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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편한 것도 좋지만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것을 좋아한다면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7. 30. 16:57

사는이야기

몇 해전부터 큰형이 사위들을 보고 나서, 둘째형도 아들들을 결혼시키고 나서는, 서울의 셋째에게 추석과 설날 귀성길 혼잡에서 해방을 시켜주었다. 대신 추석 전 좋은 날 벌초하기, 아버님 기일과 어머님 생신 일에는 전원집합, 농경문화와 도시산업 현실사회의 엉성한 만남을 우리는 과감하게 만들어내었다.

귀성길 혼잡함에서 해방되고 나니, 이제는 남아도는 시간을 어찌해야 할지, 남들은 모두 시골을 가는데 나 혼자만 서울에 있어야하는 불편한 마음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신기한 숙제거리가 생겼다.

그렇다고 해외로 골프가방을 매고 떠나기는 아직 나의 상식과는 거리가 있고 그럴 만큼 낯도 두껍지도 않고, 올해는 마음먹고 오대산 월정사를 공략하기로 작정했었는데 비도 온다고 하지 회사 일도 마땅치 않지 하여, 비빔밥을 만들어 놓은 것이 서울근교의 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연휴의 시간도 죽이면서, 먼길 왔다 갔다 하는 불편함도 없이할 수 있으니까, 항용 해버릇하는 우리 식의 게으른 절충 끝의 현실적 선택이었다.

접근이 쉽고 산행이 짧은 청계산보다 조금 길게 갈 수 있는 산으로 하자 익숙한 북한산보다는 그동안 가보지 못한 도봉산이 어떨까. 마침 7호선 도봉산 역에서 내리면 접근이 어렵지 않을 것 아닌가.

간단히 산에서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이것저것 도시락을 만들었다. 집 앞 버스정류장에서 아무리 우이동 가는 버스를 기다려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아마 추석이어서 결행을 하거나 건너뛰어서 운행을 하는 모양이었다. 가까운 청계산으로 방향을 바꿀까도 생각해보았으나 집사람은 꼭 이번에는 도봉산을 갔으면 하였다.

오전 11시. 마을버스를 타고 7호선이 연결되는 고속터미널 역으로 갔다. 고속터미널 지하상가는 가게가 모두 문을 닫았다. 그야말로 '철시'. 경비원이 자전거로 순찰을 돌고 있었다. 평소에는 조금 과장하여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오늘은 추석이어서 모두가 시골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어젯밤 고속도로의 심한 정체가 왜 그렇게 일어났는지 오늘 이곳에서도 일부 알게 되었다. 누가 정의하였다. 귀성전쟁은 바로 농경문화의 몰락이요 이농현상의 다른 표현이다라고. 농업사회가 무너지고 도시의 정보산업사회가 그 자리를 점령해 버렸는데, 사회의 흐름을 어찌 거스를 수 있을까.

7호선 도봉산 역에 도착하니 12시 20분. 전철은 평소와는 달리 손님이 많지 않았다. 추석 연휴로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빠져나가서일 것이다. 시발역이 온수, 20여 년 전 생활들이 주마등처럼 잠시 떠올랐다.

방콕 가기 전과 다녀와서 또 몇 년, 서울로 들어오기 전까지 우리는 그곳에서 가까운 역곡에서 열심히 살았었다. 오늘 새삼스럽게 그 때 치열했던 생활이 오늘날의 우리 생활과 대비되어 빛나고 있었다. 옛날 생각들을 하는 동안 나는 속절없이 하품이 나오는 생리현상을 어찌 할 수가 없었다. 한 대여섯 번은 족히 하였을 것이다. 나오는 하품을 달리 막을 방법이 없었다. 거의 1시간 여를 지나서야 도봉산 역이니 멀기는 멀었다. 청계산이었으면 벌써 도착하고도 매봉까지 올라갈 수 있는 시간 아닌가.

아직 도봉산 입구와는 거리가 남아있는 듯, 여기저기 김밥장수들의 호객 소리가 만만치 않았다. 청계산 입구와는 분위기가 완연히 달랐다.
산이 더 깊어서 산 속에서 점심을 먹게 되기 때문일까, 음식점 구성도 어찌 붙박이식이 아니고 간이식 수준이었다. 상인들의 얼굴도 훨씬 공격적이고 여유가 없어 보였다.

모자를 파는 이동식 점포의 중년 아저씨는 오늘 즐겁지 않다고 쓰여 있었다. 시골을 가지 못해서일까 추석인 오늘도 일을 나와야 하는 신세가 마음을 짓눌러서일까. 얼굴에 그늘이 가득하고 전혀 즐겁지 않아 보였다. 하루를 기분 좋게 즐겁게 시작하여야 하는데...

세상에는 자기 뜻대로 모든 일이 되지 않는다고 큰 소리로 누군가를 보고 소리쳐대는 사람이 있었다. 이 좋은 날 아침에 왜 그리 인상들을 쓰고 사는가. 각박한 도시생활이 인심을 팍팍하게 만드는 것일 게다.

도봉산 매표소는 입장료를 받고 있었다. 국립공원이지만 관리를 더 잘 하기 위하여 입장료가 필요한 것인가. 대인 1,300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인가. 표를 파는 사람을 노인이 하면 어떨까, 너무 젊은 사람이 앉아 있으니 입장료를 받는 것하고 같이 어우러져 이상해 보였다.

12시 50분, 도봉산 입구. 자운봉 740 미터, 만장봉 718 미터. 선인봉 710 미터. 3키로 정도 산행. 먼저 김수영님의 시비가 우리를 맞이하였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왜 김수영님의 '풀'이 이곳 도봉산 초입에 서 있는가. 바람의 어려운 현실을 풀은 어떻게 현실적으로 저항하고 맞이해야 하는가. 도봉산에서 '풀'을 만난 것은 왠지 어색하였다.

오늘 나는 변덕을 부렸다. 나의 변덕이 죽 끓듯 한 것이다. 그동안 산이라면 청계산이라고 했던 것을 오늘 도봉산이 더 좋다고 바꾸었기 때문이었다.

자운봉 가는 오르막길은 내 온몸의 땀을 흠뻑 쏟아내게 하고 말았다.
자연산 돌길이 전혀 부담을 주지 않았다. 큰돌, 작은 돌, 중간치기 돌이 제멋대로 길을 만들고 있었으며, 내 발걸음 크기와 세기에 따라 돌의 머리를 밟거나 돌의 옆구리나 허리를 내딛거나 그건 자유였다. 때로는 바위 통째가 자연스러운 길이 되어 온갖 산행객들의 발길질을 견뎌내고 있었다. 어찌 자연스럽지 않은가. 온몸의 땀이 솟구쳐 나와 돌 위에 떨어지니 내 발걸음은 무겁지 않게 되었다.

매미가 이제 가냘프게 울어대고 있었다. 먼 길을 떠나면서 부르는 마지막 노래가 아니겠는가. 계곡물 소리가 청계산의 그것보다 길고 힘차다. 산이 더 깊으니 계곡도 더 깊을 것이고 물소리 또한 더 길고 힘찰 수밖에. 저 멀리 가까이서 어느 스님의 목탁소리가 계곡 물소리 위로 들려왔다. 이 세상 온갖 미움, 더러움, 그리고 시새움 버리고 그 자리에 사랑을 불러와 편안한 마음을 간직하라, 목탁소리는 계곡을 따라 흘렀다.

집사람은 내 마음을 아는지 더 좋아하였다. 다음에도 도봉산에 오자고 하였다. 나보다 항상 몇 걸음 앞을 가면서 즐거워 하니 내가 무엇을 더 바랄 것인가. 만장봉 가는 오르막 길은 어찌나 가파른지 산속에서 '스탶퍼' 운동을 하듯, 한걸음 한걸음 따박따박 걸어올라 가야 했다. 자운봉 정상에 도달하기 전 상당한 거리는 거의 유격훈련 수준, 네 발로 엉금엉금 기면서 바위 위에 땀을 흘려야 했다.

드디어 선인봉 정상, 710미터. 오후 2시 40분경. 사방의 전망이 확 트여 마음까지 확 트여 왔다. 가져온 디카로 기념사진을 몇 장 찍었다. 시원한 마음까지 찍혔을까. '자줏빛 구름을 타고, 만길 정상에 올라서, 신선같은 인간이 되었으니' 紫雲봉, 萬丈봉, 仙人봉이 모여 도봉산이 되었다네.

하산길은 오던 길로 가는 대신 우이암을 거쳐 우이동 길로 잡았다. 선인봉에서 내려와 점심을 먹고서 주봉능선길을 따라 내려가기로 하였다. 약밥, 갈비, 포도, 김치, 콩나물, 굴비, 사과 그리고 커피. 물통까지 모두 비우고 나니 오후 3시 반경.

능선길이며 하산길이라고 생각했다가 곧 마음을 다시 다잡아야 했다. 고작 몇 걸음 쉬운 평탄한 길이 나왔다싶으면 곧 이어서 보상이나 하려는 듯 가파르고 고약한 오르막길이 필연코 나타나 하산길의 안이한 즐거움을 빼앗아 가곤 하였다. 도봉산의 독특함이 이곳 능선길에도 있음을 꼭 알려달라는 듯 하였다. 능선길 좌우로 보이는 시원한 전경까지 더해지면 도봉산을 곧 다시 와야겠다고 다짐하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왼쪽으로 보이는 아파트의 큰 키만 없었다면 더 완전했을 터인데, 차라리 아파트가 보이므로 인간세상의 어쩔 수 없음까지 보태져 더더욱 좋아진 것인가.

해가 저물어가면서 주위가 더 산 속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이제 가을이 되었음을 실감하고 있는데, 발걸음은 더뎌지고 종아리도 무거워지기 시작하였다. 오른쪽 무릎이 한결 부담이 되었다. 집사람은 벌써 체력이 떨어진 듯, 능선길로 하산길을 잡은걸 후회하였다. 생각보다 더 많이 돌아가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2.5키로, 약 2시간을 더 걸어야했다. 그러나 이미 들어선걸 어찌 하겠는가. 가져온 물도 다 떨어져 갈증을 해결할 길도 막막하고 발걸음은 갈수록 더디고 무거워지고, 해는 떨어지고, 오늘 산행은 제대로 하고 있었다. 평소 청계산의 그것보다 얼추 곱절은 하고 있었다.

'산행을 좋아하시는 모양이지요. 입구에서 만났었지요. 이렇게 오랜시간 산을 타시니 대단하시네요' 한다.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이암에서 가파르게 떨어지고 한참을 내려오니 가까스로 원통사. 하산 길을 잘못 잡아 모든 것이 원통해서 이곳에 원통사를 지은 것이 아니고, 이성계도, 도선국사도, 무학대사도 이곳에서 마음을 다스렸다고 한다. 절대적 진리란 두루두루 통하지 않은 곳이 없다하여 원통사.
절대적 진리가 과연 있는 것인가. 이 세상에 변화하지 않은 절대적 진리가 있단 말인가.

원통사에서도 다시 2키로 여를 더 가야 우이동 매표소. 그 곳에서 다시 600여 미터를 더 가야 우이동. 오늘 산행은 왕창 잘 하고 있는 것이었다. 오른쪽 무릎이 제법 불편하다고 자꾸 소식을 주고 있었다.
나이가 오십이 넘었으니 무릎이 불편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인가. 그래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다. 내 나이 아직 청춘인데 벌써 무릎이 아프다고 하다니. 특히 산을 내려올 때 옛날 같지가 않다.

어디서 들려오는 종소리인가. 가느다랗게 들린다. 아마도 원통사에서 6시를 알리는 종소리일 것. 시각을 알리는 소리인데도 오늘 해가 지는 산 속에서 들으니 마음이 처연하게 내려앉는다. 인간의 여린 마음이라니. 댕에앵 댕에앵 댕에앵. 종소리는 가늘게 멀리 내 귀에 맴돌았다.

해가 떨어지는 무렵의 하산 길. 어둑어둑해지는 산길을 집사람과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또 언제 이렇게 둘이서 이런 시간에 산길을 걸어가겠는가. 어스름 달 밤 같은 조명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해가 넘어가고 나무들은 둘러싸여 있고, 주변 음식점들의 전등불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니, 알맞은 아름다운 조명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드디어 우이동 방향, 도봉산 입구에 도달하였다. 오후 6시 30분 경.
도봉산 역에 도착하여 물경 6시간 여. 오늘 산 속에서만 6시간을 보냈으니 도봉산의 정기는 몽땅 내 몸과 마음에 담겼다. 내일부터는 펄펄 날아다닐 것이다.

어디 가서 시원한 맥주 한 컵. 집사람은 지칠대로 지쳤지만 맥주 한 컵 마시면 금방 살아날 것 같은 모양이었다. ‘산에는 꽃이 피네’ 라는 음식점에서 피곤한 다리를 풀었다. 소월의 산유화가 왜 이곳에 피었는지, 음식점 이름과 어울릴 것 같지는 않은데, 꽃이 핀 음식점이라면 나쁠 것은 없잖은가. 맥주는 시원하였고, 해물파전은 늦었고 매웠다.

도선사 입구까지 내려오니 서울고등학교까지 가는 28-1번 버스가 보였다. 버스를 탈까 하다가 피곤한 집사람도 있고 가난한 택시기사들도 있을 것이어서 오늘 추석맞이 도봉산 산행의 마지막 즐거움을 택시타기로 마무리 하기로 하였다. 길음역이나 삼선교 부근 어디에도 버스도 많고 택시도 많고 사람도 많아 내가 탄 택시는 빨리 달리지 못하였다. 강북과 강남의 차이인가. 추석날에도 나는 엉뚱하게 강남과 강북은 왜 차이가 나야 하는지 혼자 질문하고 있었다. 남산 1호 터널을 빠져 나오니 내가 탄 택시는 거칠 것이 없다는 듯, 고속터미널까지 고속으로 달리더니 계속 잘 달렸다.

어느덧 우리집 오후 8시 10분. 집을 나선지 약 9시간만의 귀가인 셈이었다. 오늘 추석 잘 보냈다. 도봉산 산행은 좋았다. 청계산을 가는 것보다 가끔 도봉산이나 북한산을 가야겠다. 쉽고 편한 것은 언제나 그 값이 있고, 어렵고 힘든 것은 또한 그만한 값이 또 있는 것, 쉽고 편한 것보다 힘들지만 어려운 것을 해내면 얻게 되는 값은 우리에게 보석이 될 것이다.

나는 오늘 변덕을 부렸다. 도봉산이 청계산 보다 더 좋다고 내 마음을 바꾸었다.ⓒ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