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또 이사...망원동에서 화곡동으로 또 역촌동으로
(결혼혼수비용을 아껴 잠실 주공13평을 무리해서 샀더라면 이런 개고생을 하지않아도 되었을 터인데...누가 나에게 서울생활 시작을, 신혼시절 대부분을 서울 길바닥에서 전셋집 찾아다니며 온통 소비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전셋집 시련도 나중에 내가 크게 되려고 하는 훈련일 뿐인가?)
망원동 처형집에서 얼마를 살았는가?
처형집이 서초동꽃마을로 이사가게 되어 우리더러 그집에서 살라는 것이었는데 우린 또 덜컥 그리 하기로 하였다. 독채를 전셋값으로 내집처럼 사는 것이니 더 좋다고 좋아한 것.(동서는 국세청 재직시절 좋은정보로 서초동꽃마을에 단독주택지를 사놓았다. 때가 되니 단독주택을 새로이 지엇고 그곳으로 이사하게 된 것이고, 살고있던 망원동집이 팔리지않아 우리더러 전세돈으로 살게 한 것.)
그런데 또 얼마되지않아 처형집이 팔리게 되고 우린 또 전셋집을 구해야했다. 뜨거운 여름날, 이곳저곳 전셋집을 알아봐야했다. 내가 회사근무하니 주로 주말만 되면 전셋집을 알아보게 되었는데 형민이는 걸리고 형보는 안고...우리집사람은 말도 못하고 힘든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우리는 2층전셋집보다는 독채전세를 사는 것이니 얼마나 넉넉할 것인가 두 번생각하지않고 오케이 하였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보니, 손위동서에게 좋은일만 시켜준 꼴이 되었다. 최소 2년정도는 그곳에서 사는 조건을 달았어야하는데 아무런 조건없이 들어갔더니 결국은 1년도 채되지않아서 또 다른 전셋집을 구해야 했다. 서초동꽃마을에 단독주택을 지어서 이사하는 것이어서, 살던 집이 제때에 팔이지않으니 우리더러 그곳에 임시적으로 살게 한 속뜻이 있었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순진하게 덥석 살겠다 한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얄밉기도 하고 어찌 자기들 생각만 하는지 쉽게 이해되지않았다...또 인천주안아파트 살 때 부족한 일부돈을 빌렸는데 월3부이자나 되는 고리를 동서에게 받다니 그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싶었지만 세상을 조금 살아보니 가까운 사람에게 특히 처체에게 그리 하는 것이 아닌데 그는 그리하였으니 누구를 욕할 것인가. 나의 순진함을 탓해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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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스로 얻은 전셋집은 화곡동.
이사를 간 첫날 구들장 장판을 들어보니 방바닥 여기저기가 갈라져 있었다. 연탄불을 때면 연탄가스가 새나올지 걱정이 태산이 되었다.
우린 그 다음날로 이사를 결정하였다. 마침 전세를 준 주인이 재전세를 준 피아노교습선생이었는데 서로 사정을 이해하고 흔쾌히 전세계약무효처리 하였다.
다시 급하게 전세를 얻은 곳이 역촌동 단칸방. 외풍이 심하여 겨울엔 추웟고 여름에 더웠다. 화곡동 방에 비해서 매우 열악하였지만 그래도 회사와 더 가깝고 급한 이사였으므로 우린 다시 적응해갔고 곧 평상으로 돌아갔다...
((.1979.12.29.토....형보 태어난 날...그날 눈이 내렸다...79년 수입2부 망년회를 명동에서 하였는데 끝날즈음 싸래기 눈이 내리기 시작하더니 눈이 소복이 내렸다.
1979년, 금호실업 입사 3년차때, 오일쇼크가 불어닥쳐 국내경기가 최악상태인데다가 엎친데덥친격으로 금호그룹은 큰집 삼양타이어와 경영권분쟁으로, '종합상사'를 정부에 반납하느냐 마느냐의 갈림길이었고, 식품전공인 나로서는 종합상사가 아닌 금호실업에서 계속 근무를 하는 것이 과연 좋은지에 대하여 깊은 회의에 빠져있었다...수입2부의 망년회분위기도 국내경기와 회사분위기가 그대로 반영되어서 매우 가라앉아있었다..둘째가 태어날 날이었어도 별 생각없이 회사망년회에 참여했고...터벅터벅 집으로 돌아오니 눈은 소복소복 많이도 내렸고 그렇게 둘째는 역촌동에서 태어났다.... 회고정리하여 추가...
서대문구 역촌동 단칸셋방에서...제일산부인과에서..응애응애..그날 영광에서 외할머니와 시영이가 왔었다..))
(이곳 역촌동에서 둘째아들 형보를 얻었고 1979년 12월 29일.토..또 해태상사에 입사하였다. 1980.4.1...서울생활중 가장 어려운 때였지만, 그래도 역촌동에 살면서 끝내는 좋은일들이 하나하나 태어나기 시작하였다. 둘째가 태어났고 금호실업에서 해태상사로 근무회사가 바뀌었다. 내 삶의 전환점이었을까? 밑바닥을 치고 이제 솟아오르는 일만 남아있었던 것일까? 그 이후로 모든 일들이 잘 풀려갔다.)
이사하는 고생이 언제나 끝나는가?
고생의 끝은 있는가?
산이 높으면 골이 있고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했는가?
이제 드디어 새로운 시작이 시작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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