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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팔불출 2----비오는 토요일이 난 좋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4. 21:32
팔불출 2;
2004.9.18.토.

어젯밤, 큰애가 모처럼 일찍 집에 들어왔다.
양손에 뭔가를 가득 들고 들어왔다.
이넘이 이제야 철이 들어 무슨 선물을 사오나 했는데 알고 보니 그런 선물은 아니었다.
합격증을 받으러 갔는데 카드사 판촉요원들의 성화에 밀려 카드를 발급 받았는데 그 선물이라는 것이었다.

'야 이눔아,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카드는 왜 또 만들었어?'
--'카드사 직원들이 하도 열심히 사정하여서, 그만........'
'근데 사은품이 왜 이렇게 많아?'
--'한 곳만 해줄 수 없어서...........'
'아니 그렇다고 다섯 개나 했단 말이야?'
---'으응, 나중에 하고 보니 내가 제일 많더라구, 재승이는 4개 했는데...........'

아이쿠, 머리야, 이 팔불출, 언제나 철이 들까 모르겠다.
군대를 가기 전에는 이등병이 일등병보다 높은 것으로 알았던 순둥이,
군대를 가서보니 훈련을 받고 보니, 애비가 했던 '잔소리들'이 조금씩 이해가 가더라는 팔불출,
첫 휴가를 나와서는 처음으로 큰절을 하여 '응 이제 사람이 되어가는구나' 알려주었고,
동생에게는 '너는 꼭 장교로 가도록 하라'고 '명령'같은 것을 하여 사회를 알아 가는가싶어 조금은 안심이 되었었는데,
어제 일을 보니 아직도 사회가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첫장 첫페이지도 들어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아직도 애니메이션 장난감 수집광이고 어지간한 개봉영화 보기가 그의 취미인데,
이를 어찌할 것인가,
그의 방안 가득한 장난감을 보면 속이 터지다가도, 밋밋하고 팍팍하기만 한 나의 오늘을 생각하면 그의 취미활동을 반가워해야 할 것이나 어디 사회가 또 그런 단순함을 평가해주던가.
30여년 전의 애비처럼 뭐가 뭔지 잘 알지도 못하고 하고 싶은 대로 좌충우돌하던 그 팔불출이 아니던가.

좀 덜 떨어진 이야기들이 더 많이 있다.
방콕에서 생활할 때 이야기.
큰애는 초딩 2년, 작은애는 1년 때, 우리는 방콕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 때 애들은 영국계 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방콕에 온지 얼마나 지났을까, 하루는 작은애가 시무룩해서 집에 돌아왔다.
학교에서 영어를 못하여 화장실 가야한다는 말을 못하고 그만 바지에 '큰이바지'를 하고 말았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영어를 못해도 그렇지, 손짓 발짓하며 '응아응아' 또는 '끙아끙아' 하며 화장실을 갔어야 했는데
이놈의 아들넘들은 애비처럼 주변머리가 변변치 못하여 속으로 끙끙 앓다가 큰일을 저지르고 말았으니, 그 어린 애가 그 마음 얼마나 아팠을 것이며 그 고통이 얼마나 심했을 것인가,
팔불출 애비에 팔불출 아들이었다.

그럭저럭 방콕생활에 적응해 지내다가 어느 날 우리식의 학예회날, 부모들이 초청되어 학교에 갔다.
노래자랑도 하고, 연극도 하고, 그림도 전시하고, 학부모 면담도 하고, 학교의 큰 잔치였다.
연극을 보는데 우리 큰애도 나왔다.
'피터 팬'이라는 연극이었는데, 배역이 '해적 5',
딱 한번 살짝 무대에 나왔다가 뒤로 사라지는 역이었다.
아무리 못해도 그렇지, 후크 선장역은 바라지 않고, 그래도 '해적 1'은 되어야지,
아니 그래 '해적 5' 가 뭐냐, 최소한 '해적 2' 나 '해적 3' 까지는 해야지,
애비에미가 대중적이지 않으니, 그 아들도 '해적 5'에 만족해야 하는 팔불출 아니던가.
사람은 생긴대로 태어난대로 산다는데 어찌할 것인가.

방콕생활은 우리에게 좌절의 시간들이 더 많았지만 한편으론 또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던 시간들이기도 하였다.
나와 집사람인 어른들은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어찌 되었든 이것저것 많이 보고 듣고 하였으며, 꼭 '대한민국'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을 것이었다.

여러 사정들로 인하여 3년여의 임기를 조금 일찍 마치고 서울에 왔더니,
서울은 88 올림픽을 전후하여 많은 것들이 변해있어 정말로 '상전벽해'
우리는 완전 '태국 촌놈'이 되어 있었다.
애들은 이제 중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계속 부천에서 살수는 없었다.
이돈 저돈 긁어 모아 서초동에 반지하 전세살이를 하면서 소위 잘나간다는 강남학군에 큰애를 집어넣었다.

어느 날 큰애가 학교에서 돌아와서는 다시는 외국에 살다 왔다고 손들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 아닌 선언을 비장하게 하였다.
왜 그러느냐고 캐물었더니, '태국도 외국이냐'라고 놀린다는 것이었다.
부자동네라 그런지 대부분의 아이들이 외국에서 살다가 왔는데, 미국 일본 유럽등 선진국들이라는 것,
아빠는 왜 하필 후진국인 태국에 나가서 이 아들님을 쪽 팔리게 하냐는 요지였다.
못난 애비에 팔불출 아달님이었다.

또 하루는 아빠가 나온 대학 때문에 무슨 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왜 아빠는 그런 대학에 갔느냐고 되묻는 것이었다.
아빠가 시골출신이기도 하고, 또 폼날 것도 같고, 또 풍족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거기에 갔는데 왜 그러느냐 하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제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이놈의 부자동네에 학교를 다니니깐 별일도 아닌 것이 별일이 되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무어라 폄하를 하고 곡해를 해도 그것은 내가 하루 이틀 겪은 것이 아니고 또한 '웃기는 넘들, 못난 넘들'하며 속으로 참고 넘기면 되는 것이었지만,
문제는 내 아들놈이 오해를 한다고 생각하니 화가 치밀기도 하고, 한편으론 잘못된 것은 고쳐 바로잡아 주어야겠다고 생각되었다.
급히 광주에 연락을 해서 나의 중고등학교 6년 성적표를 떼서 올리게 하였다.
큰 아이에게 성적표를 보여주고, 대학은 꼭 성적순만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고 변명 같은 설명을 해주었었는데, 그 날 이후 어느 정도 이해를 하였는지, 학교생활에 늠름하게 대응하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우리의 서울살이에서 겪어야했던 시골촌놈, 팔불출들의 촌극,
난 지금도 가끔 그 때를 생각하면 성적표를 꼭 보여줬어야 했는지 아직도 자신이 서지 않지만, 우리의 서울생활은 우여곡절이 많기도 하였다.

남쪽의 변방출신이 서울 중심부에는 들어왔지만 맴돌기만 할 뿐, 실질적인 중심에 들어가지 못하고 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줄도 모르고 살아왔으니 정말로 팔불출이 아닐까, 어찌 알 수가 있단 말인가.
난 '비주류'임을 너무나 당연히 좋아하고 있으니 언제 '주류'에 편입될 것인가,

서울로 올라온지 이제 35년,
아직도 우린 주변부에 사는 비주류, 난 오히려 그것이 더 편한 영원한 불출, 팔불출 아니던가.
우리 자식들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되는 일이던가.

팔불출,
팔불출이면서도 팔불출이니 어쩔래 하며 살았는데, 이것이 정말 팔불출이 아닌가,
아이고 난 모르겠다.
이렇게 주렁주렁 주절주절 팔불출 이야기를 쓰는 것이 정말로 팔불출인 것은 모르고 있으니, 난 정말 팔불출인가,
아이고 난 모르겠당.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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