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입신병 탈출...공수훈련 지원과 첫휴가.
5사단은 최전방에 위치하지않았지만 최전선에 위급상황이 전개되면 즉시 투입되는 예비사단의 임무를 띠고 있다하였다. 그래서 유사시를 대비한 평소에도 전사단병력에게 공수훈련을 이수하도록 권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수훈련은 일반병들이 일상적으로 소화하기에는 그 훈련과정이 너무나 혹독하다하여 일반병들은 공수훈련을 가능한한 기피하였다.
유사시 전방투입임무를 가진 5사단 사령부에서는 어떻게하면 병사들에게 공수훈련을 이수하게할지 고민하게 되었다. 특히 포병들에게 공수훈련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였다. ‘보병은 3보이상은 구보, 포병은 3보이상은 승차‘라 하지않던가?
‘6주 공수훈련을 이수한 병사는 7일의 위로휴가를 준다’
사단본부의 공수훈련병 모집안내였다.
본부중대의 사역병 차출도 지겹고, 내무반점호도 역겹고 또 가짜서울대생을 매일매일 봐야하는 것은 더 고역이었는데 사단본부의 공수훈련병 모집은 나에게 도피처이자 구호천사였다.
나는 아무도 지원하지않는 공수훈련병 모집에 자원하였다. 훈련이 빡쎄다는 포대의 포다리돌리는 포병신병들도 공수훈련이 혹독하다하여 기피하는 공수훈련에 내가 자원하니 부대 전체가 신기해하고 놀라워하였다.
특히나 인사과행정반 고참들은 나를 불러 공수훈련자원을 하지말라고 반강제적으로 한사코 말리는 것이었다. 고된 훈련은 그렇다쳐도 점프하다 잘못되면 허리를 다치고 다리가 부러질수도 있다고 현실적 공수훈련의 위험성을 들이대면서 나에게 인간적으로 하소연까지 하는 수준이었다.
나도 위험한 훈련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었지만 군대생활이 역겨워지고 사역집합이 싫고 가짜서울대생이 뇌리에 자꾸 밟히는 데 공수훈련만한 기회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거기에 7일 휴가까지 주어지지않는가 인사과행정반 고참들의 강요에도 굴하지않고 나는 포기하지않았다.
내가 포기하지않으니 고참들은 고참들 훈수를 내팽개쳐버리는 쫄병의 태도에 놀라면서도 푸념하듯 떠들었다. ‘모르긴해도 어차피 체력검사에 떨어질 터이니 그래 지원하는 용기는 알아줘야겠다’ 하였다.
공수훈련을 받으려면 기초체력이 튼튼해야했다. 공중에서 점프하려면, 낙하산의 방향을 조절하는 팔힘의 능력이 좋아야하고 또 땅에 떨어져 착지했을 때 낙하산이 바람에 따라 바로 잡히지않으므로 낙하산이 접힐때까지 낙하산과 함께 달려야하므로 다리힘의 능력이 빼어나야 했다. 그래서 공수훈련에 참가하기전에 기초체력검사가 이루어졌다. 팔굽혀펴기.철봉.달리기.오래달리기등 고난도 체력장시험이 있었고 나는 거뜬히 합격하고 말았다.
인사과행정반 고참들은 더 이상 군말을 하지않았고 선임하사는 크게 격려해주었다.
서울대출신이라 병약한 줄 알았는데 위험한 훈련에도 도전하니 용기가 가상하다는 것이었다.
며칠후 5사단 산하부대에서 20여명이 본격적으로 공수훈련을 시작하였다. 추운겨울날인데도 새벽 5시 기상하여 오후 5시까지 식사시간만 제외하고 훈련 또 훈련, 오로지 훈련이었다. 3보이상은 구보라고 하더니 움직일때는 무조건 뛰어다녔다. 피티체조는 기본이고 넘어지고 구르고 소리치고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르게 하루가 갔다. 훈련은 고되었지만 점호도 없고 훈련이 끝나면 자유였다. 육체적으로 고통스럽기는 해도 체력이 받쳐주는 나에게는 정신적 고뇌를 털어내는데는 더할 나위없이 좋았다.
6주 훈련중 절반쯤 소화했을때인가?
어느날 갑자기 훈련을 중단하고 공수훈련장 이곳저곳을 청소하고 정리정돈하라는 것이었다.
육군참모총장 (노재현 대장?)이 공수훈련 참관을 위해 방문한다는 것.
우리는 그동안 갈고닦은 기량을 참모총장 앞에서 시현하나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우리의 훈련을 참관하고 돌아간 참모총장은 사단장에게 지시하기를 ‘이 혹독한 추위에 병사들 동상 걸리면 어찌하려고 공수훈련을 시키느냐?’고 야단을 치고 당장 원대복귀시키라 명령하였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고된 공수훈련을 받지않게되었으니 한편으로는 잘되었다싶으면서도 도중에 훈련을 그만두어야하니 못내 아쉬웠다. 끝을 보아야 하는데, 곧 점프하게 되는데 점프를 못하게 되었으니 ‘공수마크’를 달지못하게 되었으니 아쉬웠다. 지상훈련(공중점프하기전 체력.기술훈련으로 훈련과정이 매우 혹독하다. 점프하는 순간은 육체적으로는 전혀 부담되지않는다. 지상훈련이 고되다.)은 거의 끝나가고 곧 점프할 날만 기다렸는데 정말 아쉬웠다.
바로 다음날로 원대복귀하였다.
부대에 돌아가니 또 난리가 났다. 인사과 박이병이 공수훈련 도중에 귀대하니 필경 고된 훈련을 참지못하고 자진 귀대한 것으로 판단한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참모총장이 훈련중단하고 전원 원대복귀시켰다고 설명해도 내말을 믿지않는 것.
그날 늦게 사단의 원대복귀 명령지가 행정반에 도착하고나서야 나의 말을 믿어주었다.
(그만큼 인사과에서는 신병 박이병이 어떻게 공수훈련을 무사히 마치고 ‘공수마크’ 달고 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던 것. 내 짐작생각으로는 서울대출신이 거의 말단인 포병대대에 온것만도 흔한 일이 아닌데 거기에 아무도 무서워서 지원하지않은 공수훈련을 받는다하니 놀라면서도 그만큼 그 용기에 감탄하고 결과를 크게 기대하고 있었던 것.)
마침 그때 부대내 모범사병 포상식이 있었다. 포대별로 1-2명씩 모범사병을 선발하고 헌혈을 하고 7주일 포상휴가를 주는 행사였다.
10여명의 모범사병들이 휴가복장으로 인사과에 집합하여 대대장 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대장 신고가 끝나면 5사단 의무중대로 가서 헌혈을 하고 7주일 휴가를 떠나는 것.
갑자기 선임하사가 나를 불렀다. 빨리 내무반에 가서 휴가복장으로 가라입고 대대장 휴가신고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갑작스런 선임하사의 말에 인사과행정반 전체가 놀라고 나또한 무슨일인지 어안이 벙벙한채 선임하사(상사 박종기) 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인사과 부관(대위 김정수)은 빙긋이 웃기만 할뿐 선임하사쪽으로 눈짓하는 것이었다.
선임하사; 박이병은 일병으로 계급장을 바꾸고, 헌혈도 하지말고 바로 고향앞으로 갓! 떡장수가 떡하나 더 먹는 것 모르나? 그래서 인사과가 좋다는 거 아닌가? 하였다.
나는 인사과 부관과 선임하사의 배려로 입대 3개월? 부대배치 한달도 채 되지않았는데도 첫휴가를 가는 첫역사를 쓰는 주인공이 되었다.
(입대후 최소 1년이 지나지않으면 첫휴가를 보내주지않았다. 이유야 여러 이유가 있껬지만 그때는 군대물이 어느정도 들어야 첫휴가를 보내고 그래야 탈영을 하지않는다고 생각하였다.)
후일 선임하사는, 내가 전입할때부터 유심히 보고 있었다는 것. 행정반에 올라오지않고 매일 선착순 사역에 나가기만 할 때 더욱 눈여겨보았다는 것.
제설작업할 때 그 사건도 알고 있었고 내가 인사과 신병이었기 망정이지 다른 신병이었으면 징계받았을 것이라는 둥.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모두 알고 있었다.
선임하사는 또 말했다. 서울대출신이 둘이 왔는데 하나만 받아야하는데 박이병이 눈에 밟혀 둘을 받았고, 병적기록부를 보니 데모하다 갑자기 군대에 오게되었고, 전입하고 나서 박이병이 뭔가 불만이 가득한데 군대니 어쩔수 없이 적응해야하는데 그 적응이 간단하질않고 어찌 극복하나 했는데 공수훈련을 지원하더라는 것. 혹 마음을 달리먹어 탈영까지 생각하나 눈여겨 보고 있었는데 공수훈련 지원을 하니 일단 안심했다는 것. 오죽하면 공수훈련을 자원했을까 참 독특한 친구로다 생각했다는 것. 젊은 놈이 대학에서 사회의 불의를 보고 데모할수도 있고, 공수훈련지원하는 용기가 가상했다는 것...공수훈련을 마치지못하고 귀대하자 이런저런 사정을 부관과 상의하여 모범사병들과 함께 휴가보내주기로 결정했다는 것.
서울대출신이 그래서 좋은가? 아니면 나에게는 무언가 모르는 ‘기운’이 있는가?
(인사과행정반 고참들도 내무반 고참들도, 나에게는 집합도 시키지않고 그 흔한 빳따도 치치않았다. 나중에 회사근무할때도 나의 고참사원들은 물론이고 과장.부장들도 나에게 함부로 하지않았다. 왜 그럴까 생각해보면....내가 눈을 너무 부라려서 아니 나의 큰눈속에 뭔가 ‘서기?’가 서려있어서 그럴까 생각해보기도 하였다.)
'대학.군대에서,1970-1977'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사과 박병장, 대대장이 되다? (0) | 2018.10.14 |
---|---|
빼치카 위의 동내의가 밤사이 사라졌다. 고문관? (0) | 2018.10.14 |
전입신병의 돌출행동? (0) | 2018.10.11 |
선착순 사역병, 눈오는 날의 반란? (0) | 2018.10.11 |
가짜 서울대 상대생,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0) | 2018.10.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