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7반대표 축구선수 ‘막둥이’
국민학교(그때는 초등학교를 그렇게 불렀다.) 시절, 보성에서는 읍면대항 축구시합이 열성적이었다. 각 초등학교마다 신체 우수한 학생들을 선발하여 집체훈련을 시키면서 군내축구시합에 좋은 성적을 내고싶어했다.
나도 속으로는 축구선수가 되고싶어하였고 마침 축구코치선생님이 학교대표선수로 뛰어 줄 것을 요청해와 반승락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어찌 알았는지 어머니와 작은형이 극구 반대하고 나섰다. 축구선수를 하게되면 공부에 소홀하게 되는 것은 물론이고 또 운동하다 친구들과 휩쓸리다보면 깡패가 되기 쉽다는 지레짐작으로 적극 말리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축구대표선수를 포기해야했다. 실제 그때 축구선수로 뛰던 친구들중 몇몇은 광주학교로 진학하여서는 사립학교교내 불량써클에서 활동하다가 일부는 서울로 진출하였고 그중 한친구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조폭이 되었다. 그때 만일 내가 축구선수생활을 계속하였다면 과연 어찌되엇을까? 조폭까지는 아니되었다해도 불량학생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과연 선택의 길목에서 나의 운명은 어느쪽으로 나있었던 것일까? 누가 알것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알 수 없는 일임에 틀림없지않은가?
보성시골집에서 학교까지 거의 1시간 거리를 등하교하면서 신작로에서 탱자몰기등 놀이로 단련된 내 주력과 기술을 쓰일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서중1년때 기회가 찾아왓다. 학교에서 반대항 축구시합을 한다는 것이었고 남다른 주력과 볼다루는 능력이 뛰어났던 나는 당연히 반대표가 되었다.
자취를 하기 때문에 축구선수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키가 크지않다고(19번) 광주출신아이들이 나를 뺐으면 하였다. 광주아이들끼리 친한놈들끼리 하고싶어했지만 주력이 좋은 나를 제외시키는 것은 쉽지않았다. 결국 나는 반대표가 되었고 그중 키가 제일 작았던 탓에 누군가(김정현?) 내이름 ‘박동희’와 비슷한 ‘막둥이’로 불리게 되었다. 내가 볼을 잡고 드리볼할라치면 응원석에서는 ‘막둥이’ 막둥이 하면서 소리질러 주었다.
그 연유로 지금도 서주일고동창들은 나를 ‘막둥이’로 부른다. 속을 깊이 모르는 동창들은 내가 우리집의 막둥이이기 때문에 ‘막둥이’로 불리는 줄 알지만 실은 서중1때 반대항 축구시합 때문에 불려진 이름이다.
(좀 아쉬운 것은 나를 아는 누구도 심지어 우리가족들도 내가 주력이 남달리 빠르고 남들보다 오래 달린다 하면 믿으려하지않는다. 설마설마..내가 지어낸 이야기 하는 것처럼 제대로 내 이야기를 들으려하지않아서 속이 상한다. 내가 군대생활할때도 대대선수로 뛰었다고 하면 모두들 믿지않으려 한다. 주력이 좋고 오래 달려서 그 어려운 공수낙하훈련을 받았다고 하면 전혀 믿으려하지않는다. 괜히 속상한다.)
반대항 축구시합 덕분에 나는 어찌되었든 보성시골촌놈에서 일약 유명인사가 되어 후학기 반장선거에서 최고득표를 하여 반장에 당선되었다.(그당시 반장선거는 성적이 좋은 학생중에서 5등까지? 선거를 하여 최고득표를 얻은 자가 반장이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노릇인지 우리반 선생님 (1-7반, 김흥남선생님, 미술담당)은 나를 반장임명하지않고 부반장으로 임명하였다. 반장은 광주출신을 임명하였다...지금도 왜 그리했는지 모르겠다. 기성복교복을 입고다니는 시골촌놈출신이라서/?
그때 나도 모르는 광주학부형들의 보이지않는, 내가 알지못하는 소위 로비가 있었을까? 내가 반장이 되지못하고 부반장노릇한 것이 오늘날 나라는 존재를 만드는데 어떤 영향이 있었을까? 나의 상상력은 한번 빠지면 거침없어지는 건 오늘도 마찬가지다호호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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