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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만리장성에 올라---더불어숲10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4. 20:16
---사람이 장성보다 낫습니다(만리장성에 올라)

팔달령을 마다하고 그나마 옛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사마대쪽으로 차를 몰았다.
가능하다면 만리장성을 당시의 심정으로 읽어 보고싶어서였지만,
어차피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자동차의 속도와 비행기의 높이에 익숙해진 우리들로서는 우선 우리의 속도 감각이나,
공간정서가 당시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더구나 전쟁의 방법이 판이하게 달라진 오늘날, 장성을 쌓고 국경의 근심을 덜었던 당시 사람들의 안도감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인가.

하물며,
이 장성 앞에서 말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북방민족의 체념을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장성은 산맥을 타고 흘러오는 역사의 장강.
만리장성은 제왕의 힘과 천하통일의 웅지를 보여주는 고대 제국의 압권.
천하통일은 또 막강한 통치력의 증거이며 동시에 문화의 높이를 보여주는 척도.

유럽이 알프스 산맥의 서쪽 땅에서 한번도 통일제국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시종 분립의 역사를 반복하여 왔음에 비하여, 광대한 중국대륙을 하나의 제국으로 묶어낸 만리장성은 동양적 통합력과 동양적 원융성의 실체가 아닌가.

반대로 만리장성은 화이를 구분하는 폐쇄의 성이며,
중화사상이 내장하고 있는 독선의 징표이기도 하다.

고답적 준론을 떠나서 당장 손발이 닿아있는 벽돌 한 장 한 장에 맺혀있는,
무고한 사람들의 고한을 떠올리니 마음이 자못 심란해졌다.
‘높은 산에 올라 부모님 계신 곳 바라보니,
부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
부디 죽지말고 돌아오너라‘
시경의 ‘척호장’의 정경이 눈앞에 선하게 들어왔다.
마치 나 자신이 높은 산에 올라 고향을 그리는 당자인 듯 처연한 마음이 들었다.

문득 만리장성에 바치는 모든 경탄의 소리들이 공허해지고,
무심하기 짝이 없는 횡포로 느껴졌다.

만리장성의 대역사를 찬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그것의 무모함을 타매만 할 수도 없지 않은가.
장성의 축조는 민초들의 곤궁과 분노로 이어지고 천하를 다시 대란으로 몰고 갔기 때문이며,
반면에 잔혹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장성을 쌓아 전쟁을 막으려 했던 일말의 고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 아닌가.

일찍이 당태종은 북방 흉노족들과 화친을 성공적으로 맺고 돌아온 이세적 장군에게 ‘인현장성’, ‘사람이 장성보다 낫다’라 하였다 한다.
장성으로서도 얻을 수 없었던 국경의 화평을 필마단신으로 이루었기 때문이었다.
방어보다 화평이 낫고, 장성보다 사람이 나은 것이 분명하였다.

우리는 이제부터라도 화평을 만들어내고 사람을 키워내는 진정한 성을 쌓을 수는 없는가.
도도한 욕망의 거품으로부터 진솔한 인간적 가치를 지켜주는 보루를 쌓을 수는 없는가.
그리고 이러한 보루들을 연결하여 20 세기를 관류해온 쟁투의 역사를 그 앞에 멈추어 서게 할, 새로운 세기의 성벽을 만들어 낼 수는 없을까.

만리장성은 이 모든 생각을 싣고 강물처럼 가슴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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