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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덜 익은, 가을빛이 푸르게 쏟아진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7. 30. 16:54

사는이야기

2003.8.31.일. 8월의 마지막 일요일

청계산 옛골의 매미는 오늘따라 달리 우는가
8월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는가
가는 여름이 자신들의 처지와 같아, 가는 세월을 어찌하지 못하여서인가.
오늘따라 매미소리가 자꾸 내 귀에 밟힌다.

오늘도 집사람과 함께 산행을 하였다. 지난 일요일부터 따라나서더니 오늘도 별 저항 없이 당연한 것처럼 따라왔다.
"야, 저 토란 좀 봐요, 햇것이다."
"고구마순도 있고, 호박잎 그리고 밑둥이 노란 오이…"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고 있음을 알리는 전령사들.

청계산 옛골 굴다리부터 시작되는 길가 채소파는 아줌마들의 좌판에는
벌써 가을을 알리는 채소들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일 모레 곧 추석 아닌가.

옛골에서 매봉으로 치받아 올라가는 산길은 가파르지만 호젓하여 더 좋다. 내 귀에 밟히는 매미소리는 드디어 나의 옛 소년시절을 떠올린다. 8월이 끝나면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보리쌀 투성이의 쌀자루와 된장통 하나를 들고 도회지 자취방으로 향해야 한다.
그 때 어찌나 매미소리가 귀에 밟히는지.

시골고향을 떠나야 하는 나의 발길은 천근의 무게로 내 마음을 무겁게 하였다. 더운 도시의 밤은 모기가 극성을 부렸고, 어디 시원하게 목물이라도 할 수 있었는가. 무엇보다 걱정스러웠던 것은 점심 도시락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였다.

여름날의 도시락은 보리쌀이 많아 시커멓고 반찬은 된장에 멸치가 고작이라 내 딴에는 여간 ‘쪽팔리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때는 하숙을 할 수 있거나 집이 도시인 아이들이 어찌나 부러웠던지.

내 고향 매미는 그 때 그렇게 울었다. 방학이 끝나 광주로 가야하는 내 마음을 대신하여 표현했다. 오늘 옛골의 매미는 여름이 이제 그 끝에 와있으며 자신들도 이제 다음 삶의 자리로 움직여야함을 소리내어 알리고 있었다.

옛 생각을 더듬는 사이 어느덧 혈읍재 쪽과 하오고개 쪽의 갈림길이 나왔다. 집사람의 선택에 따라 혈읍재 쪽 길로 방향을 잡았다. 혈읍재까지는 2.7km.

혈읍재에서 내려오는 길도 좋지만, 올라가는 길 또한 편안하고 포근하였다. 죽죽빵빵 뻗어있는 나무들이 청계골이나 원터골의 것들보다 훨씬 멋있어 보였다. 어젯밤 내린 비로 계곡의 물이 신이 났는지 철철철 푸르게 소리내면서 왜 청계산(靑溪山)인지를 알리고 있었다.

나무들도 시원하게 푸르지,
흐르는 계곡의 물도 푸르게 흐르지,
그 사이에 있는 우리들 마음이야 어찌 푸르지 않고 견디겠는가.

오십이 넘었어도 아직도 싱겁기만 한 어느 부부가
늦여름 산 속 바위 하나를 잡아 쪼그리고 앉아서,
앳되고 붉으죽한 고구마를 껍질째 오물거리며 허기를 채우고
귤이 왜 이리 달콤한지 입맛을 다시면서 하나 더 까먹는다면
지나가는 산행객들이 부러워할까, ‘꼴좋다’ 할까

‘꼴좋은’ 꼴을 보고야 말았다. 그 부부는 싱겁지 않은 짝이었을 것이다. 남정네 하나가 웃통을 벗고 계곡물 위에 들이대고 엎어져 있고,
검정옷의 여인은 하얀 돼지살 위로 푸른 물을 껴붓고 있었다. 부러워해야 할까, ‘꼴좋다’ 해야 할까

오랜만에 매봉에서 원터골 쪽으로 하산길을 잡았다. 그동안 올라가는 길이건 내려가는 길이건 원터골하고는 사귀지 못 했는데 내려가는 길 이곳저곳이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시간의 흐름이 자연을 바꾸었는가, 시간의 흐름이 인간의 눈을 바꾸었는가, 말끔하게 정리된 길들이 좋긴 했지만 너무 사무적으로 정돈된 것 같아 마음은 덜 편안했다.

더군다나 내리막 길 계단은 힘 떨어지는 중년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았다. 보폭이 너무 커서 조심하며 내려와야 했기 때문이다.

오후 2시 경 청계산 입구는 가을 빛.
집사람은 아직 푸르기만 한 도토리 세 알을 '다람쥐 먹이함'에 넣는다. 어디서 주었을까. 한 알은 복학하여 힘들어 하는 큰 놈, 또 한 알은 군대간 작은 놈, 나머지 한 알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집사람은 소리없이 가을을 담아, 다람쥐에게 마음 속 소원을 보냈을 것이다. 이 가을빛처럼, 가을빛과 함께.

하산을 마친 산행객들은 조급할 필요가 없었다. 적당히 배고픈 뱃속은 여기저기 널려진 음식점들이 해결해줄 것이며 초가을 햇살은 기분 좋은 산행 후 피로를 알맞게 만져주고 있으니 귓가를 조금 늦춘들
일행 중 누군가가 귀찮게 장난을 치면서 놀려댄들 그것까지 가을빛처럼 기분 좋은 것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오늘 같은 날들이었으면, 욕심 같지 않은 욕심을 부려보았다.

무엇을 먹어도 좋을 것이지만 집사람은 산행 시작할 때부터 추어탕 이야기를 하였다. 버스를 타고 지나면서 길가에 추어탕집 간판이 있었다는 것. 크게 내키지는 않았지만, 초가을에 추어탕이면 계절과는 맞는 궁합. 추어탕 전문 음식점이길 바랄 뿐이었다.

청계산 근처의 멍멍탕 수준은 도심의 소문난 맛을 옮긴 게 아니라 값만 비싸게 옮겼음을 익히 알고 있다. 청계산 입구에서 좀 떨어진 큰 길 위쪽의 남원 추어탕은 깨끗하면서 맛이 깔끔하였다. 가을을 맞이하는 우리들에게 알맞은 선물이었다.

일요일 청계산 입구에서 하나로 마트까지 가는 도로는 굼벵이 길. 참지 못하는 굼벵이는 일요일 청계산에 오면 죽는다. 우리는 30여 분을 버스 속에 있다가 죽기 싫어서 중간에 뛰어내렸다. 우리가 내린 곳은 화원이었다. 순수 우리말로 ‘꽃밭’

버스를 버리고 걷기로 마음을 바꾼 것은 오늘의 탁월한 선택. 청계산 가기 전 꽃마을은 온통 가을이 왔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동안 여름 꽃들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엔 온갖 국화가 대신 들어앉아 있었다. 노랗고 하얗고 자줏빛까지, 활짝 핀 놈, 살짝 핀 놈, 꽉 머금은 놈까지.
꽃사과 열매가 앙증맞고, 배추모종을 옮기는 손길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가을빛이 함께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하나로 마트 가기 바로 전, 다리 하나가 서있었다. 원지교. 많이 맑아졌다고 말로만 듣던 양재천과 만날 줄이야. 혹 돌아다니는 물고기가 있을까 들여다보아도 물고기는 보이지 않고 대신 물에 흠뻑 젖어 생쥐가 된 개구쟁이 대여섯 놈들만 철푸덕 털푸덕 뛰어 다니고 있었다.

그래도 양재천은 귀찮은 기색없이 담담하였고, 오히려 물빛은 초가을을 담아 더 맑아 보였다.

"이게 무슨 냄새지? 맡아봐."
"너, 무슨 소릴 하고 있는 거야? 냄새는 무슨 냄새?"
"아니야, 이 냄새 모르겠어? 가을이야 가을, 가을 냄새."
어제 퇴근길 어느 라디오 음악방송에서 소개한 하교 길 여고생들의 대화가 생각났다.

가을이 오늘 퍼지고 있었다. 아직은 덜 익은, 푸른 가을이 쏟아지고 있었다.

옛골의 매미소리에서, 혈읍재 올라가는 계곡의 푸른 물소리에서, 하산 길 청계산 입구 다람쥐 먹이함에서, 굼벵이 길 옆 ‘꽃밭’에서,
개구쟁이들 뛰노는 양재천 물 위에서, 가난하기만 한 내 마음 속에서도.ⓒ 2007 Ohmy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