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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즐거운 건망 1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4. 20:31

-여권을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고서는;

7년여 만에 인도네시아를 다시 가야할 일이 생길 것 같았다.
개략적인 일정을 잡고, 수정하기를 몇 번
드디어 최종 일정이 잡혔다.
비행기편을 예약하고 당연히 여권이 있는 것으로 알았다.
지난 4월 태국출장을 다녀왔으니 사무실이나 집 어디에 있어야 했다.
물론 있을 것으로 알고 하루이틀 여기저기 찾았는데 끝내 나타나지 않는 것이었다.

지난 8월 19일.
출장일은 다가오는데 여권이 어디있는지 찾아지지 않으니 난감 또 난감하였다.
계속 찾자니 결국 나오지 않으면 큰 일, 차라리 새 여권을 만들어야겠다 싶었다.

분실신고하고 새여권 신청하면 접수 후 4일, 그러면 8월 23일 월요일.
8월 22일 일요일 출발하는 것으로 모든 일정을 맞추고 배행기표까지 예매했는데
이 일을 어찌 할 것인가.
출발일을 8월 23일로 하루 연기하면 크게 문제야 없겠지만,
함께 인도네시아에서 만나기로 한 베트남 친구, 싱가포르 친구 그리고 현지 인도네시아 거래선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고 상담을 연기한단 말인가?

여행사 사장은 한번 직접 구청에 찾아가서,
필요하면 급행료를 주더라도, 사정을 설명하고 선처를 부탁해보라는 것이었다.

궁즉통.
더 늦기전에 송파구청으로 달려갔다.
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도 접수담당은 근무하고 있었으며
사정을 설명하니 일단 신청서를 접수시키고, 민원처리기한은 빨라야 접수후 4일 즉 8월 23일에 나오지만, 여권담당에게 잘 설명해보라며 아주 사무적으로 접수를 받았다.
접수담당은 공익근무요원들이었다.

여권분실사유서와 신규 신청서를 빽빽이 작성하여 가니 검정색으로 다시 작성하여 오라 하였다. 왜 파란색은 아니 되는지 잠시 눈을 부라리려다 꾹 참고,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다시 검정색 볼팬으로 신청서를 다시 작성하여 접수시켰다.

서류는 바로 옆 창구의 여권담당 여직원에게 신청서가 넘어갔다.
급박한 사정을 주절주절 단단히 설명하려 말을 꺼내려 하자마자,
그 담당직원, 한 20대 후반쯤 되는 여자공무원은, 두말 하지 않고 오는 토요일(8월 21일)까지 처리해드릴 터이니 잠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아니 내 이야기를 다 들어보지도 않고 어떻게 처리해준다는 것인지 의아했으나, 고맙고 고마울 뿐이었다.
옆 자리에 있었으니 내가 접수직원에게 빨리 처리해줄수 없느냐, 신청서를 왜 검정색으로 다시 써야 하느냐 하는 내용을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하얗게 센 머리를 한 불쌍한 아저씨로 보여 안됐다 싶었는지, 아니면 외화벌이하러 해외출장간다 하니 하루빨리 처리해주는 것인지, 예상외의 신속한 처리에 눈물날 지경이었다.

여차하면 급행료라도 넌지시 던져볼까 하던 참이었는데 여간 신기한 것이 아니었다.
말로만 듣던 요즘 신세대 공무원들의 근무자세가 이런것이구나 확인되니 우리나라 좋은 나라, 희망찬 나라였다.

틈난 있으면 거드름 피우고, 쥐꼬리만한 힘만 있어도 유세하기 일쑤인 힘있는 곳의 목에 힘주는 사람들만 봐왔더니,
그날의 송파구청 여권담당 여직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서 변변한 감사말씀도 제대로 못했는데 언제 다시 가서 잘 다녀왔노라, 정말 고마웠노라, 얼마나 아름다운지 다시 보러 왔노라, 할 것이다.

여권이 어디 있는지 한참 사무실에서 씩씩대던 기분이, 송파구청을 찾느라 택시를 타고 헤매던 짜증이, 비를 맞으며 왔다리 갔다리 허둥대던 씁쓸함이 단방에 날아가 버렸다.

5학년의 정신건강은 때로는 이렇게 호들갑스럽게 요란을 떨어야 더 건강해지는 것 아닐까.
사람이 살다보면 이런저런 실수를 할 수 있어야지 어찌 꼭 기계처럼 틀림이 없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을 것인가.

지난 태국출장때에는 카메라를 어디다 두었는지 알 수 없더니 이번에는 여권을 어디다 놓았는지 모르니, 다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잃어버릴지 자못 궁금하고 기대되는 바 크다.

그래도 젊은 시절, 전철로 인천 주안까지 출퇴근 할 때, 아무리 졸다가도 주안역 가까이 가서는 어김없이 눈을 떠서 주안역을 놓쳐본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제법 자주 자주 깜빡 깜빡 거리는 횟수가 늘어간다.

나의 정신건강에 아주 좋은 일일 것이다.
아무래도 더 인간적인 것은 내려야할 전철역을 놓치지 않고 깨어나는 과거의 내가 아니라, 허둥대기도 하고 잊어버리기도 하는 지금의 내가 아닐까.
이제야 비로소 내가 진정한 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닐까.

이렇게 나는 허둥대면서 인도네시아 출장, 7년만의 자카르타 재회길을 나섰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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