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버렸다, 세상을 얻었다’(1박2일 지리산 종주기)(환갑기념)
ㅁ.글을 시작하며(지리산 종주는 나의 짝사랑이었다.)
나도 지리산 종주를 꼭 해보고 싶었지만 실행은 못하고 내내 끙끙대기만 하였다.
지리산 종주는 나에게 영원한 짝사랑이나 마찬가지였다.
그 짝사랑을 만나는 것이 쉽게 풀리게 되었다.
우여곡절 끝 환갑기념 유럽여행 일정이 잡히자 지리산 종주 계획도 따라서 곧 잡혔다.
환갑이 지나면 체력적 부담이 더 커질 터 무슨 일이 있어도 해를 넘기지 말고 여행 전에 실행하자 작심하게 되었다.
여행 며칠 전 화엄사에서 템플스테이도 하고 그 다음날 종주를 시작, 2박 3일의 종주계획을 잡았다.
호사다마, 전혀 예상치 못한 문제가 찾아왔다.
환갑기념 유럽여행과 지리산 종주 일정 사이 꼭 해야 되는 다른 중요한 일이 끼어들었다.
하루 줄여서 2일 종주로 하면 간단할 것이지만 환갑나이 2일 종주는 아무래도 무리아닌가.
그러나 하루를 줄이지 않으면 그 짝사랑 만나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지고 결국은 흐지부지 될 것 같아 답답하였다.
궁즉통,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었다.
밤기차를 타고 기차안에서 1박, 다음날 이른 새벽 성삼재부터 시작하면 이틀 동안에도 종주가 가능하다는 답이 나왔다.
밤기차의 옛 추억과도 함께 할 수 있으니 어쩌면 꿩 먹고 알 먹고 더 좋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환갑 나이에 2일 종주가 무리이긴 해도 그냥 밀어붙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다.
덥기만 하던 날씨가 출발하는 그날따라 돌변하였다.
비가 찔끔찔끔 오더니 오후부터는 바람까지 거세지고 기온이 뚝 떨어졌다.
겨울점퍼 등이 더 들어가니 배낭이 커지고 무거워졌다.
배낭 무게와 부피를 줄이기 위하여 종주 중 식사를 간편행동식으로 바꿨다.
햇반과 라면을 빼내고 인절미.육포.견과류.초코렛 등만 남겼다. 햇반과 라면이 빠지니 자동으로 코펠과 버너도 빠졌다.
최소한의 영양식으로 인간의 한계가 어디까지 일지 또 나의 생각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한번 느껴보기로 하였다.
내친 김에 이번 환갑기념 1박2일 종주의 주제를 ‘고행’이라 거창하게 이름 붙였다.
ㅁ.종주 1일전 (추억의 밤기차를 타고…)
밤10시, 용산역 대합실.
추억의 그 밤기차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여기저기 냄새를 맡아봐도 내가 추억하는 밤기차는 거기에 없었다. 한 세대가 지나간 그 자리에 옛 밤기차가 있을 턱이 없었다.
아스라하게 멀리 있다 가도 어느 사이 가까이 다가와서 서성거릴 것만 같은 그 밤기차는 없었다. 지나간 세월만 어른거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울긋불긋 등산복차림들만 있었다.
어느 등산동호회 모임일 듯한데 소리쳐 인사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대부분 여성들이었다. 언제부터 우리네 여인들이 이렇게 자유스럽고 호방해졌는가.
모처럼 옛추억을 만나려 한 내가 괜히 저 멀리 혼자 외톨이가 되는 듯하였다.
고통=즐거움?
고행=행복?
환갑이란 '다시 돌아오는 것', 편안함을 멀리하고 불편함을 가까이 고통을 친구삼아 자연과 함께 지리산 종주해보자! 새삼 다짐하였다.
밤기차는 정시에 출발하였다. 천천히 달리기 시작하였다. 어디 멀리서 옛 기적소리 들렸다. 기차는 수원을 지나고 있었다.
누구는 농자천하지대본을 따라 순진무구하게 찾아왔다가 사는 동안 내내 농업 디스카운트로 무참한 세파에 휘둘리며 힘들어하였다. 그러나 나는 꿋꿋하게 당당하게 잘 버티며 잘 이겨내며 잘 살아왔다. 만감이 교차하면서 밤기차는 꿈속으로 그 수원을 지나갔다.
얼마나 잤을까 날이 바뀌어 하늘에는 하현달이 떠있었다.
새벽 3시 20분, 구례구역 도착.
옛 밤기차는 10시간 정도 걸렸는데 이제는 불과 3시간여만에 올 수 있으니 우리는 정말 좋은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인가.
시골 기차역의 새벽녘, 밖은 아직 어둠 속 잔잔하기만 하고 전혀 춥지 않았다.
등산객 옷차림만 우왕좌왕 서성대었다. 하늘에는 별이 총총하였다.
'별의 숫자, 별의 밝기는 문명과 반비례한다'
서울에서는 쉬이 보이지 않던 별들이 지리산 기슭 새벽에 내 눈속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별천지였다. 그래, 별유천지 비인간의 세상에 내가 와있었다.
구례 버스터미널-화엄사-성삼재 행 버스가 때맞춰 기다리고 있었다.
새벽 첫 차인데도 버스가 꽉 찼다. 새벽 4시에 출발, 화엄사 찍고 성삼재까지는 딱 30분이 걸렸다.
칠흑 어둠속의 성삼재는 거센 바람과 함께 나를 맞이하였다.
구례터미널에서는 추위를 못 느꼈는데 이곳 성삼재에는 추위가 엄습해왔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는 이른 새벽, 버스에서 내린 등산객들이 모두들 비상 전등을 켰다.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헤드라이트를 켠 머리가 돌아가니 어둠속에서 불빛들이 하늘과 땅사이를 어지럽게 휙휙거리고 있었다.
마치 특공대 전사들이 마지막 점검을 하는 듯 하였다.
나도 손전등을 켜고 배낭에서 겨울점퍼를 꺼내 입었다. 바람만 거셀 뿐 이제는 추위는 전혀 없고 마음은 설레임 가득 벌써 지리산 종주를 떠나고 있었다.
(성삼재에서 노고단까지는 2.7키로여)
지리산 종주를 다녀온 사람들은 조언한다.
'노고단까지는 가능한한 천천히, 숨 고르듯이 오르라'
한걸음 또 한걸음 나는 새벽 어둠 속 지리산을 천천히 또 느리게 받아들였다.
오래전 나는, 잘 다니던 큰 회사에 무슨 독립만세 선언을 하고는 남도일주여행을 떠났다. 도중에 지리산을 찾았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때 묻고 또 물었었다.
나는 오늘 다시 노고단을 오르고 이번에는 1박2일로 지리산 종주를 한다.
무엇을 생각하는가, 나는 누구여야 하는가, 환갑이후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둠이 걷혀가고 있었다.
어느 사이 거센 바람은 사라지고 운무 또는 산안개가 여명의 노고단을 차지하고 있었다. 지독한 안개였다.
한낮이 되면 이것이 운해가 되는 것일까 바람이 없으니 노고단은 성삼재보다 높은 곳이지만 오히려 춥지 않았다.
춥지 않으니 안개가 실비가 되어 노고단 여기저기를 떠다니며 이곳저곳을 적시고 있었다. 나도 가냘프게 적셔졌다.
ㅁ.종주 첫날 (신비한 산안개, 내가 나비냐?)
아침 6시, 노고단 출발.
나는 드디어 그 짝사랑을 만나는, 1박2일 지리산 종주를 시작하였다.
얼마쯤 갔을까 어둠이 완연히 가셨다 그러나 바람은 거의 없었다.
산안개는 여전하여 시야는 터지지 않았고 노고단은 희끄무레한 회색 빛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늦여름 초가을의 지리산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행운은 내게 오지 않았다.
그 대신 안개비가 특이한 볼거리를 선물하고 있었다.
나무가지 사이로 햇빛이 비춰 들어오니 산안개가 반짝반짝 빛을 내며 무리를 지어 떠다녔다. 산안개 쪼가리들이 햇빛을 받아 굴절하며 반사되는 것이리.
마치 셔치 라이트를 켜서는 그 속에서 켰다 껐다, 보였다 사라졌다, 금빛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듯 하였다.
내가 지금 선계속에 있는 것이냐 속세에 있는 것이냐, 속세는 분명 아니고 예가 지금 어느 선계가 아니겠느냐, 노고단의 새벽 산안개와는 또다른 신비감이었다.
시인은 이를 어떻게 읊을까, 화가는 이를 어떻게 그릴까, 나는 이 순간을 놓칠까 마음의 샤터를 서둘러 눌러댔다. 마음사진을 찍어 내 마음 속 저 깊이 담아 넣어두었다.
내가 나비냐 아니면 나비가 나냐, 이런 신비한 상황을 누가 연출하는 것이냐, 짝사랑 지리산 종주는 나비의 꿈속에서 나를 맞이하였다.
어디쯤 왔을까 토끼봉이었다.
(노고단-토끼봉 7.5키로)
시계를 보니 얼추 11시, 5시간에 7.5키로를 왔으니 시간당 1.5키로, 그다지 좋은 속도는 아니었다.
벽소령 대피소를 늦어도 오후 3시30분 까지는 통과하고, 오늘밤 숙소 세석대피소에 오후 6시까지 도착하려면 시간당 2키로 정도의 속도는 내야했다.
‘축녹자 불견산’
사슴을 쫒는 자 산을 보지 못한다?
종주에 매달리면 지리산을 잘 보지 못한다?
종주는 마라톤과 같으니 산흐름에 맡기고 산과 호흡을 같이해야 지리산이 보인다!
지리산 종주가 무슨 올림픽 경주하는 것이냐, 굳이 종주 산꾼들처럼 걷는 속도를 바람소리 휙휙 나게 할 필요가 있느냐, 왜 1박2일이니 2박3일이니 시간굴레를 씌워 죽기 살기로 하느냐, 귀한 시간을 내서 지리산을 찾았으면 자연의 속도로 지리산속 자연을 만나고 가야 하지 않느냐,
천만번 지당한 말씀이지만 나는 오늘 중으로 세석대피소에 도착해야 한다.
1박2일로 한정하지 않았다면 느긋하게 지리산을 만날 수 있을 터인데 아쉬웠다.
환갑이후에는, 목표지향의 빠듯한 강박의 삶이 아닌, 자연의 흐름에 맞춰 한결 느슨한 삶을 지향하고 추구하자 다짐할 뿐이었다.
ㅁ.종주 첫날 2, 세석가는 길 ( ’이 또한 곧 지나가리니…’)
연하천대피소에서 채운 물통 2개가 모두 바닥이 났다. 물을 보충할 선비샘은 가도가도 나타나지 않았다.
세석대피소 가는 길은 들쭉날쭉 오르내리며 고도를 높여갔다.
오르막길이 끝났다 싶으면 또 나왔다. 이제는 끝났다 싶은데도 또...또 나왔다.
덕평봉. 칠선봉 그리고 영신봉까지 모두가 악명높은 험산준령들이었다.
얼마를 더 가니 선비샘은 결국 내 앞에 나타났다.
물통 2개에 물을 꽉꽉 눌러 담았다. 누가 보거나 말거나 누가 자연보호 식수자원보호를 외치거나 말거나 불 같은 나의 머리통에 물을 한 바가지 두 바가지 연거푸 들이부었다.
지금 시각 오후 3시30분쯤, 세석대피소까지 남은 거리 3.9키로, 마감시간 오후 6시, 시간적으로는 조금 여유가 있었지만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에서 험산준령을 타고 넘어야 하니 해찰부리며 갈 정도는 아니었다.
어느 지점이었을까 가파른 바윗길을 힘들게 올라왔으니 이제는 내리막길이 나오겠구나 싶었다. 그런데 또 험한 오르막길이 나왔다.
간신히 엉금엉금 기어서 한고비를 넘기는가 했는데 또 왠 철제계단이 가파르게 누워 ‘나를 타고 넘어가라’ 위세를 떨치고 서있었다.
엄살을 부린들 누가 받아줄 것인가 하나둘삼넷...다여일고야달아홉하고열, 계단숫자를 거칠게 헤아리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하나둘삼넷…..아홉하고 열…계속 숫자를 세며 오르는데 갑자기 가슴이 울렁거렸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숨이 가빠왔다.
순간적으로 아차차 이것이 그것이구나 싶었다. 심장이 갑자기 멈춘다더니 바로 이런 것일까 겁이 덜컥 들었다.
이 계단에서 쓰러지면 누가 아느냐 나는 그대로 주저앉아 쉬었다. 물을 벌컥벌컥 마시고 심호흡을 하고 또 하였다.
계속 쉬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하나둘삼넷..다여일고야달아홉하고열…오르고 또 올랐는데도 계단은 좀처럼 끝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얼마나 더 올라가야 한단 말이냐.
‘이 또한 곧 지나가리니...’
......곧 지나 가리니 이 또한...
지리산 곳곳에는 알맞은 자리에는 이정표가 있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세석 대피소가는 길목에도 곳곳에 이정표가 있었다.
어찌된 노릇인지 그 숫자가 예전의 그 숫자 지표가 아니었다. 내 마음 속의 허수였다. 이정표는 말짱 헛것, 도통 도움이 되지 않았다.
상상임신을 한다더니 어쩌면 내가 헛것을 보고 허수를 실수로 착각하는 것인지 몰랐다.
내가 지금 누구냐 내가 지금 내가 아니고 누구냐, 역 호접몽?
영신봉에서 세석가는 길은 지리산 첩첩산중의 오르내림, 단순 밀당이 아니었다. 계속 밀어 붙여야하는 험한 오르막길, 중복합체 산행의 연속극이었다.
당연히 요령이 생겼다. 힘이 떨어지면 더 이상 진행하지 않고 그대로 앉아서 쉬었다.
오리걸음을 하면서 다리의 경직을 풀었다. 쪼구려 토끼뜀을 하면서 기운을 불러들이고 몸을 추스렸다. 그리고는 다시 시작하였다.
가슴이 또 울렁거리거나 다리가 굳어지는 듯하면 또 쉬었다.
또 오리걸음을 하였다. 하늘을 보고 심호흡을 하고 또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새로운 이정표가 나오면 보이는 숫자의 2배 아니 아예 10배를 해서 느긋하게 마음을 가졌다. 거리가 아직도 많이 남았으니 서두르지 말고 느긋하게 천천히 가자! 주문하였다.
‘곧 지나 가리니... 이 또한...’ ‘Soon it shall also come to pass’
나는 또 솔로몬 왕자를 소환하였다.
고문을 당해본 사람이 말하였다.
‘언제 고문이 끝날지 모를 때가 두렵고 힘들다.
아무리 험한 고문도 끝이 있다는 것을 믿으면 전혀 두렵지 않다’
호흡이 거칠어지고 다리가 흩어지려 할 때 나는 수없이 되내었다.
'세석 대피소'라는 오늘의 끝은 분명히 존재한다. 가고 또 가면, 기어서라도 가면 그곳은 나온다. 돈워리 쓰바!
세석대피소의 지붕이 멀리서 보였다. 몸은 천금만금 꿈쩍하기도 싫었다.
나는 엉금엉금 거의 기다시피 하여 세석대피소 사무실 앞에 섰다.
기가 모두 빠지고 맥이 또 모두 빠진 상태나 다름 아니었다.
기진맥진의 사전적의미를 오늘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기진맥진 나; (나는 누구이며 인터넷으로 오늘숙소 예약을 하여따따다...)
대피소 직원; ???? (대피소 직원은 나를 말똥말똥 쳐다보고만 있었다.)
내 말이 혀에 꽁꽁 얼어붙어 그 놈의 말이 내 생각같이 떨어져 나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다시, 또박또박, 한마디씩 끊어서 하니 의사전달이 되었다.
나; 내 얼굴이 지금 하얗다? 탈진?
그; (씩 웃으면서) 거의 탈진인듯요...아버님, 저녁식사는 충분히 하시고 푹 쉬셔야겠네요!
저녁식사를 충분히 하라는 그의 말이 강하게 들어왔다.
언제나 모범생인 나와 ‘고행’ 규칙, 어찌할 것인가 지켜야하는가.
에라이썅 ‘고행’이고 나발이고 오늘 저녁식사는 충분히 해야한다고 하잖여시방!
우선 먹고 보자! ‘고행’을 버리기로 하였다. 쉬운 '파계'였다.
굳어진 인절미떡. 아몬드땅콩.그리고 육포.쵸코랫 등으로 간단히 때우려 했던 저녁식사 계획을 무참히 그러나 신나게 바꿨다.
햇반과 라면은 대피소에서 사면 되었다.
배낭무게.부피를 줄인다고, ‘고행’한다고, 집에 두고 온 코펠과 버너는?
나; 사무실에 남아있는 코펠과 버너 있을까요?
그;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허허허허허...대피소 역사상 코펠과 가스버너를 빌려달라는 등산객은 오늘 처음이네요...그런데 가스는 있나요?
나는 사무실에서 쓰는 코펠과 버너가스통을 받아서 불이야 불이야 취사터로 달려갔다.
벌써부터 얼큰한 라면밥이 지어지고 있었고 침 넘어가는 소리까지 들리는 듯 하였다.
라면이 잘 끓었는지 코펠뚜껑을 들었다 놓았다를 몇 번을 하였다.
아, 이 고소한 냄새! 그런데, 아, 이 고약한 모양새는 무엇이뇨?
내가 보아왔던 라면의 모양은 어디에도 없고 대신에 어정쩡한 죽, 일컬어 풋대죽, 바로 꿀꿀이죽이었다. 때가 어느 때인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후다닥 건더기를 걷어 올려서 후후후 급하게 입안으로 불어넣었다.
어서 어서 뱃속에 넣어야 했다. 꿀꿀이죽처럼 요상한 모습이어도 맛은 꿀맛이었다. ‘못생겨도 맛은 좋아!’
밥 달라 아우성 난리 부르스를 치던 뱃속이 조용해졌다.
몇 끼만인가 오랜만에 라면밥을 푸짐하게 채웠으니 이제는 든든하였다.
'고행' 규칙을 어겨 파계한 몸이지만 더 이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지리산에는 자연보호가 철저하다. 식수오염을 막기위해서 설거지도 할 수 없고 양치세수도 할 수 없다.
나는 한발짝도 움직이기 싫은데 잘 되었다 싶었다.
누구는 물수건으로 얼굴도 닦고 발도 닦는다 했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양치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대피소 숙소로 갔다.
대피소 숙소는, 마치 군대 내무반, 관물대가 있는 일반기간병 내무반이 아닌 논산훈련소의 대기병 내무반 같았다. 아니야 이것은 오래전 공수훈련부대의 내무반과 더 어울린다 싶었다.
나는 또 그 옛날로 빠져들었다.
학적변동자의 준비 없는 입대, 6주 신병 훈련을 마치니 한겨울 어느 전방부대에 배치되었다. 요령 부릴 줄 모르며 눈치도 없고 거기에 행동까지 굼뜬 나는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무슨 원칙 따지기 좋아하고 또 자기주장이 남다른 나에게는 까라면 까라는 군대문화가 매우 어려웠다. 마침 그때 공수점프 지원병 모집은 나의 탈출구이자 돌파구가 되었다.
힘든 훈련만 있을 뿐 점호 없고 사역 없고 집합 없는 그곳은 전입신병 쫄병인 나에게는 천국이었다. 늠름한 공수점프윙과 포상휴가는 덤이었다.
공수점프훈련 내무반처럼 세석대피소는 아무 통제도 없었다. 밤 9시 취침 통제만 있을 뿐이었다.
아직 7시 초저녁인데 신문이 있나 티브이가 있나 9시까지 어떻게 기다려야 할지 난감하었다.
나는 중간에 잠을 깨면 다시 잠자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특제품 다른 말로는 수면불량품, 나는 9시전에는 잠들지 않으려고 버티면서 오늘 지나온 길을 더듬어 다시 걸었다.
어젯밤 용산역 밤기차, 오늘 새벽 구례구 역 별천지, 어둠 속 성삼재, 노고단 산안개.....토끼봉.....벽소령 대피소….선비샘…철제계단….
목이 말라서 깨어보니 다음날 새벽1시30분이었다.
지난밤, 걸어온 길을 복기하며 메모를 하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 누가 들어오는지 누가 떠드는지 아무 상관없이 그대로 잠속으로 빠져든 것이었다. 평소 수면불량품인 내가 종주 특효보약을 먹고 새롭게 태어난 것이리….
꿀 잠, 깊은 물처럼 푹 잤으니 온몸이 가뿐하였다.
벌컥벌컥 물을 들이키고는 밖으로 나왔다. 대피소밖은 차가웠다. 새벽 찬공기가 몸속으로 왈칵 쳐들어왔다.
이것도 산안개일까 새벽 노고단과는 다른, 한밤중 짙은 안개가 세석대피소를 철저하게 포위 점령하고 있었다.
밤하늘은 온통 검은 회색 빛 구름이 뒤덮고 있었다. 그 가운데 별하나 외로이 떠있었다.
북극성일까 나를 찾고 있는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별은 내게 앞으로 모든 일 모두 좋을 것이다 말해주었다.
침상으로 돌아가 다시 잠을 청해보았지만 눈은 말똥말똥 머리는 오히려 새록새록 더 맑아졌다. 전전반측, 잠은 다시 오질 않았다.
옆자리 올빼미 산꾼이 주섬주섬 짐을 꾸리고 있었다. 나도 어둠 속 산행을 해보자! 하였다.
삭풍 휘몰아치는 광야에 홀로 나서는 어느 독립군처럼 나는 모두 잠 들어있는 대피소 내무반을 조용히 더듬어 걸어 나왔다.
ㅁ.종주 둘쨋날 ( ‘좁은 문’, 세상을 보았다. 세상을 얻었다.)
새벽 4시, 세석대피소 출발.
세석대피소의 외등 불빛 한계를 벗어나니 사위는 온통, 깜깜 또 깜깜, 암흑세상이 따로 없었다.
그 별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모두가 먹통, 눈앞에 칠흑의 바다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더 적확한 표현으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거기에 거센 바람이 불어대니 무슨 기괴함마저 느껴졌다. 비까지 내렸다면 풀세트 공포 괴기영화 속 주인공이 되고도 남았다.
정말 이 꼭두새벽에 지금 움직여도 되는 것일까.
(세석대피소-2.6키로-연하봉-0.8키로-장터목대피소)
어제 경험으로 이정표상 거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더군다나 이 어둠속에서는 이정표는 방향만 짐작하고 참고할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석대피소에서 나와 어둠속에서 만나는 첫길은 돌밭이었다.
비상 손전등을 켜니 반경 한자만큼만 보였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던 것이 한자 만큼이나 보이니 눈 먼 박봉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보이는 만큼만 걸음을 떼었다. 그 이상은 보이지 않으니 밟을 수가 없었다.
절대고독, 절대적으로 나만 있었다. 외롭다는 것 외톨이가 되었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천애고아였다.
어느 방향이 맞는지 어떻게 가야 하는지 도무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물론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비상 손전등과 이정표의 방향 뿐 그리고 이를 믿어야 하는 나 자신 뿐이었다.
자칫 헛디디면 그대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니 흐미 어질아찔하였다.
어둠 속으로 절대고독 속으로 두려움 반 설레임 반 아니 알맞은 두려움 속 야릇한 흥분이 찾아들었다. 조심조심 한걸음 또 한걸음,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우리 사는 세상이 그럴까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다른 많은 생각이 필요 없을 것이다.
새벽 세석대피소를 떠난지 얼마쯤 지났을까 멀리서 동이 터오고 있었다.
세상 어둠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고 어느새 또 다른 환한 세상이 내 앞에 벌써 와 있었다. 동이 터오는 그곳에 장터목 대피소가 볼품없게 덜렁 썰렁하게 서있었다.
아침 6시, 그러니깐 2시간을 더듬더듬 어둠 속 3.4키로여를 걸어온 것이었다.
시간이 가니 어둠이 가고 또 새 세상이 왔다.
우리 세상은 순환하며 돌고 또 도는 것?
고통=즐거움? 고통과 즐거움은 서로 다른 얼굴이다?
우리 삶은 모순덩어리 이율배반? 또는 정반합? 아니, 자연의 선택?
아니, 만사개유정? 아니, 일체유심조!
그 속에 내가 있다.
아침 6시30분, 장터목대피소 출발.
(장터목대피소---1.7키로--- 천왕봉)
평소같으면 넉잡고 1시간거리지만 체력이 바닥이 난 지금 1.7키로는 17키로가 맞다 하였다. 또 그 말을 되뇌이지 않을 수 없다.
장터목 대피소를 떠나자 마자 막상 눈앞에 닥친 것은 가파른 오르막 바윗길, 체력은 바닥이 났지 아침밥은 시늉만 하였지 난감할 뿐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때가 두렵지 끝이 있다는 것을 알면 이미 두렵지 않다’
시쳇말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 바윗덩어리를 하나하나 짚으면서 엉금엉금 기어올랐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오르지 않고 뫼만 높다 하더라!'
헉헉대며 오르고 또 오르니 통천문, 철계단을 기어올라 가야 하는 마지막 '좁은 문'이었다.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대학 신입생때 묻고 또 물었었다.
왜 넓은 문이 아니고 좁은 문이냐 왜 쉽고 편한 넓은 문을 놔두고 굳이 험하고 어려운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하는가 그것도 왜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그 좁은 문으로 가야하느냐구?
그때 '알리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제롬'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오늘 나는 왜 또 이 좁은 문을 올라가는가? 왜 '고행'은 해야 하는가? 그것도 환갑나이에 왜 하고 있는가?
나의 삶= 나의 운명? 나의 선택? 선택적 운명? 운명적 선택?
나의 자유의지는 있는가?
통천문을 지나니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하늘이 밝게 활짝 열렸다. 이정표는 제석봉이라 했다.
제석봉을 지나 얼마를 갔을까 곧 가까이 천왕봉 정상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제석봉에서 보던 하늘이 아니었다. 해맑은 아침햇살은 사라지고 대신 검푸른 구름이 잔뜩 도사리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사이로 다른 세상이 내 앞에 나타났다. 거센 바람까지 휘몰아 치고 있었다. 어찌나 바람이 거센지 서서 걸어 오를 수가 없었다. 사진을 찍으려 하면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1박2일 종주, 그 '고행'이 이제 끝나는 것이니 그 마지막 ‘고행’을 더 확실하게 매듭짓자는 것일까.
다리에 힘도 없고 너무 허기지기도 하여서 나는 그냥 바위와 바위를 바닥바닥 더듬으면서 낮은 포복자세로 기어 타고 올랐다. 천왕봉은 하나의 큰 바윗덩어리 그 자체였다.
금방이라도 무엇이 쏟아질 듯 무엇에 화가 나 있는 듯 잔뜩 찌푸린 얼굴의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바람!바람! 또바람까지 거세게 휘몰아치니 오히려 어떤 신비, 무슨 신성스러움이 느껴졌다.
천왕봉은 아무에게나 아무렇게나 내주지는 않겠다는 것 오직 한 사람 누구에게만 허락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누구는 나였다.
나는 끝내 천왕봉에 올랐다.
(시계를 보니 아침 07시56분, 새벽 4시 세석대피소를 떠난지 4시간, 노고단을 떠난지는 26시간만이었다.)
나는 또 뻥을 크게 쳐보았다.
'세상을 보았다. 세상을 얻었다'
만세.만세.만세!
ㅁ.글을 끝내며 (‘나를 버렸다, 그 꽃= 자유’)
넓은 것을 보려거든 바다로 가라
강한 것을 보려거든 미국으로 가라
큰 것을 보려거든 만리장성으로 가라
나는 하나를 더했다.
세상을 얻으려거든 1박 2일 지리산 종주를 하라!
그것도 환갑기념으로 혼자서 해보라!
'고행'
어찌하다 보니 '고행'이라는 이름을 엉겁결에 장난스레 붙여보았다.
하다 보니 그럴듯하게 '고행'이 되었다.
해 놓고 보니 환갑나이 1박2일의 일정은 '미쳤다' 수준이었다.
주제넘게 건방 떨며 '고행'을 한 것도 위험하기 그지없었다.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 하였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부족하였다. 나의 환갑기념 지리산 종주 1박2일은 참 대단하였다.
천왕봉에 오르자 벅차오르는 감동을 주체하지 못한 채 우리 마님에게 전화하였다.
‘세상을 보았다.’
‘세상을 얻었다.’
그는 바로 짓궂게 물었다.
‘얼마에 얻었어요?’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임기응변으로 도망가듯 말하였다.
‘나를 버렸다.’
'나를 버렸다.'고 무심결.엉겁결에 대답하였지만 해 놓고 보니 명답이었다.
‘’나를 버렸다. 세상이 보였다. 세상을 얻었다.’’
종주를 하는 힘든 시간 내내, 지난날의 나를 만나고 어루만지고 쓰다듬었다.
환갑이후 앞으로의 나를 그려보았다.
마침내 검푸른 하늘아래 거센 바람 속에 천왕봉은 ‘거기’ 있었다.
크고 넓은 바윗돌 아니 커다란 바윗돌덩어리 하나가 천왕봉을 둘러 업고 있었다.
나는 엉금엉금 바닥바닥 기어서 그 큰 덩어리 바윗돌바닥 위를 타고 올랐다.
천왕봉이 '거기'있으니 그냥 오를 뿐이었다.
아무 생각, 다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를 버렸다. 마침내 천왕봉을 만났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되어 있었다.
환갑 나이라고 누가 뭐라 하느냐 누가 늦었다고 하느냐
더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니 누가 무엇이 날 구속할 것인가
하고싶은 것 모두 그냥 할 것이니 누가 무엇이 날 방해할 것인가
그동안 잘 알지 못하여 깨닫지 못하여 하지 못한 것, 이제 아는 대로 내 맘 내키는 대로 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나는 자유, 나는 자유란 말일쎄.
'’올라갈때 보지못한 '그 꽃', 내려갈때 보았네''
시인은 왜 이 짧은 시를 노래했을까
앞만 보고 달리는 현대도시인들의 삶이 안타까워서 였을까
무엇때문에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사는 그들이 불쌍해서 였을까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삐 달리기만 하는 그들을 깨우쳐주고 싶어서 였을까
돈? 일? 출세? 성공?
또 뻥을 쳐보자.
나는 지리산 종주를 끝내고 내려오면서 그 꽃을 보았네...
올라갈 때는 보이지 않더니 내려오면서는 보였다네...
'그 꽃’=자유!
환갑나이 되니 이제서야 그 꽃이 보였다네
그 꽃은 자유이며 그 꽃은 잃어버린 나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네
환갑이란 다시 돌아와 새로 태어나듯 또 시작한다는 것.
자, 이제부터는 다른 시작이다.
사람들은 역사적 사건으로 시대구분을 한다.
부처.예수 태어나기 전후, 프랑스혁명 전후, 해방 전후 등등
여기에 나는 하나를 더 추가하였다.
1박2일 지리산 종주 전후.끝.박동희(1970년 식품공학과 입학, 손전화 010 3712 6932)
덧;
2011년 9월21일,수.07시56분.
노고단-천왕봉 25.5키로(노고단 출발 2011.9.20.화.06시-천왕봉 도착 2011.9.21.수.07시56분)
천왕봉높이 1915미터, 천왕봉 정상석 '한국의 기상 여기서 시원되다')
'지리산종주기(1박2일, 환갑기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지리산종주기(10.끝)....'그 꽃'=자유!!! (0) | 2013.01.20 |
---|---|
지리산종주기9----천왕봉에 올랐다! 세상을 보았다! 세상을 얻었다! (0) | 2013.01.20 |
지리산종주기8-----절대고독? (0) | 2013.01.20 |
지리산종주기7-----파계...'못생겨도 맛은 좋아' (0) | 2013.01.20 |
지리산종주기6----돈워리쓰바, '이또한 지나가리니' (0) | 2013.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