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사 금호실업(주)에서(1977-1980)

인천주안으로...‘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17. 22:05

//인천주안으로...‘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

 

역촌동에서 1년을 살았나? 주인집 아주머니는 첫째아들 형민이가 돌아다니면서 꽃밭의 꽃을 꺾는다는 이유로 전세연장을 해줄수 없다는 것 아닌가? 거기에 둘째 갓난아기가 밤낮으로 울어대니 귀찮아졌을 것. 야박한 서울인심이라더니....셋방을 얻어사는 주제이니 어찌할 것인가. 할 수 없지않은가?

다시 전셋집을 구하러다니느니 차라리 이 기회에 아예 인천주안으로 내려가 내집을 가지면 어떻겠나는 생각이 들었다.

1980년.

언젠가 중공과 국교정상화? 곧 중국시장이 열리면 중국과 가까운 인천이 좋아질 것이라는 엉뚱한 생각까지 들었으니 나의 실행은 전광석화.(중공이 열리면 그 발전속도는 엄청날 것이고 발전할 것이고, 중국과 가까운 인천이 바로 최대수혜지역이 되지않겠는가 어느 철모르는 젊은이의 얼치기 투자감각이었다...배불리 먹을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하고 막연한 생각 끝에 반에서 1등하는 최고좋은성적과는 상관하지않고 오로지 배불리 먹는 일을 하는 ‘식품공학과’를 딱찍어서 지원했던 69년도 고3시절의 나의 선택결단과 같은 맥락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철딱서니 하나없는 결정, 쓴웃음 짓게 하는 선택이었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했던가 머리를 잘못 돌리니 팔자에 없는 고생문이 열리고 말았다...인천주안으로 왜 가는가? 이사 다니기 싫어서? 왜 농대 식품공학과를 가는가? 그 좋은 성적으로 서울의대나 서울공대 인기학과를 가지않고...두고두고 사회적 수모와 냉대를 받는 길을 택했는가?)

그것은 또다른 운명이었다. 전혀 그래서는 안되는 결정을 아무런 걱정없이 결단내 버리니 누가 이를 생각이나 했고 말리겠는가?

나는 이렇게 초년고생을 스스로 또 저지르고 말았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그래도 나은 것은, 고3때 저지른 ‘농대’선택은 지금까지 두고두고 내 삶 곳곳에 속상처를 주면서 따라다니고 있지만, 인천주안주공의 임대아파트는 3년정도 지나고나서 또 극적으로 탈출하게 되어, 한때의 잘못된 판단으로만 남았을 뿐, 그 후엔 오히려 나의 선택에 좋은 길잡이 노릇을 해주었다.)

 

주택공사가 주안에 지은 13평 임대아파트. 월할부금을 몇 년부으면 완전히 소유권이 넘어오는 서민주거형. 서울과 떨어져 출퇴근시간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지만 내집이나 마찬가지이고, 더 이상 이사를 가지않아도 되는 것만으로도 띵호아. 지화자좋을시구였다.

문제는 우리가 가진 전셋돈만 가지고는 돈이 부족한 것. 가까스로 영광의 둘째처남이50만원 빌려주고 국세청다니는 손위동서가 100만원 빌려주어서 부족한 돈을 채워 주안주공아파트 13평을 계약하게 되었다. 총액 400여만원? 영광처남은 무이자 그런데 손위동서는 월3부..세상인심이 달랐다. 그때는 몰랐지만 동서의 3부이자는 일반적으로 그리하였지만 동서지간에는 결코 일반적일 수 없던 일이었다.

 

주안에서 시청까지 지옥철을 타도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주안아파트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주안역까지 주안역에서 지옥철를 타고 시청앞까지..대략 75분 정도. 서울에서 다닐때보다 거의 2배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주안역에서부터 승차만하는데도 힘이 들었다. 시발역인 인천에서부터 이미 만원이 되어 주안역에 도착하니 탈 때부터 영차영차.

억지로 밀고들어가야하니 하루쓸 힘이 벌써 빠져나가고 시청앞까지 짐짝이 되어야했다.

아침잠이 많은 나는 출근시간 1분이 아까웠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 정기권도 없고 매번 전철표를 사고 들어오는 전철을 보고 계단을 달려내려가야 했다.

어느날 한번은 들어오는 전철을 보고 계단을 두세개 한꺼번에 뛰어내려가다가, 마침 또다른 친구도 나와 함께 그리하고 있었는데 서로 부딪치고 말았다. 중심을 잃은 나는 발을 헛디디게 되었고 발목을 삐어 몇 달동안 발을 질질 끌면서 출퇴근을 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때 그 상황에 속으로 웃지만 만약 그때 발목이 아니고 얼굴을 정면으로 계단위에 부딪쳤더라면 어찌 되엇을까? 소름끼칠 정도로 끔찍하기만 하다.

또하나, 돈이 아까워서 병원에도 가지않고 자연적으로 나을 때까지 발을 질질 끌면서 회사를 다녔으니 내가 대단하기는 대단하였다. 돈.돈.돈.....

(대학 1학년때, 교양과정부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화학실험실이 준비되지않아서 우리 농대생들은 동숭동의 문리대 화학과 실험실을 빌려서 일반화학실험을 하였다. 스쿨버스로 상계동에서 동숭동으로 움직였고...실험이 시작하기전 점심시간과 함께 마로니에가 있는 문리대 대학본부 마당에서 우리는 배구놀이를 하고 있었다. 볼을 다투다가 몇이 부딪쳤고 나는 다리에 통증을 느꼈다. 내 왼쪽다리가 쥐가 났는지 경직되어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 쥐가난 다리를 끌고 ‘자연치유’가 될 때까지 병원에 가지않고..그 상태로 학교를 다녔다. 무지한 독종이었다. 그때도 돈.돈.돈이었다. 그런 생활을 참고 견디다니, 정말 무식한 사람이였다.)

---'인천주안탈출기, 부천 역곡대흥주택으로'는 다음에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