지못하고 있는데 우리 신체가 제대로 작동하겠는가? 눈과 코가 평등한 또는 동등한 또는 상응하는 평가를 받아야하는 것이 당연한 사회적 일반상식 아닌가?
한쪽이 너무 과다평가를 받고 다른쪽은 너무 과소평가를 받는다면 사회적 화합을 위하여 결코 바람직한 길이 아니지않는가?
일반 상식의 오류. 아무리 발버둥쳐도 사회는 꿈쩍도 하지않았다. 오히려 내가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사회에대한 인식이 점차 불만가득차고 불평하고 부정적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창신동 달동네 하숙생활을 거쳐 청량리 야채시장 독서실에서 숙식을 해결하면서 시골출신의 순수무구함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가정교사’자리하나 제때 구하지못하고 사사건건 인기학과와 비인기학과의 차이 그리고 특정지방출신에 대한 비합리적 편견을 직접 경험하고부터는, 사회에 대한 부정적시각.비판적시각이 자리잡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나의 삶은? 나의 운명? 이미 정해져있다? 나의 의지로 선택된 나의 삶인데 누가 뭐라 할 것인가? 어찌 날 탓할 수 있을까? 농과대학 선택은 나의 의지가 잘못 반영되어 나의 운명이 다른 길로 간 것인가?
만일, 내가 농대를 선택하지 않았어도 상사맨이 되어 자유롭게 세계 곳곳을 다니면서 하고싶은 일들을 하고 살았을까?
누가 나의 운명을 선택하는가? 2018.8.16.치앙마이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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