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서중.일고 시절(1964-1970)

흥광아 아카데미, 도산 안창호선생의 흥사단활동.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8. 28. 15:12

흥광아 아카데미, 도산 안창호선생의 흥사단활동.

일고2년생때

보성남교 절친 J는 나에게 흥사단 광주학생아카데미 활동을 권유하였다.

정의돈수하며 무실.역행.충의.용감의 4대정신으로 일제 강점기때 흥사단처럼 우리민족의 앞날을 위하여 모범학생들이 솔선하여 몸과 마음을 닦아야한다는 것이었다.

1학년때 옆짝꿍으로부터 독서반활동을 해보지않겠느냐 제안을 받았으나 미적거리다 하지못했는데, 써클활동을 하나 하는 것이 좋지않을까 싶던 차, 나는 두말않고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이미 1년때부터 매우 열성적으로 흥광아활동을 하고 있었다. 보통 1학년부터 가입하여 2년부터 본격적 활동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일고아카데미는 1년차 가입생들이 대거 탈회하여 그 빈자리를 보충하는 형편이 되었다. 나를 포함하여 상.상.원 등 3명이 거의 같은 시기에 입회하게 되었다.

신입회원의 입회절차는 매우 진지하였으며 간단하지 않았다. 입회문답절차는 까다로웠다.

흥사단정신의 이해정도를 묻는 입회문답은 흥광아아카데미라는 단체가 그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달여 준비기간을 거쳐 정식으로 신입회원이 되었다.

월례회라 일컫는 정기모임이 있엇는데, 광주시 전체 남녀 대학생과 고등학생의 연합회 모임이 한달에 한번 있었다.

외부유명인사의 초청강연등이 가끔 이루어져서, 일상적 학교수업과는 다른 경험할 기회가 되었으며, 특이한 것은 집회가 끝나면 모든 회원들이 한데 모여 인사를 나누는 행사였다. 윤회악수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흥사단 특유의 회원상호친목을 도모하는 것으로 내게는 매우 신기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젊은학생들 남녀가 악수하면서 인사를 나누는 것이 사뭇 내성적이던 나에게는 처음에는 익숙하지않아 매우 쑥스럽기만 하였으나 분위기상 모두가 어떤 일체감으로 하다보니 또한편으로는 은근히 매력적이기도 하였다.

(학교수업외에는 별반 친구들 사귀는 기회가 없던 나는 처음 대하는 사람과는 어색하고 수줍을까지 있었는데 맨처음 여학생들과 윤회악수 할때는 눈을 어디다 두어야 좋을지 쩔쩔매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조기수련회.노래부르기등 모든 행사에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공부만 잘하는 왕모범생외에는 특별히 잘하는 것이 없던 보성촌놈이 새로운 세계에 또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이었다. 입주가정교사를 하면서 광주상류사회의 분위기를 조금 이해하고나서, 더 넓은 세계와의 또다른 만남이었다.

3학년이 되고나서는 흥광아활동은 중단되었지만 그래도 1년동안 보고겪은 일들이 나의 성장동력이 되주었고 좋은방향을 안내해주었다.

대학입학시험을 준비하던 3학년후학기 말쯤, 갑자기 들이닥친 원인모를 순간적 방황때 흥사단정신에 회의에 빠지기도 하였지만, 대학진학후 수원에서 다시 흥사단기러기활동을 하면서 내 대학시절의 황금기를 흥사단정신과 함께 보내게 되었다.

또 만약에,

만약에 J가 흥광아활동을 제안하지 않았다면? 만약 내가 흥사단 학생아카데미를 고2때 알지못하고 그 활동을 하지않았다면, 나의 성장과정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그 젊은 학창시절,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여 누구를 만나고 무슨 환경속에 빠져있었느냐에 따라, 그릇이 달라진다고 하는데...흥사단이라는 틀속에 내가 맞혀질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나의 안목을 넓히는 기회가 되기도 했갰지만 또 한편으로는 흥사단틀속에 나를 가두는 제약이 되기도 하엿을 것이니, 내 개인의 발전을 위해서 약이 되기도 하고 독이 되기도 하엿을 것이다.

나의 운명이 정해져있던가?

나의 의지는 얼마나 내 운명의 길목에서 작용하였는가?

 

---------------------------서울농대기러기로~~~

물론, 고3때 잠깐 느꼈던 흥사단정신에 대한 회의감이 다시 일면서 한동안 오랫동안 회의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지만 내 대학생활의 많은부분 흥사단기러기가 없이는 성립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너무 열심히 활동하다보니 흥사단정신이란 것이 우리사회의 현실적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모순적이며 큰한계점이 있다고 판단하여 나는 깊이 회의하게 되었다. 교조적으로 개인의 창의와 자율을 저해한다고 판단되어, 내 개인의 자유로운 정신활동이 나도모르게 제한받고 있다는 생각에 깊은 회의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서울농대 기러기활동은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