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군대에서,1970-1977

문서수발병, 빨간편지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0. 14. 03:56

-문서수발병, 빨간편지

인사과 행정병으로서 주요업무는 사병의 진급.휴가등 이었지만 부대로 들어오는 각종 서류접수와 사병의 편지발송등이 포함되었다.

어느날 도착한 편지들을 포대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하고있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편지 한통이 있었다.

수신인은 본부포대로 되어있었으나 이미 제대하고 나간 사병앞으로 온 편지였다.

수신인 부재편지로 분류하여 개봉하지않고 쓰레기통으로 버리는 것이 올바른 일처리였겠으나 그 빨간글씨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편지내용을 훔쳐보는 것은 신사답지못한 행동일 것이어서 ‘나는 인사과 근무하는 문서수발병이며 편지개봉은 하지않았으며 수신인은 이미 제대하였다’는 내용을 발송인의 주소로 보내고말았다. 답장이 올까말까? 답장이 반드시 올것만 같은 기대감으로..., 답장이 온다면 과연 어떤 내용의 답장이 올까 호기심을 담아서....

아니나 다를까 그녀로부터 회신이 왔다. 이번에는 빨간팬으로 쓰지않았지만 그녀의 편지는 사뭇 품격이 느껴졌다. 나는 다시 답장을 보냈고 그후 우리는 소위 팬팔을 하게 되었다.

단조롭기만 하던 나의 군대생활이 때아닌 여인과의 팬팔로 전혀 새로운 환경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녀는 나의 글솜씨에 감탄하는 듯 하였고 나 또한 그녀의 편지품격에 여러 상상들을 덧붙여나갔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그녀는 부대로 면회를 오기 이르렀고 나는 휴가를 나가면 그녀와 만나기도 하였다.

우리는 서로 말이 통하였고 제대하고 나서도 우리의 관계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내가 졸업하기전 그녀는 나에게 우리의 관계가 더 발전하기를 요구하는 듯 하더니 내가 마땅한 확인하기를 거부하자 돌연히 나의 앞에서 사라져주었다.

새삼스럽게 운명이란 단어를 또 꺼내보았다.

빨간글씨의 편지가 그때 눈에 들어오지않았다면, 내가 회신을 보내지않았다면...나의 군대생활은 어떻게 되었을까? 크게 바뀌지야 아니 하였겠지만 처음으로 알지못하는 여인과 상당기간 동안 팬팔관계를 유지하면서 나와 성이 다른 사람, 이성의 문제를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 아닐까?

풋사랑? 장래를 기약하지않은 여인과의 팬팔은 어디까지가 용인될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완전한 자유를 추구했던 진정한 자유인이었음에 틀림없고 나는 그때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풋내기였고 따라서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도모르게 군대시간을 때운다는 간단한 생각으로 그녀와의 팬팔을 유지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아무런 의식도 개입시키기 싫어하면서 억지로 나만의 헛된 자유를 즐기면서 그녀의 자유가 어떠하였는지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지 않았나 조금은 그녀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지금은 그러한 나의 태도가 참 못났었구나 생각된다.

 

빨간편지 이야기를 쓰다보니, 군대오기전 수원 고등동 하숙집 텃밭에서 태워버린 서석동누나의 편지가 생각난다. 농대기러기 후배들은 농담삼아 연상의 여인이라 불러졌던 그 누나.

나는 그 누나와의 관계를 ‘좁은 문’의 알리샤와 제롬으로 치환해서 키워왔었다.

구체적인 애정표현이 아닌 추상적이고 은유적인 표현만으로 우리의 관계를 그려나갔다.

답답하기도 하고 너무 변죽만 울리는 표현이어서 가끔은 화를 내보기도 하였지만 형식을 파괴하고 내용을 까발리기에는 나의 용기도 없었고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는 정말 철부지였다.

마치 어둠속에서 보물을 찾는 시늉을 더듬더듬 했달까?

고1때 조선대 학장집에 입주가정교사로 들어갔을 때 전여고 2년생이던 작은누나.

보성촌놈이 처음으로 광주의 상류사회에 눈이 뜨이고 그 누나로부터 나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그냥 눈빛으로 그냥 마음으로 배웠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편지가 오갔고 방학때는 나는 전대문리대 영자신문사로 놀러갔다. 여름방학때는 문리대앞 등나무 아래에서 헛헛하기만한 이야기로 귀한 시간을 소비하고 보냈다.

큰누나 산후조리 때문에 서울정능에 잠깐 와있을때는 수원에 있던 내가 올라와 만났다. 무슨말들을 어떻게 했는지는 기억도 없지만 참 순수하고 자유로운 만남이었다.

한편으로는, 내가 무엇을 하고있는지 화가나고 반문도 해보았지만 그때의 나는 순진하기만하였고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지진아일 뿐이었다.

‘나는 프리마돈나도 아니고....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는 누나의 답장으로 나의 머리와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그 이후였을 것이다. 누나와의 모든 편지를 모두 불태워버렸던 것이...그때 그동안 내내 써왔던 일기장까지 함께 태워버렸다.

지금 생각해보니...태우는 것이 아니었는데...지금 그 편지와 내 일기장이 보관되어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얼마나 순진했는지 내가 얼마나 바보였는지 내가 어느정도 모자랐는지 모두 알아볼 수 있었을 터인데...아깝고 또 아깝도다...

왜 그럴까? 자서전을 쓴다고 쓰는데 연애편지 또는 연애이야기를 더 구체적으로 서사할 수 없구나...있는그대로 쓰로 가능한한 많은 내용들을 써내려가야하는데 많이 써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없으니..참 답답하도다. 누가 이 글을 읽을지는 모르나 내가 글을쓰면서 버벅거리다니...참 내가 못난 것인가? 말이 자서전인데 그래도 여기까지라도 써놓고 넘어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