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불출 3; '적어 놔, 적어 놔'
‘나는 언제나 외국여행 한번 가보나,응?’
‘친구들은 미국도 갔다오고, 유럽도 갔다오고, 일본도 갔다오고, 했다는데............’
우리집‘그냥’께서 동창회나 몇몇 잘 나가는 친구들을 만나고 오기만 하면 슬며시 살짝살짝 긁어대곤 한다.
‘우린 3년이나 외국에 나가서 살다 오기까지 했잖아?’
난 그때마다 태국에서 생활했던 것을 무기로 꺼내들고 방어한다.
‘피, 태국이 외국 축에나 끼어요-오옷?’ 라고, 재차 공격하면 난 더 무기가 없다.
‘거, 모두 적어 놔. 어디 어디 가고 싶은지 적어놓으면 나중에 곧, 순서대로 가면 될꺼 아냐, 뭐.’
‘언제?, 언제? 맨 날 그 소리, 아휴 적어놓으란 소리 지겨워............’
이럴 땐 난 우리집의 개발독재자가 될 수밖에 없다.
‘아직 해야할 일들이 산더미처럼 많은데 어디 한가하게 우리가 외국여행이나 다녀오고 선진국 행세할 군번인 것인가, 우리나라가 지금?'
‘주제파악을 하고 살아야지, 정신나간 사람들 따라 하다가는 삼천포로 빠지게 되어 있는 것 몰라서 그래?‘
‘거 말이야, 동창회 없애버려야 돼. 특히 **여대 동창회는 빨리 없애야 해.’
‘남편들 밖에서 힘들게 뛰면서 뻘뻘 땀흘려 일하는데 선진국 여행 타령하고 옷 자랑하고 보석자랑하고,..어디 귀부인들이 다 죽었지 죽었어.’
'남편들더러 도둑질하라, 반강도짓하라 하는 것이지, 제 돈주고 해외여행하고 고급옷사고 보석사고 누가 감당할 수 있어?'
‘우리집은 절대로 그런 일 당분간 없어. 열심히 묵묵히 땀흘리며 일만 하는 사람들 생각도 해야지, 지금이 어느 땐데 정신 나간 사람들이라곤........’
이렇게 20여년간 ‘나를 따르라’하며 독재를 쓰며 개발시대이니 참고 기다리라고 해왔었다.
그런데 나이 50을 넘어서고는 이 ‘개발독재’의 말발이 서서히 녹스는 것을 느껴왔다.
파워 트랜스퍼.
어느 사이 우리집에도 권력 이동이 되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나의 독재가 먹히지 않고, 우리집 ‘그냥’의 말이 조용하지만 어느덧 힘이 빵빵하게 들어가고 있었다.
‘나 혼자라도 갈 거야.’
‘조금만 기다려, 조금만. 나도 이제 사무실 정리할 날 얼마 남지 않았어. 얼마나 더 할 거 같애? 조금만 기다려, 사무실 정리 대강 되면, 그 때 우리 배낭여행 실컷 가지, 뭐. 얼마나 좋아, 얼마나 낭만틱해?’
지연작전을 쓰면서 은근슬쩍 달래어 왔었다.
그래도 철만 바뀌면, 특히 봄이 되거나 가을이 되면, ‘나 혼자라도 갈 거야.’의 협박은 계속되었다.
‘조금만 참아, 거기 적어 놔, 어디 어디 가고 싶은지.........’ 간신히 달래고 버텨왔다.
더 이상 퇴로가 보이지 않을 즈음이 되었다.
무엇인가 어디론가 그 빵빵하게 터질 것 같은 압력을 일부 터뜨려야 할 때가 점점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우리 한번 우선 일본에 가자. 단, 큰놈이 함께 가는 조건으로다가‘
‘피, 그 애가 따라가려고 할 거 같아요? 또 핑계거리 대는구만’
돌아오는 건 여지없는 불신이었고 핀잔이었다.
‘하여튼 한번 이야기나 해봐. 함께 일본여행 한번 가자고, 시험 끝나면........미국은 너무 복잡해서 안될 것이고....’
‘녀석이 일본 성투사 애니메이션광 아냐? 일본구경가면 얻을 게 만만치 않을 걸.......’
녀석이 시험을 치르고난 어느 날 7월 어느때, 어쩐일인지 일본여행에 별말 없이, 의외로 순순히, 동의를 해주었다.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려 나갔다.
나는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 아니 일망타진하는 셈이 되겠다고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늙은 마누라 죽어 위로금 받고, 보험금 받고, 새 마누라 얻을 수 있다고, 일석삼조라고 누구처럼 화장실에 가서 히죽이죽 웃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잘 된 일인가.
영원한 숙제 ‘마누라 여행 보내주기’도 해결되고, 아들놈 견문도 넓혀주면서 난 또 잔소리도 더 할 수 있고, 겸사해서 나도 20여년만에 다시 만나는 ‘비즈니스의 첫사랑’ 일본이 어떻게 변했나도 살피고,
또 그 위에 합격턱까지 모두를, 집사람에게 아들놈에게 나에게, 한꺼번에 내버릴 수 있게 되었으니, 이거야말로 일석만조, 일망타진이 아니겠는가!
=내 블로그; '자연.자유.자존', 일본 여행기 2004.9.20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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