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과 박병장, 대대장이 되다?
전입 3개월도 되지않은 신병이 첫휴가를 가다니 195포병대대 모두에게 화제거리가 되었다.
전입후 1년이 되어야 첫휴가를 보내주는 관례에 비추어보면 파격도 보통 파격이 아니었다.
거기에 서울대출신이 과격하고 혹독한 공수훈련을 자원했다는 사실까지 더해져 나의 유명세는 높아졌다.
첫휴가를 다녀오고 얼마되지않아 인사과 행정반 고참이 제대를 하였고, 행정반의 주요행사들을 다루게 되었다. 첫 휴가를 다녀온 후 어느 날 선임하사가 나에게 대대장의 연설문작성을 지시하는 것이었다.
대민행사의 일환으로 대대장이 군민앞에서 연설하고 표창장을 수여하는 행사였다.
그 행사가 잘 끝났던 모양이다. 대대장이 연설문에 매우 만족해했다는 것이었다.
그 행사 이후였을까?
부관과 선임하사는 인사과행정반의 주요행정사안은 거의 나에게 지시하였다.
아직 행정반에는 나보다 고참병이 대부분이었지만 전입신병인 나에게 주요일을 맡겼다.
나는 아직 이등병 계급이었지만 상병계급장을 달고(계급사칭=군대말로 일본어식인 마이가리) 인사과 주요행사를 주도하였다.
전입신병과 제대병들의 대대장 신고, 사병의 진급.휴가에서 장교들의 교육파견등 보직관리.휴가등 195포대 500여명의 장교.사병들의 인사를 총괄하게 되었다.
전입후 1년쯤 지나서는 아예 병장계급장을 달고 대대장 관인까지 관리하며 인사행정을 총괄하게 되었다.
이때, 사병들의 진급과 휴가에는 크게 까다롭게 굴진 않았지만 장교들의 휴가증관리에는 까다롭게 처리하였다.
5사단 양평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장교들도 주말에는 서울외박이 금지되었다. 휴가증을 소지하지않고는 위수지역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양수리 검문소에서 헌병들의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그래서 금요일만 되면 장교들이 인사과 박병장을 찾아들었다. 주말에 서울에 외박을 나가고자 하는 장교들은 나을 찾아와 비공식 휴가증을 원했다. 여자친구와 데이트약속이라도 잡히면 거의 안절부절.
포대사병중에 꼭 서울외박을 가고자하는 포대장들도 나의 단골손님.
사병들의 진급과 정기휴가를 관리하는 인사과 박병장은 어느새 195포대 실세가 되어있었다. 특히 서울로 외박나가고 싶은 장교들은 물론 서울외박가고자하는 포대사병의 간청을 받은 포대장들에게, 대대장 관인을 갖고있는 인사과 박병장은 주말만 되면 더 인기가 높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크게 잘못없이 참 잘했구나싶다.
자칫 자만하여 횡포를 부릴 수도 있었는데 과격하지않게 절도있게 행동했구나 자평해본다.
나의 선임들은 금품을 요구하기도 하고 술대접을 받기도 한 모양이었지만 나는 조금도 그런 부당한 요구를 하지않았다. 기껏해야 귀대하면서 살짝 전해주는 담배몇갑이면 충분하였다. 그것도 받자마자 전행정반요원들과 공유해서 소비했으니 떳떳하고도 당당하였다.
대신에 추운 겨울날, 행정반에 충분한 연료배급이 되지않을 때, 수송반에서 특별연료를 추가배정받아 오는 일, 취사반에 통닭등 특식이 나오는 날 푸짐하게 특식을 먹는 일, 주말이나 공휴일에 장교식당에서 특별배식을 받는 일 또는 의무반에서 비타민등 고급약제를 가끔 받는 일 또는 작전과의 사병교육에서 제외되는 일등 금풍제공이 아니 비공식 특별배려를 자연스럽게 받게 되었다.
부대배치받고 한달여 전입신병으로서 받았던 군대부적응 우울증은 말끔이 씻어내고 3년여 군대생활을 황제처럼 하면서 지냈다.
전입 1년여후부터 병장계급장을 달고 1년에 3-4회 휴가를 다니면서 군대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몸이 군대에 있다는 것만 빼고 모든 것이 자유로웠다.
제대 1년여를 남겨놓고는 인사과 행정반 최고참의 자격으로 야간행정반 근무를 핑계로 내무반점호 열외의 특전까지 받고 지내면서 쫄병사병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특혜를 누리며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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