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포구 망원동에서 신혼살림을...‘3층밥의 추억’
신혼살림집을 처형이 살고있던 망원동에 차렸다. 2층 양옥집.
전셋값이 천2백만원?
(시골 어머님이 전셋돈을 빌려주었다. 우리집사람이 저축해둔 돈 120여만원과 함께...어머니가 마련해준 전셋돈 때문에 우리는 내 월급의 반이상을 보성어머님께 매달 송금하였다. 내몫의 곗돈이라는 명분으로...나는 한푼도 나중에 받지못했다...그때 잠심13평 주공아파트값이 대략 3백만원정도. 나는 용감하게 결혼식이란 형식만 차리고 대부분 결혼혼수비용을 절약하여 잠실13평아파트를 사겠다고 어머니에게 폭탄선언아닌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일언지하 말도 되지않는 소리 그만하라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그런 상놈같은 소릴 지껄이느냐 두 번 다시 내앞에서 그런 야그는 꺼내지말라 어머니성품이 하늘을 찌르던 때라 나또한 더 이상 결혼비용을 집값으로 대체하자는 주장을 더 이상 하지못하였다.
끝까지 밀어부쳤어야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못하였다. 후회또후회되는 일 아닌가.
그때 내가 밀어부쳤더라면? 지금처럼 한번 확신이 서면 물불가리지않고 밀어붙이는 스타일이던 내가 다시 그 상황을 만난다면? 당연히 밀어부쳤을 것.
그러나 그때는 그때, 내가 아직 세상물정에 어둡고 자신이 없었으니 어머님 말씀을 따를 수 밖에 없었지 않는가. 아무도 어머님의 결정에 반대못하던 시절이었다. 오직 유일하게 셋째아들인 나만 어머님과 맞상대하며 사안에 따라 반대의사를 내었는데 그때는 일언반구 다시 꺼내지도 못하였다....또 운명이었다. 그때 나의 얼핏 들어온 그 선견지명으로 결혼비용으로 잠실13평을 샀더라면 전세이사하는 복잡함과 고생을 하지않아도 되엇을 것인데...지금 생각해보면 더욱 아쉽기만 한 일이었다.)
세상물정모르는 우리부부는 집사람언니가 하라는대로, 언니집과 가까운 어느 양옥집의 2층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새집이어서 깨끗하긴 하였지만 부엌도 별로로 만들어지지않은 셋집아닌 셋집이었다.
더군다나 주인집 거실을 지나 이층계단을 통해 접근이 가능한 셋방이었는데 그곳에 둥지를 틀었으니 이런 일을 어찌 잘했다 못했다 하지도 않은채 우린 그렇게 시작하였다.
(그 당시는 결혼이나 돌잔치등을 지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대접하는 게 일반적이었다...금호실업 농수산과 직원들을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하였는데, 집사람이 살림을 해보지않고, 대학졸업후 섬마을 영어선생님을 마다하고 한창 주가를 날리던 대우실업에서 회사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결혼하였으니, 살림살이가 무척 서툴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나 해보지않은 많은양의 밥을 하다보니 그만 3층밥을 짓고 말았다. 그래도 금호실업 농수산과 직원들은 바로 이런 것이 신혼의 참티가 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재미있게 신혼살림을 축하해주고 갔다. 아련한 추억이다.)
주인남자는 수학과외를 하는 전직교사출신이었다. 딸만 둘이 있는 집이었지만 우리부부를 참 잘해주었다. 그집에서 첫째 형민이가 태어났는데 어찌나 잘 돌봐주었는지 고마운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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