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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팔불출 4----`저, 이번 추석에도 못내려가건는디요`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4. 21:50
팔불출 4;

'어허, 이놈 봐라. 또 돈 달라고 그러네, 허어 참.'
학교가 파하자마자 기성회비등 잡부금 납부서를 들고 학교 바로 밑에 있는 읍사무서로 쪼르르 달려가면, 돌아가신 선친께서는 '이놈 봐라' 하시면서도 전혀 귀찮지 않은 표정이셨다.
'아, 이놈이 글쎄, 한번 들으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니깐요, 허허허....'
넓은 읍사무소 사무실이 다 들리게 아들자랑을 더 많이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 아들놈이 들고온 고지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나는 항상 기성회비를 학교에 일등으로 갖다바쳤고, 곤궁하기 이를 데 없던 당시 다른 아이들에게는 몹시 부러움을 샀다. 선생님은 가끔 불러내어 뚜렷하게 칭찬도 해주었다.
그러던 것이 516 군사쿠테타가 일어나고 군인들이 정권을 잡은 뒤로 우리집은 크게 달라졌다. 선친은 읍사무소에서 강제 면직되셨는지, 우리집의 경제형편은 갈수록 나빠졌다.

전업농은 아니나 상당한 부농이었던 우리집은 516 후 불어닥친 공업우선정책으로 우리집의 농업소득은 갈수록 줄어들었으며, 거기에 농외소득이던 선친의 고정수입이 끊어졌으니
우리집의 가계는 적자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었다.

얼마간 논밭을 팔아서 서울에서 대학 다니는 큰아들 뒷바라지하랴, 나머지 7남매도 가르치랴, 정신이 없었을 것이었다.
더구나, 논밭을 더 팔아 광주에 조그만 가게를 시작한 것이 크게 화근이 되었다.
세상물정 모르던 시골읍내의 유지가 광주 시장바닥에서 견뎌낼 수 있었겠는가.

지금은 광주에서 살고 계시는 나의 '굉장한' 모친은 이 때부터 인심후덕한 시골 부잣집 며느리에서 억척 아줌마로 돌변하시게 되었다.
광주에서 팔지 못한 의류들을 시골로 가지고 와서 농촌에 외상으로 팔았다.
자연스레 농촌계를 만들게 되셨고, 나는 외상값 받는 것과 동시 곗돈 수금원이 되었다.
서리가 내리는 늦가을, 학교 가기 전 또는 사람들이 일 나가기 전, 아직 겨울옷을 입기 전, 아침 일찍, 아침잠이 많기만한 나는, 정말 그 일이 싫었다.
그러나 모친이 깨우면 일어나 1시간여 걸리는 주변 동네들을 다 돌아다녀야 했다.
때로는 쌀도 받아오고 보리쌀도 받아왔다. 그 일을 광주로 유학가기 전까지 하게 되었다.

그 때 어린 나이의 내 눈에 비친 우리집의 현실과 농촌의 현실은 나의 성장과정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농촌을 몸소 경험하지 않은사람은 그들의 표현되지 못하는 아픔과 서러움을 제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지금도 난 그들의 삶에 괜스레 어떤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다.
아직도 농업문제로 처절하게 투쟁하는 농민지도자들을 보면, 나만 홀로 빠져나와 안락한 도시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 어쩐지 어색할 때가 많다.

나는 우리농촌의 어려움과 붕괴를 어릴 때부터 직접 눈으로 보고 컸다.
덕분인지, 한 살 일찍 입학했다가 6학년을 두 번 다녀 동갑내기들과 졸업을 또 하게 되었고, 그래서 국민학교 졸업장이 둘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광주로 유학을 하게 되고 서중일고 6년을 거기서 보내면서 나는 시골과 광주가 어떻게 다른지 또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되었다.
내가 세들어 사는 자췻방 주인은 집 한 채 가지고도 자식들을 모두 대학까지 가르치고도 잘 사는데, 우리 시골부자는 왜 그렇게 할 수 없는지 그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 때는.

80년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그래도 어렵게 어렵게 꾸려가던 우리집 가계도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확실한 농촌경제의 몰락과 함께 몰아닥친 불황으로 '굉장한' 모친이 하시던 농촌계도 된서리를 맞고 이제 정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태국에 가있던 87년인가 드디어 고향을 떠나야 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농촌경제의 몰락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고, 그로 인한 농촌인력이 어떻게 도시로 이동하는지를 보여주는 농촌사회의 변화였다.
전통적인 농촌사회가 붕괴되고 새로이 물질주의가 우선하는 도시문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이었다.
수대에 걸쳐 살던 텃밭을 떠나서 타향살이를 해야하는 실향민들의 삶이 어떠할 것인가.
뿌리뽑힌 나무가 다른 곳에 잠시 뿌리를 내리고 연명한다해도 그 삶이 어떠할 것인가.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의 도시생활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었다.

지금 난 경제적으로는 더 욕심을 내지 않으면 그런 대로 먹고살기에 큰 불편함이 없다.
우리시대 같은 세대들이 살아온 과거야 비슷하여 모두가 고생하면서 살아왔지만,
난 어찌어찌 하다보니, 정말 하늘이 도와서, 누군가 운명적으로 도와주어, 지금 경제적 여유를 조금 누리게 되었다.
나의 원칙적 성격이나 자질 상, 변화무쌍하기 이를 데 없고 때론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사업을 꾸려나가기가 만만치 않을 것인데도, 다행히 오늘날 이만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오직 하늘에 감사해야할 따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 내가 부모에게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하나도 없는지 모른다.
돌아가신 선친에겐 더군다나 아무것도 지금 해드릴 수 없다.
'허어 참, 또 돈 달라고 하네, 이놈 참' 하시는 것 같은데, 난 지금 당신께 용돈도 드릴 수 없고 좋아하시는 돼지고기도 사드릴 수 없다.
'굉장하신' 우리 모친에게는 쓰시는데 불편하지 않을 만큼의 생활비를 드리고 있지만, 고향을 떠나오신 당신의 허전한 마음까지 돌려드릴 수 없다.

옛날에 비하여 내가 조금 여유 있는 것은 경제적 사정인데, 부모님께 해드릴 수 있는 게 없다니 이것이 우리들 돌고 도는 얄궂은 우리의 삶이며 그래서 재미있는 삶인 것인가.
고향에서 함께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아니 명절 때라도 꼭 다녀가기만 해도 좋으련만,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돈으로 대신 떼워버리게 하기 일쑤였다.
부모와 새끼들이, 도시와 시골생활이, 모두 함께 만날 수 있는 길은 정말로 없는 것일까.


이번에도 추석연휴에 또 새로운 핑계거리를 만들어내어 또 고향으로 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제야 비로소 해외여행이란 것을 한답시고 못 가게 되었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다음에 찾아뵈러 가겠습니다, 해야하니 이것이 정말로 팔불출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명절연휴만 되면 해외로, 관광지로 떠나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동의를 쉽게 하지 못하였는데 오늘 내가 당사자가 되고 보니, 팔불출이란 말로 얼버무리자니, 그래도 뒤가 쭈삣쭈삣거려진다.

팔불출은 팔불출인데 핑계거리 찾아내는데는 누구보다 재빨라서 그 방면으로는 팔불출이라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 이놈의 不出이여.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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