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산 자락에 일군 키 작은 풀들의 나라(도쿄의 지하철에서)
출근시간에 맞추어 전철을 타 보았다.
아사쿠사(천초)-우에노-도쿄역에 이르는 멀지 않은 거리.
도쿄 순환노선인 야마노테선에는 아예 의자를 들어올려 모든 승객이 콩나물처럼 서서 가는 전철도 운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출근길 풍경과 다른 것은 그처럼 복잡하고 바쁜 출근길이 참으로 조용하고 정연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10년, 20년의 훈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질서와 정숙함, 일본의 특징인 ‘와바사비(숙적)’의 문화.
아사쿠사, 키가 작은 풀.
작은 주택과 낡은 가구들을 그대로 간직하며 검소하고 겸손한 삶,
무사들의 지배 아래에서 오랜 전국의 역사를 살아온 백성들의 문화.
이런 문화적 배경이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종관계를 축으로 짜여져 있는 사회조직, 연공서열 또는 종신고용이라는 기업의 인사원리 등과 상호 광범위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후지산.
높이 4,000 미터, 정상에 백설을 이고 있는 아름다운, 그러나 화산의 폭발로 이루어진 산이며 키 큰 나무 하 그루 키우지 않는 산.
일본경제의 전개과정처럼 경제적 논리가 아닌 민족주의의 증폭과 전쟁이라는 정염을 도약대로 삼아온 것-후지산의 폭발과 어쩜 같지 않은가.
국가는 부강하나 개인은 가난하다는 일본경제와 일본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전철과 신칸센 그리고 택시 속에서,
시골의 작은 마을을 지나며, 키 작은 풀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모습들,
검소와 근면이라는 완고한 질서 속에서도 키 작은 풀들은 각자의 취미와 삶의 여백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루스 삭스, 모든 여학생들이 하나같이 발목에 흘러내려 겹겹이 주름이 잡히는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단순한 유행과는 질적으로 다른, 소속감에 대한 강한 집착 같은 것,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집단적 지혜일 것,
똑같은 키를 가진 풀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느낌이 들었다.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은 기어이 우리의 잣대로 재단하려고 하는 아집은 없는 것인가.
호수에는 그 호수에 돌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게 투영된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호수가 호숫가의 나무를 비추듯 명경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돌을 받은 호면의 파문 역시 우리의 인식을 온당하게 이끌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본에서 만나는 수많은 친절에 대해서도 그것이 속마음이 아니라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서슬 푸른 사무라이들의 일본도 아래에서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 인정을 단념하고 차디찬 돌멩이 하나씩 가슴에 안고 있는 외로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몸에 익히고 있는 겸손과 절제와 검소함이 비록 쓸쓸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헤픈 삶을 반성할 수 있는 훌륭한 명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혼란스러운 것은 후지산과 아사쿠사라는 2 개의 이미지가 이루어내는 극과 극의 대립,
아시아를 탈출하여 서구를 지향하며 달려가는 일본 자본주의의 모습과, 일본인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근검과 절제,
가난한 개인과 부유한 국가.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이미 그 의미가 총체적으로 회의되고 있는 일본의 근대성에 대하여는 일말의 반성도 없는 일본 지성의 태도, 그리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진지한 모색도 없이 오로지 단계적 패권 정책에 몰두하는 일본 자본의 비정한 ‘작위’.
그리고, 그 길을 쫓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더더욱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출근시간에 맞추어 전철을 타 보았다.
아사쿠사(천초)-우에노-도쿄역에 이르는 멀지 않은 거리.
도쿄 순환노선인 야마노테선에는 아예 의자를 들어올려 모든 승객이 콩나물처럼 서서 가는 전철도 운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 출근길 풍경과 다른 것은 그처럼 복잡하고 바쁜 출근길이 참으로 조용하고 정연하게 이루어진다는 것.
10년, 20년의 훈련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질서와 정숙함, 일본의 특징인 ‘와바사비(숙적)’의 문화.
아사쿠사, 키가 작은 풀.
작은 주택과 낡은 가구들을 그대로 간직하며 검소하고 겸손한 삶,
무사들의 지배 아래에서 오랜 전국의 역사를 살아온 백성들의 문화.
이런 문화적 배경이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닐까.
주종관계를 축으로 짜여져 있는 사회조직, 연공서열 또는 종신고용이라는 기업의 인사원리 등과 상호 광범위하게 관철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후지산.
높이 4,000 미터, 정상에 백설을 이고 있는 아름다운, 그러나 화산의 폭발로 이루어진 산이며 키 큰 나무 하 그루 키우지 않는 산.
일본경제의 전개과정처럼 경제적 논리가 아닌 민족주의의 증폭과 전쟁이라는 정염을 도약대로 삼아온 것-후지산의 폭발과 어쩜 같지 않은가.
국가는 부강하나 개인은 가난하다는 일본경제와 일본사회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전철과 신칸센 그리고 택시 속에서,
시골의 작은 마을을 지나며, 키 작은 풀들이 살아가는 여러 가지 모습들,
검소와 근면이라는 완고한 질서 속에서도 키 작은 풀들은 각자의 취미와 삶의 여백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루스 삭스, 모든 여학생들이 하나같이 발목에 흘러내려 겹겹이 주름이 잡히는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단순한 유행과는 질적으로 다른, 소속감에 대한 강한 집착 같은 것,
일본 사회를 살아가는 집단적 지혜일 것,
똑같은 키를 가진 풀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느낌이 들었다.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은 기어이 우리의 잣대로 재단하려고 하는 아집은 없는 것인가.
호수에는 그 호수에 돌을 던진 사람의 얼굴이 일그러지게 투영된다.
우리가 대상을 인식한다는 것은 결코 호수가 호숫가의 나무를 비추듯 명경처럼 수동적인 것이 아님은 물론이지만,
돌을 받은 호면의 파문 역시 우리의 인식을 온당하게 이끌지 않는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일본에서 만나는 수많은 친절에 대해서도 그것이 속마음이 아니라고 매도할 것이 아니라,
서슬 푸른 사무라이들의 일본도 아래에서 살아오는 동안 스스로 인정을 단념하고 차디찬 돌멩이 하나씩 가슴에 안고 있는 외로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일본인들이 몸에 익히고 있는 겸손과 절제와 검소함이 비록 쓸쓸한 것이긴 하지만 우리들의 헤픈 삶을 반성할 수 있는 훌륭한 명경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혼란스러운 것은 후지산과 아사쿠사라는 2 개의 이미지가 이루어내는 극과 극의 대립,
아시아를 탈출하여 서구를 지향하며 달려가는 일본 자본주의의 모습과, 일본인들의 생활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근검과 절제,
가난한 개인과 부유한 국가.
더욱 혼란스러운 것은 이미 그 의미가 총체적으로 회의되고 있는 일본의 근대성에 대하여는 일말의 반성도 없는 일본 지성의 태도, 그리고 공정한 사회에 대한 진지한 모색도 없이 오로지 단계적 패권 정책에 몰두하는 일본 자본의 비정한 ‘작위’.
그리고, 그 길을 쫓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더더욱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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