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수원. ‘상록사’, 수원여고3년 그룹제 과외.
서울에서 교양과정부를 마친 나는 서울대농대 캠퍼스가 있는 수원으로 왔다.
(서울대식품공학과를 지원할 때, 그 시대 ‘농대’의 사회적 위치가 어느정도인지 아니면 앞으로는 어떨 것인지 조금도 따져보지않고, 서울대농대가 수원에 있는지도 모르고 지원했으니, 이것이 운명이라니..,참 딱하기도 하고 참 엉뚱하기도 하지않은가?
운명은 그렇게 아주 어설프게도 우리앞으로 오는 것인가?)
수원에 왔다고 해서 나의 경제적 어려움이 바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숙소를 어떻게 해야할지 기숙사로 들어갈지 하숙을 해야할지 어찌할지를 몰랐다.
선배의 하숙집에서 한달여 하숙을 하고나서 그리 오래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내심 기숙사 ‘상록사’를 무척 들어가고싶었으니 기숙사비가 나에게는 만만치 않았고,
아르바이트를 하려면 수원시내에 하숙을 하는 것이 보다 나을 것같았다.
(보성남교 친구 정00의 도움으로 광주매일신문 보성주재기자가 쓴 ‘휴지통’ 덕분. 보성이 낳은 수재가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학업수행에 지장이 많다는 미담기사에 보성군수가 금일봉을 제공한 것.)
나는 수원여고 길목인 고등동에서 하숙집을 찾았다. 경기도청과 수원세무서가 가까워서 하숙집 구하기가 어렵지않았다. 특히 수원여고와도 가까워서 수원여고생의 과외지도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농대주변 하숙집보다는 물리적 거리가 매우 가깝고 특히나 그룹과외지도를 하기에는 나의 하숙집에서 하는 것이, 방문과외를 하는 것보다 상호간 매우 좋았다.
서울에서 하던 입주과외보다는, 나만의 자유시간을 더 가질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수원여고와 가깝기 때문에 방문과외보다는 과외받을 학생이 나의 하숙집으로 오면, 그들도 좋도 나에게는 더 좋을 것이었다.
나는 과외비 수입이 훨씬 좋은 그룹제 과외를 하기로 하였다. 그룹제과외에서 한발 더나아가 누구나 싫어하는 ‘고3’과외를 하기로 하였다. 고교교과과정 특히 수학.영어과목은 눈감고도 가르칠 수 있는 기본실력이 갖춰진 나로서는 모두 꺼리는 ‘고3’과외를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수입이 더 많고 또 상대적으로 ‘고3’과외학생은 수요보다 공급이 훨 부족한 편.
거기에 수원에서는 ‘식품공학과’의 프레미엄이 존재하고 있었다. 서울에서는 ‘농대디스카운트’ 때문에 식품공학과의 인기는 묻혀있었지만, 수원에서는 식품공학과의 인기는 독보적이었다.
(일반세상사람들이란 것이 소문에 약하고 메스컴에 길들여져 있어서, ‘식품공학과’가 차지하는 위치가 단연 으뜸이었다. 농대에서는 제일 카트라인이 높기도 하였지만, 공대인기학과와도 맞먹는 커트라인때문인지 하여튼 나는 수원에서 과외를 얻고자할 때 전혀 어려움을 느끼지않았다. 서울에서처럼....)
내가 선택한 하숙집은 고등동에 있었고, 그곳에는 나와 같은 생각으로 수원여고생들 과외를 하기위해 몇몇 선배들이 이미 하숙을 하고있엇다.
그중 일고선배가 한분 있엇고 그 선배에게 과외를 하던 오산출신 여학생(나는 그녀를 오부자댁 셋째딸이라고 놀려불렀고 그녀는 나중에 그 선배와 결혼하였다.)의 도움으로 그룹과외학생 모으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않앗다.
나는 본격적인 그룹과외를 하기위하여 하숙집에서 독방을 얻었다. 학생들은 당연히 2인1실이었지만 비록 비용이 비쌌지만 독방을 쓰기로 하였다.
(희미한 기억으로는 그때 나의 독방비는 9천원, 2인1실은 6-7천원? 그룹과외비는 15천원? 5인기준, 1인당 3천원?....
15천원을 받으면 독방하숙비 9천원을 부담하고 용돈등 생활비 쓰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식품공학과 출신이 선생님이라서인지 금방 5명이 모였다.
한달이 지났을까 아니면 두달?
실력이 좋다고 소문이 났을까 얼마 지나지않아 한팀 더 해달고 하였다.
나야 돈은 부족하고 시간은 남으니 한그룹 더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다. 새벽반으로 하여 한팀을 더하기로 하였다. (몇 달 가지않아 곧 그만두게 되었다. 새벽반은 학생들에게 무리. 몇사람이 떨어져나가니 계속할 수가 없었다.)
나의 고3그룹제과외는 순탄하기만 해서, 기숙사 ‘상록사’생활은 해보지못해 못내 아쉽기는 하지만, 서울에서는 힘들었지만 수원에서는 나의 일상생활에는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수원의 과외는 3번 또는 4번하는 서울과는 달리 1주일에 5번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과외 때문에 서울에서는 서울대방송반과 축구대표선수활동을 포기해야 했는데, 수원에서는 하고싶었던 ‘상록사’ 기숙사 생활과 서둔야학교사 활동을 하지 못한 것이 사는 동안 내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나는 이때 또하나, 열중했던 것이 흥사단 아카데미, ‘농대기러기’활동이었다.
주5회 과외시간은, 기러기집회가 있는 매주 화요일은 과외를 하지않고, 토.일중 하루만 휴강할 정도였다.
고3그룹제 과외 그리고 써클활동 ‘농대기러기’는 나의 학창시절 빼놓을 수 없는 양대축이었다. 학내 써클활동에 따른 농대운동권활동과 식품공학과 학회장역할(3년때)이 있긴 하엿지만, 하숙비를 벌어야하는 과외지도와 농대기러기활동은 예외를 인정하지않았다. 절대적이었다.
나는 또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그때 수원에서도 과외를 하지않고도 하숙비문제가 해결되었다면, 야학교사도 하고 또 기숙사생활도 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나의 운명은 달라졌을까? 만일 과외를 하지않아도 되었다면, 학내써클활동하면서 운동권의 중심축이었으므로 필시 데모주동에 깊이 관여하지않았을까? 그러나, 과외가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었으므로, 과외시간만큼은 어느 것도 침해할 수 없었다. 써클대표모임이 있어도 아무리 중요한 집회가 있어도 나의 과외시간만큼은 언터쳐불.
데모에 보다 적극적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요즈음 정치권의 비슷한 학번들의 활동을 얼핏 보면서 일어나지않는 만약의 상상을 해본다.
인생이란, 운명이란 무엇인가?
수원여고3년 여학생들과의 그룹 과외는 그들이 졸업하고 끝이 났다.
(그 뒤 수원북문 수원시내버스사장집 과외, 서울여의도 과외가 있었고, 수원비행장 공군대령집과외가 있었고, 남문의 양식그릴집 과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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