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11.일. 설날+1, 독서노트 ‘아직 오지않는 날들을 위하여’ 5(,끝)
==독서노트 ‘아직 오지않는 날들을 위하여’ 5(끝)
ㅁ.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각 개인에게 죽음은 큰 사건이고 비록 다 알고 동의햇다 하더라도 부당한 폭력이다.
-죽음을 각오함으로
써 죽음과 화해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죽음은 우리가 티끌로 돌아갈
때가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죽음은 협상 가능한 상대가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의 활동과정을 부식시키는 냉혹한 법칙이다. 죽음과는 임시로 휴전 맺는 것만 가능하다. 생은 죽음에 저항하는 힘들의 총체다.
죽음은 생을 더 잘 되살리기 위해 파괴하는 힘들의 총체다…우리는 지워질 것이요, 그로써 다른 이들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죽음의 죽음; ..죽음의 신아라는 저 평등주의자. 죽음을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난다. 죽음이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별을 헤다가 시냇물에 빠진다.
-오디세우스의 역설; 그는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 난파를 당하낟. 님프 칼립소는 그를 구해서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었다. 오디세우스는 7년간 칼립소의 애인으로 산다. 아리따운 수호자는 그에게 붋멸을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오디세우는 허구한 날 바닷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한다. 그는 매일 밤 그를 잠자리 상대로 삼는 칼립소가 지긋지긋하다. 여신만큼 아름답지 않아도 페넬로프가 더 그립다. 고향과 그곳 사람들이 보고싶다. ..익숙한 것의 매력이 낯선 곳의 유혹보다 질기다…제우스는 오디세우스를 측은히 여겨 헤르메스를 zkfflqa소에게 보내 그를 고향으로 보내주라고 권한다. 오디세우그가 나흘에 걸쳐 뗏목을 완성하자 칼립소는 그를 향유로 목욕시키고 식량을 마련해준다. 망망대해로 나선 오디세우스는 무서운 폭풍을 만나지만 천신만고끝에 결국 고향에 도착한다.(1..오디세우스는 칼립속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언젠가 끝날 수 밖에[ 없는 삶, 제한된 삶을 더 좋아한다…칼립소 또한 필멸의 인간, 생의 덧없음을 사랑하는 불멸의 존재라고 볼 수 ㅇ lTek.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심오하다 못해 심란하다…2눈에 보이지 않으며 어디에나 있는 신들은 영생을 누리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질투한다…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남으로써 그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로써 영원의 위대함과 육신을 가진 이들에게 부여된 시간의 가치를 동시에 입증하지 않았는가? 십자가에 매달려 흘린 눈물은 인간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신이 자기 위치에 싫증이 나서 세상을 만들었다면? 신은 피조물에게 온 힘을 다해 천국에 들어오라고 권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나? 신의 전능이 그의 약점은 아닐까? 인간의 의무는 신이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닐까?
-에덴동산의 즐거움도 덧없는 인간의 운명만큼 즐겁지늠 못하다..영원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이곳 여기가 영원이다.
=죽을 수 있다니 운이 좋기도 하지; 사망은 구원 아니면, 영원한 벌로 가는 좁은 문이었다…보잘 것 없는 지상의 재물을 버리고 더 귀하고 영원한 것을 얻는다는 희망도 있었다. 대속을 생각하면 끔찍한 공포를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그리스도교가 재창조한 영원 관념의 독특한 점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중요한 자리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이 지상의 삶 이후에도 존재한다니, 실로 놀라운 소식이다.
=’마크폴로스 사건’, 체코의 작곡가의 오페라; 16세기에 태어난 가수 에밀리아 마크로폴로스는 마법사의 실험대상이 되어 불로불사의 영약을 마셨다…3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고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목소리 또한 그대로인 그녀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생에 싫증이 난다. 주위 사람들은 다 그녀보다 일찍 죽거나 그녀이 방약무도한 태도에 질려서 떠나버리낟. 에밀리아는 사물들과 그림자들 사이에서 아무 애착도 없이 살아간다…자식들 친구들도 그녀에게 무관심하다…에밀리아는 주위의 평범한 인간들에게 ‘당신들은 다 죽을 거야. 운이 좋기도 하지’ 라고 말한다. ‘오, 주여, 어둠의 문을 열어주소서. 제가 그 문으로 사라질 수 있도록.; 죽음이라는 지평이 없는 삶은 기나긴 악몽이다. 모든 종류의 권태를 통틀어 보더라도 불멸자의 권태는 최악이다..불멸자는 영원한 벌을 받는 자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사랑하라;
-프로이드가 젊은 tldlsa(릴케?a)과 어느 산에 올라 경치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계절의 변화를 언급했다…시인은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가 겨울에는 흔적조차 남지않고 사라진다 생각하니 전혀 즐겁지 않다고 말했다..시인은 하염없이 감탄하고 싶은 것들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프로이드는, 덧없음이 가치를 더해주고, 아름다움과 완전성은 계속 가지 않기에 귀하다고 반박한다..’하룻밤밖에 피지않는 꽃이 잇다면 그 꽃은 한층 더 화려해 보일 겁니다’’
릴케는 만물의 무상함에[ 우울해하지만 프로이드는 소멸하는 것의 환희를 찬양한다…우리를 포함해 그 무엇도 사라지지않는다면, 삶을 견딜 수 없을 테고 영원은 소멸만큼 끔찍할 것이다…지속되지 않는 것에는 통렬한 위대함이 있다.
=죽지 않을까 두렵다;
-건강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들에게는 죽지 않으려 발악하다 사는 법을 잊어버린다는 반작용이 돌아오곤 한다…접시가 가벼울수록 명줄이 길어진다? 100세까지 그저 생존하기 위하여 진짜 삶을 스스로 금한다?
-수명 연장에 정신이 팔려 그 연장의 의미를 묻지 d낳고 자기도 모르게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다. 키케로의 말마따나 ‘짧은 생도 충분히 아름답고 좋을 수 있을 만큼은 지속된다.;
-우리는 100세 넘게 장수한 이들에게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눈을 빛내며 묻는다..그들의 대답은 늘 비슷비슷하다…많이 웃고 잘 먹고 많이 마시고, 왕성하게 사랑하고, 담배도 피우고, 아무것도 금하지 않았다나..나하고는 정반대라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불편해진다…주치의가 나한테는 그것들을 당장 끊지않으면 올해를 못 넘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뭔데 나에게는 금지된 것들을 누리고도 이렇게 잘만 살지? 어떤 사람들이야?
-양자택일의 문제다, 무미건조한 삶을 오래오래 살 것인가. 진짜 부딪히고 느끼는 시간의 충만함을 누릴 것인가..오래 살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위험요소가 있다. ‘나는 왜 몸에 나쁜 담배를 계속 피울까? 죽지 않을 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가 네 번이나 심장마비를 겪고도 끝ㄲㅏ지 하루 두 갑엣허 다섯 갑의 담배를 즐겼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결국 1991년에 일어난 다섯 번째 심장마비가 그를 데려갔다.
=우리 안의 좀비; 영화 속의 좀비는, 자기가 살아있다는 걸 모르는 죽은 자다. 현실의 좀비는 자신이 죽었다는 걸 모르는 산 자다.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어? 난 진작 줄은 줄 알았지!’ 그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이런 잔인한 말을 끌어내곤 한다.
-사건이 아니라 소식일뿐.
-현재보다 과거가 거 무겁게 느껴질 때가 온다. 그 무게가 얼마나 큰지 무거운 짐꾸러미 내려놓듯 내려놓고 싶어질 것이다.
-늙은 아이와 젊은 노인; 모든 세대는 이전 세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고 일어나기 마련인데,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이 특혜를 박탈당햇다.
ㅁ.영원; 불멸의 필멸자들..너에게 닥치는 일이 네 뜻대로 닥치기를 기대하지 말라. 만사가 일어나야 하는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자는 행복할 것이다.
=병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파스칼이 보기에 질병은 신이 보내는 신호요, 아픔을 참고 견딤으로써 조물주와 다시 가까워지는 방식이다..그러니 시련을 준 신에게 감사해야한다. 질병은 신이 가장 충성스러운 백성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낭만주의는 각각의 병을 예술저 영감의 전주곡 수준으로까지 격상시켰다..보들레르와 모파상의 매독, 도스토에프스키의 간질, 프루스트의 천식, 루소나 카프카의 우울, 프리츠 조른의 암이 그랬다.
-건강한 자들은 아직 자기가 병든 것을 모르는 환자들이고 병자들은 이미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명철한 의식이 있기에 치유를 생각할 ㅜㅅ 없다. 정상과 질병의 경계는 흐릿하다.
-이런 격언이 있다. 50세가 넘었는데 아침에 일어날 때 어디 아픈 데가 없으면 당신은 이미 죽은 거다. 통증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몸뚱이가 삐꺽대고 항의하고 화를 낸다..
=고통의 위계;
-어디서 들은 말로 환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떠들썩한 소문이 도는 병, 가장 친한 친구의 병이 다 자기 병이다. 다른 ㅏ람이 걸린 병이면 나도 걸리겠지….
자기가 걸린 병은 잔뜩 띄우고 다른 사람이 겪은 시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웬만한 환자는 자기 앞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귀족계급이다…질병으로도 귀쪽계급과 평민이 나뉜다.
-남의 건강문제를 유독 꼬치꼬치 캐묻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호 기심은 수상쩍ᄃᆞ. 그들은 우리가 아파하는 모습을 좋아하고 우리가 팔팔하고 잘나갈때는 싫어한다.
-우리는 어떤 의사를 선호할까?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 주는 의사다….우리는 안도하며 진료실에서 나오고, 그러다 어쩌면 의사가 오진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고통받는 자에게 불안은 끝이 없다..불안은 그의 나날을 극적으로 만들고 입체감을 더해주기게 없어서는 안 된다.
-끝이 두렵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더 환하다…비극적 낙관주의가 탄생한다…우리는 겸허하지만 결연하게, 결코 무릎 꿇지않겠다는 각로 불행을 상대하ㄴ다. 현대인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에 반항하는 주체다.
=초라한 위안;
-나는 죽을때까지 살고싶다.
-낙담케하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라. 최악을 상상하면 눈 하나 깜짝하지않고 그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세네카는 시리아를 정복한 로마 장수 파쿠비우스의 예를 든다. 그는 늘 그날 밤 죽기라도 할 것처럼 장례 만찬을 즐기고 술을 마신 후 자기를 장사지내게 했다…이 장수가 단말마의 고통을 흉내 내면 손님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 gotgek. 그는 죽음을 연습한다는 핑계로 폭음과 폭식을 즐겼다..
-예방 차원의 불안은 도착적 낙관주의의 한 형태다.
-앞으로 닥ㅊㅣㄹ 나쁜일을 세세하게 상상한다고 해서 정말로 대비가 될까? 예측한다고 비탄이 완화되지는 않는다. 불행한 일이 닥치면 우리는 그저 정신없고 황망할 뿐이다.
-식물 아닌 식물상태가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그 상태는 두려워함이 마땅하다…오늘 날 정말로 무서운 것은 신체와 정신의 기능을 하나하나 잃으면서도 남의 도움을 받아 병원 침상에서 생존하는 삶이다.
=망나니 양반,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정말로 인생을 충만하게 ‘살만큼 살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을까? 살 만큼 살았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오히려 개동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들 한다…어떤 이들은 죽음이 생의 사건일 수 없다고 본다..’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음이 없고, 죽으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죽음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중에, 우리가 먹는 양식 속에, 우리가 죽지않기 위해 먹는 약 속에까지 있다..그 이유는 죽음이 생의 원천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이 온다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종교와 철학이 아무리 너그러움을 발휘한들 죽음의 공포를 가리지는 못하낟…우리는 언젠가 무대에서 퇴장할 테고 잔치는 우리 없이도 계속되리라. ‘아주 컴컴한 그 문턱에서는 현자도 가련한 고아일 뿐이다’
-오 제발! 망나니 양반,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그런 순간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15분 남짓한 시간이 온 우주의 보화보다 더 값지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은 오고야 만다’
=영원은 지금 여기에;
-죽음은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출발의 수호자, 다양성의 ㅂ ㅗ호자다. 탄생의 은총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죽음의 숙명이 따른다. 헤겔은 이 섭리를 ‘아이의 탄생은 부모의 죽음이다’라는 인상적인 표현으로 요약했다.
-생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요, 번성하는 자손들을 통해서 영속되기를 원한다.
-있을 법하지 않은 천국을 추구하기 보다는 이승에서 몇 번이고 거듭나는 역량으로 불멸을 생각하면 어떨까?
-불가론자인 우리를 지탱해주는 놀라운 불꽃은 생이 끝날 때 오는 해방이 아니라 지금 여기, 소박한 일상의 산문 속에 있다는 믿음이다..영원은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삶이다. 다른 영원은 없다.
-나의 죽음은 당연히 끔찍할 것이다..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들을 전부 다 떠나보내고 나 홀로 이 세상에 남아 있고 싶지는 않다..나의 죽음은 잔혹한 공식 사실이다..’오래 산다는 것은 많은 이들을 먼저 보내는 것’/괴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찰나의 영원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 우리는 불멸이다…생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는 jrt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다음 세대에게 희열을 넘겨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충분히 생을 사랑해야만 한다.
=놀리적 ㄱ ㅐ소리를 피하느 위로의 기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위로에는 2가지 함정이 있다…형식적인 말이 되어버리거나 논리적인 개소리가 되느 것이다.
로마 철학에는 고결하고도 비장한 위로가 넘쳐난다…가령,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더 끔찍한 일일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기를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논리가 그렇다…한쪽 손을 잃었다고? 팔이 통째로 잘려나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라..상실을 획득으로 바꾸고, 악재를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로 상상해야한다.
-세네카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마르치아을 이렇게 위로한다..아들이 그대로 덕행의 길에서 충분히 오래 살다가 갔으니 기뻐할 일이다…아들이 더 오래 살았다면 방탕에 ?빠졌을지도 모르고, 감옥에 갔을지도 모르고..유배를 가거나 자결을 명받았을지도 q모른다….
-허구적인 고통을 들먹이는 자들은 슬픈 시늉도 거의 하지않는 상조회사 직원들 만큼이나 마음에 닿지 않는다.
-‘신께[서 주셨으니 신께서 거두어가심이라’; 종교는 여전히 고통과 죽음을 변모시키는 시스템으로서 비견할 상대가 없다…집단은 종교을 통하여 구성원의 상실에서 의미를 찾고 산 자들이 너무 힘들지 않게 지탱한다…
-그 예외적인 불행이 시간이 흐르면, 평범한 불행이 되고 자연의 섭리에 들 수 있어야 한다..’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 개별 사례는 그렇게 인간 조건의 일반성으로 녹아든다.
-위로하는 자는 상대의입장에 서서 상대가 불가피한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관습은 가혹하지만 부인할 수 없다…애도의기간이 규칙으로 정해져 있는 사회들이 많다…소득없이 괴로워하는 시간은 집단의 처방으로 끝을 내주는 것이 중요하다.
-슬픈 마음은 사회 질서와 다시 조화를 이루어야하낟…그 질서가 개인적 회한을 차츰 억눌러준다..가만히 귀를 기울여주거나 마음껏 슬퍼할 수 있게 내버려두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돕기에 충분한 때가 얼마나 많은가..위로하는 분야에서 가장 섬세한 배려는, 상대가 스스로 날개를 펼 수 있을 때까지 그냥 곀을 지키면서 넉넉한 애정으로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다.
ㅁ.에핖로그; 사랑하고, 찬양하고, 섬기라.
-젋고 예븐 여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46세의 남성이 샞벽 2시까지 문이 열린 담배가게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그는 밤새 동안 죽어라 달렸지만 쫓아오는 한무리들에게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레고라라는 남성은 노인이 되어있었다…우리가 기성세대를 바라본 경멸반 연민반의 그 눈빛으로 다음 세대가 우리를 바라볼 날이 언젠가 온다. 이것이 뼈아픈 교훈, 마침내 돌아온 부메랑이다..우리는 우리가 옛날에 멸시했던 바로 그들이 되었다…
-성장이 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노화는 비틀거리는 것이다…꿋꿋이 살아왓다는 사실이 나를 소유자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내게서 소유권을 빼앗아간다. 나는 지난 세월을 박탈당하엿다. 마치 그 나날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이너스가 되어 내 존재를 축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지난 세월은 보물처럼 모이지 e않고 되레 나의 빚으로 기록된다.
-삷은 증여인 동시에 채무다…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부조리한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이다.. 하지만 삶의 빚은 그들에게 상환할 게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후손에게 또같이 베풂으로써 갚아야 할 ㅓ것이다.. 빚 청산의 날은 생을 청산하는 날, 우리가 더 돌려주거나 선사할 것이 없으므로 죽음으로써 산 자들의 먹이가 되는 날이다.
-생은 우리 이전데도 있었고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 될 것이다…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생을 받았다기보다는 잠시 빌려 사는 사람들이다..우리에겐 생의 이용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나이가 든다는 것은 으레 생각하듯 의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름없는 티끌이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질 테지만 그건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오히려 그 반대다..
-흐르는 시간을 저주하기 보다는 열정적으로 이 시간에 동조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마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처럼, 70세, 80세에도 황금기를 추가로 더 받아낸 사람처럼, 자기 신체와 정신과 애정에 허용된 능력 이상으로 살아야 한다…우리가 어릴 때 배운 거라곤 딱 하나밖에[ 없다..생을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는 것…호기심 잃지 않고 체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애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이 터무니 없는 은총이 감사하다…2024.2.11.설낢+1에, ‘아직 오지않은 날들을 위하여’, 독서노트하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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