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7반 반창회 미팅
그때의 대학가에는 미팅은 언제나 상수였다. 특히 신입생에게는 미팅은 거의 절대적관심사였다.
갖가지 미팅이 있었다.
과미팅. 단과대학미팅. 동창회미팅. 하숙당미팅.향우회미팅등 별의별 미팅이 난무했다.
그중에 하나. 반창회미팅. 고등학교 같은 반 친구들끼리 모여서 미팅을 하는 것.
내가 고3때 반장이었으니 당연히 내게 반창회미팅을 어떻게든 주선하라는 압박이 은연중 들어왔다. 나의 성격상 그냥 모른체 넘어가기는 싫었다. 아르바이트자리를 구해야 해서 시간을 내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더 큰 문제는, 어디 여자친구가 있어야 여학생섭외를 하지 참 난감또난감한 일이었다.
궁즉통.
나와 초등학교동기생중 하나가 광주여고에 다녔는데 바로 숙명여대 국문과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광주여고에 다녔던 내 이종사촌여동생에게 들은바 있었다.
나는 일이 눈에 들어오면 그대로 직진. 옆길은 보지않고 바로 돌진하는 어떤 일에 관한한 돌쇠스타일.
숙명여대에 물어물어 그 당사자를 찾아내고 반창회미팅을 해야하는 이유를 설명하였고, 그녀의 전폭적인 협조로 우리는 야유회미팅을 하기로 하엿다.
남학생측은 광주일고 3-7반과 여학생측은 광주출신 숙명여대생.(광주여고출신이 많지않아 중앙여고출신 포함)
6월6일 현충일 공휴일에 남양주? 전곡? 어디로 야외미팅. 청량리 시외버스정류장에서 모여 출발하였다.
그런데, 여학생숫자가 남학생숫자보다 적게 되어 주선한 나는 파트너가 없게 되었다.
숫자가 부족하면 주선한 학생은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의 초등학교동기생은 다른친구의 파트너가 되었고 나중에 그 친구는 집요하게 나의 초등학교동기생을 따라다녔다.
결국은 성사되지못하고 깨어졌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헛웃음이 나오곤한다.
나에게 그녀와 사귀는지 저돌적으로 물어오고 내가 아무런 관계가 아니라고 하자 그럼 자기가 한번 사겨보겠다, 이해해주라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특별한 감정이 아직 생기지않은 상황이라 그녀에 대해서 무슨 특별한 뜻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밖에 없었지만, 조금 찝찝했던 것만은 사실.
최근 나는 다시 3.7반 반창회 모임을 하고 있다. 그때 반친구들의 성화에 못이겨 카톡방을 개설해서 이런저런 수다떨기를 하고 있다.
그때 반창회미팅을 기억하는 반친구들은 농반진반으로 나에게 다시한번 반창회미팅을 주선하라고 마구 을러댄다. 그때 찍은 사진들을 찾아내서는 히히덕거리며 다시한번 해보자고 한다. 장난삼아 나는 속으로 다시한번 해보까? 해본다.
그녀에게 한번 제안해볼까? 속창아리 없는 놈이라 할까? 한번 다시 모여볼까 말까? 한번 이야기는 꺼내보자뭐. 사는 게 뭐 별거인가?
그 여학생과 나는 지금도 초등학교동기생으로서 가끔 연락하고 차한잔정도 하는 사이로 지내고 있지만 그때 내가 더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때 나는 낯설고 물설은 서울땅에서 어떻게 하면 잠잘곳과 밥세끼먹을 수 있을까 전전긍긍하던 때. 여학생의 꽁무니따라 꿀맛 맛볼 처지가 아니었다.
거기에 더, 그때 나는 이성에 대한 어떤 특별한 감정이 하나도 없었다.
그때 그녀는 그런 내가...미팅주선한 파트너를 다른반친구에게 아무런 말없이 넘겨버리고 그후 특별한 에프터도 없이 무심코 넘겨버렸으니 정말로 무심한 나였었다.
절친 J는 그런 우리둘을 한번 묶어주려고 노력했지만 내가 수원으로 내려간 뒤로 서울과 수원의 물리적 거리는 더 우리둘사이를 더 가깝게 해주지못하고 세월은 흘러흘러 오늘날까지 왔다.
나의 운명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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