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서중.일고 시절(1964-1970)

고1때 나의 번호는 6번.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8. 28. 15:08

고1때 나의 번호는 6번.

중3때는 19번이었는데, 고1때 6번이 되었다.

(키순서로 번호를 정했는데 서로 뒷번호를 받으려고 꼿발을 서기도 하기도 하였ㄴㄴ데 난 별로 신경을쓰지않은 탓도 잇었지만 앞번호인 6번은 조금 의외였다. 자취하면서 제대로 먹지못한 탓에 성장이 멈춘 이유도 일부 있었을 것.)

나는 맨 앞줄에 앉아서 수업을 받았다. 쉬는 시간에 뒷줄 덩치큰 녀석들이 화장실등에 가면서 내자리를 지나가게 되는데, 몇몇 녀석들은 꼭 내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친해지려고 장난치려고 그러는 거겠지 하며 참고 넘어갔다.

그런대 한녀석이 지날때마다 내머리를 만지고 다녀서 한번은 그렇게하지말 것을 모두가 들을 수있을 정도의 큰소리로 다시는 그런 행위를 하지말 것을 요구하였다.

귀여워서? 잘 생겨서 친근감이 들어 그렇게 하였는데 마음을 다쳤다면 사과한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않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5번인 내짝꿍이 있었는데 서중출신이 아닌 S중 출신이었는데 평소 공부를 어찌나 열심히 하는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어느 날은 코피까지 흘리는 것을 보았다.

S중에서는 1,2등을 다퉜겠지만 일고에 와서는 내노라하는 우수학생들이 너무나 많으니 그들을 따라잡으려고 그렇게 쉬지않고 열심히 하였다.

그러나 막상 시험을 보면 모르는 문제가 많은지 감당이 잘 되지않은 모양이었다.

차츰 그는 내게 노골적으로 내 답안지를 보여줄 것을 요청하였다. 들어줄 수도 없고 아니할 수도 없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지경이었는데 순진하기만한 나의 처방은 반노골적 컨닝방조였다. 보든지 말든지 그가 기술적으로 보면 보이는 정도까지 나는 내 답안을 열어주면서 시험을 보았다.

그는 아무리 노력해도 좋은성적을 내지못하자 도중에는 불량써클에 가입하여 더욱 학업에는 멀어지게 되었고 재수를 하고서도 결국 일류대학 진학의 꿈은 접어야햇다.

마지못해 선택한 것은, 전학년 장학금을 주면서 일류고 출신들을 모집햇던 해양대학이었고 그는 거기서 훌륭히 적응하여 졸업후 해양산업발전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지금은 그가 대표하는 해운회사를 말하면 누구나 알 정도로 선박산업의 중추적 역할을 하고 있다.

내가 재벌대기업상사를 그만 두려고 고민할때는 그는 두말없이 자기회사의 사무실을 내줄터이니 걱정하지말고 내사업을 꾸려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나같은 먹물모범생류의 사고방식과는 다른, 상당히 통이컸다.

그를 보면 언제나 떠오르는 생각은, 사회생활은 공부만 잘해서는 큰일을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 현상에서는 기업환경에서는 교과서에 나오는 식의 한정된 경우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별별 경우수들이 천변만화 수없이 생기므로, 수학공식적인 어떤 짜여진 틀속에서만 해결되는 일이란 애초 존재하지않는 것.

모범생다운 답안만 찾아서는 해결되지않고 수시로 변화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어야 사회생활을 잘 영위하는 것이고 특히나 기업활동에서는 주변환경을 잘 활용하면서 이끌어가야 하는 것.

만약, 그가 공부만 잘하고 일류대학을 갔다면 지금 그가 하고있는 기업활동을 훌륭히 잘 할 수 있을까? 학문과 기업활동은 전혀 다른 분야여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내주변의 답답한 모범생들을 생각하면서 ‘만약’을 생각해보았다.2018.8.15.치앙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