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합상사 금호실업(주)에서(1977-1980)

금호실업에서...결혼과 첫아들; '바쁘다 바뻐', 그러나 '무사태평한 나'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17. 18:13

/금호실업에서...결혼과 첫아들

77년10월 입사,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나는 금호실업에 입사하게 되었다. (70학번이지만 중간에 한해 휴학을 하였으므로 졸업은 78년 2월.)

입사하자 졸업하고 졸업하자 결혼하고 결혼하자 첫아들을 봤으니 숨가쁘게 돌아간 나의 20대 후반이었다.

(그때는 가정의례준칙이라는 것이 있어서 결혼할 때 하객들에게 음식제공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광주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서울에서 금호실업 입사동기들과 농수산과. 외환과 직원등이 광주까지 하객으로 내려왔는데도 식사한끼도 제대로 대접못한 아쉬움이 지금껏 남아있다. 물론 나중에 회사에서 점심으로 성의를 표시하긴 했지만 결혼식을 너무 간소하게 해야되는 것은 인정상 조금 문제가 있었던 제도였다.)

(나는 고교동기들, 사회동년배들 보다 결혼을 조금 일찍하고 아들도 조금 일찍 본 셈이었다.금호실업에 여러 가지 고마움을 가지고 있지만, 특히 근무하면서 수출학교 전과정이수하게 해주었고 틈틈이 타자교육도 시켜주었다. 결혼도 하고 의료보험혜택을 보면서 아들까지 얻게 되었으니 사회초년병 시절의 나는 금호실업이 전부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첫아들 형민이 태어난 날을 잊을 수가 없다. 78년 7월 21일.아침.7시경? 중구명동 백병원.

새벽에 산통이 시작되자 택시를 불러 망원동에서 금호실업의 지정병원인 명동의 백병원으로 급히 입원하였다. 입원하자 얼마되지않아 순산하였다.

(순산하자 간호원은 포경수술을 어찌할 것인지 우리집사람에게 물었다고 한다. 세상물정에 어둡기만하고 순수순진한 집사람은 그것이 가족계획정관수술하는 것인줄 이해하고 ‘하면안된다’고 하였다한다. 추가설명을 자세히 듣고서는 첫아들의 포경수술을 하게 하였다. 그만큼 우리부부는 세상사회물정모르는 순진순수한 사회초년병들이었다.)

 

첫아들의 순산을 보고나서 백병원에서 금호실업이 있는 을지로입구, 시청앞까지 담담하게 걸어오는데 다른 생각은 없고 날씨가 무척 덥구나하는 생각만 들었다. 어찌나 날이 찌든지 온통 사회가 싸우나찜통처럼 뿌옇고 후끈거렸다.

아무것도 없는 빈주먹의 젊은놈이 이제 식구 하나가 늘었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할지 걱정이 앞서기는커녕 담담하고 태평스럽게 날씨가 무척 덥다는 생각만하였으니, 좋은일인가 그렇지않은 것인가.

누군가는 걱정해서 모든일이 걱정없이 잘 해결된다면 걱정이 없겠다하였다듯이 내가 그리하였는가. 걱정해서 걱정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무슨 걱정을 미리 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배짱이 좋았다기보다는 금호실업이라는 안정된 직장을 갖고 있으니 밥먹고 살아가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을 것이라는 초보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그렇게 천하태평 아니었을까.

금호실업은 사회초년병인 나에게 음으로 양으로 많은 도움이 되었다. 직원들이 회사를 믿고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않도록 그런 분위기를 주었으니 금호실업은 이미 사회적공헌을 충실히 하고도 남았다.(지금은 사세가 기울어져 예전과 같지않아서 오래전 신세를 많이 졌던 나로서는 금호그룹에 대한 감회가 또 새롭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