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송아지들이 '대평원‘의 마굿간으로 밀고 들어왔다.
농유공 입찰만 뜨면, 계약은 거의 ‘대평원농상(주)의 차지가 되었다.
그때 ‘대평원’의 위상을 나는 이렇게 풀었다.
(한국에 도착.통관중인 물량이 5천톤, 항해중인 물량이 또5천톤, 수단현지에서 선적준비중인 물량이 또5천톤이라고 할 정도였다.)
‘창업’후 1년이 채 지나지않아 ‘대평원농상(주)는 국내외 참깨시장의 최강자가 되어있었다.
(정부의 참깨입찰물량 6-7만톤중 거의 7-80%를 차지하고 있었다. 재벌그룹의 종합상사인 엘지상사.대우.해태상사등이 소기업인 ‘대평원농상(주)의 독주를 막지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되지않아서 IMF가 왔다.(1997.11?)
IMF가 터지자, 국내재벌상사들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지만, 대평원에게는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 되었다.
‘대평원’에게는 생각지않게 두가지 호재가 생겼다.
그 하나는, 해태상사가 IMF의 금융위기를 버티지못하고 그룹해체를 당하고, 회사가 도산하게 되었는데, 갈데가 마땅치않던 해태상사 농산부직원들을, 나는 수단산 참깨비즈니스와 인도네시아산 타피오카 사업의 급성장으로, 그들을 불러서 해결하였다.
만일 해태상사가 망하지않았다면, 다른 종합상사의 경력사원들을 채용해야 하였는데, 굳이 실력도 검증되지않은 종합상사직원을 채용하느니, 내밑에서 이미 실무경험이 쌓였고 능력이 검증된 해태상사 직원들을 채용하는 것은 ‘대평원’에게는 꿩먹고 알먹고나 마찬가지였다.
또하나는, IMF가 터지니, 원화환율이 급격하게 상승하는 것이었다. 보통7-800원 하던 것이 1500원대로 상승하니, 미화코미션을 받던 ‘대평원’으로서는 앉아서 2배이상의 환차익.수익을 얻게 된 것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상황이었는데, 모사 재인이고, 성사 재천이라 했듯, 이것은 나의 능력이 가져온 결과가 아닌, 하늘이 어떤 큰그림을 그리고나서 나를 그 속 어디인가에 자리잡게 한 것이었다.)
(치열했던 지난날들을 잠시 되돌아보면...나는 고민고민 끝에 임원이 보장되는 ‘본부장’자리를 마다하고 해태상사를 떠나, 동양글로벌로 스카우트 되어갔고...또 거기서, 고민 끝에 안정적인 보장된, 재벌기업 임원자리를 팽개치고 ‘창업’해서, 불과 1년도 되지않아 한국참깨시장의 ‘최강자’가 되었으니, 누가 이를 만들었단 말인가? 개인 Mr.Park이 만들었다고 내가 말한다면 그것은 얼마나 건방진 말인가? 얼마전까지만해도 참깨입찰물량이 많아야 1-2만톤 수준이었는데 갑자기 6-8만톤 수준으로 늘어났으며, 거기에 중국참깨는 수단참깨에 경쟁이 되지못하였으며, 또 수단참깨를 공급하는 자는 Huyton이었고, Huyton을 아는 자는 오로지 Mr.Park, 몇 년전 ‘큰기대하지않고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혹시 중국산참깨시장에 변화가 오면, 수단산참깨가 혹시?’하는 그야말로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수단출장간 인연이 발판이 되었으니...인간사 알 수 없는 일 아닌가?
이 모든 것이 개인 Mr.Park의 능력이라 할 수 없고, 어떤 ‘보이지않는 손’에 의해서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었다.)
(하물며, 더 놀라운 일이란 것이 또 있었으니, IMF였고...그냥 국내외 금융위기를 떠나서, 개인적으로 나에게 들이닥친 것은, 환율의 급격한 상승이었다...IMf 그리고 환율상승, 이를 어찌 내가 콘트롤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창업’할때는 1불당 700원대?였는데 ImF가 되니 1500원대?까지 올라갔으며, 나의 코미션수입은 그만큼 2배이상 자동적으로 늘어나고말았다. 나의 능력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난 일이었는데, 새내기.갓난아이 신설법인 대평원농상(주)의 법인 수익은 4-5배가 되고말았다.(참깨입찰물량이 4-5배, 환율상승이 2-3배=10배?, 생각지않은, 전혀 예상치않았던 수입이, 거짓말을 조금 보태서, 거의 10배 정도나 되었다.
이게 어찌 어느 개인의 능력여부와 상관있다 하겠는가? 어떤 ‘보이지않는 손’의 이끌림의 결과였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다...만일, 내가 아직도 해태상사에 안주하였다면, 또 동양글로벌의 ‘안정’에 멈칫하고 소심하였다면, 내가 만일 허허벌판, 엄동설한을 무서워해서 ‘창업’하지 않았다면, 나는 안정적인 ‘월급쟁이’, 대기업 임원자리를 차지하고 월급여 평균5백여만원을 받았을 것이고, 수단산참깨입찰실적이 매우 좋아서(물량도 4-5배로 늘었고 환율도 거의 2배이상 올랐으니, 해태상사나 동양글로벌의 농산사업부 영업실적이 그만큼 늘었을 것이니 보너스 또는 접대비를 상당금액 더 받았을진는 몰라도, 그것이 전부였을 것 아닌가?)
‘창업’후 불과 2-3년사이에 황금송아지 몇 마리가 ‘대평원농상(주)’의 금고속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또하나, 나에게 또 하나 호재가 있었으니, IMF가 터지고서는 해태그룹의 해태상사가 공중분해되었고 유능한 해태직원들이 ‘대평원’으로 찾아들었다.
(내가 해태상사에서 머뭇거리다 동양글로벌로 탈출하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또 동양그룹의 무역상사인 동양글로벌에 와서도, ‘임원자리’를 탐내고 그대로 거기에 안주하고 있었다면....만일 내가 갖은 수모를 참고 동양글로벌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나는 또 어떻게 되었을까? 내가 동양글로벌을 나오고 정확히 1년후 IMF가 터졌으며, 안정적 수익기반이 없던 동양글로벌은 동양시멘트로 합병되었고, ‘임원’으로 있었으니, 제일 먼저 나는 ‘해고’당하지 않았을까?)
(해태상사에서 근무했던 경험많고 유능한 옛부하들이 대평원농상(주)로 모두 몰려들었고, 일이 많아진 대평원농상(주)의 일자리는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나는 손하나 까닥하지않고, 경험많고 능력있는 옛부하들을 모두 다시 함께 일하게 되었다...이런 일들, 해태그룹이 공중분해되고, 동양글로벌이 합병되는 것이 어찌 내 개인의 능력으로 일어난단 말인가? 몇몇 호사가들은, 내가 눈이 좋고 ‘촉’이 좋아서, 내가 남달리 큰그림을 그릴 줄 알아서, 미리 먼저 해태상사를 떠났고 또 동양글로벌을 제때에 떠났으니, IMF 전에 떠났으니..이런 호사를 만나게 되었다고 말들 하였지만 나는 이를 전혀 인정하고 싶지않았다....모사 재인이고 성사 재천이라 하듯이, 일은 사람이 꾸미고 끝은 하늘의 뜻에 달려있다 하였다. 그 사람이 노력해야하고 또 정성을 다해야 하늘이 움직인다는 것이라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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