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독서노트 다시읽기

옛독서노트 다시읽기옛독서노트 다시읽기; '생각의 좌표'/홍세화의 에세이(9)=항체; '실존은 본질을 앞선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25. 6. 8. 21:53

-항체;

나의 존재에 대한 고민과 의문은 충격적인 진실과의 갑작스런 만남으로 시작되었다.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뿐 갑자기 만난 그 진실은 가치관의 붕괴와 방황을 예정하고 있었다.

모든 것들을 박탈하고갈아엎는 혼란은 ‘전쟁 속 나의 가족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다.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참혹함은 모든 인간을 발가벗겼다. 전쟁은 비굴하고 추악한 동물적 생존 본능에 충실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쳤다.

살남은 사람들은 이제 분단으 비극적 상황 속에;서, 또 한번 살아남기 위해 간악하거나 간사해져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짐승이 되어야 했고 미쳐가야 했던 그 시간 속에 내 가족이 있었고 내가 있었다. 나는 인간을 알기전에 증오를 배웠다.

가치관의 완전한 붕괴.

더 이상 존엄하지 않은 인간과, 진보라고 장담할 수 없는 역사의 진행 앞에서 아연실색했다. 인간들이 냉혹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이제껏 딛고 있었던 바닥이 갑자기 푹 꺼져버린 듯 했다.

두려움과 혼란으로 갈 곳 없는 곳으로 나는 도망쳣다. 되도록 이 땅에서 먼 곳, 이 땅과 인연이 없다고 믿어지는 곳이어야 햇다.

애국이 무엇인지 알 수 없던 때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며 가슴 뭉클해했다. 선열들의 나라를 위한 희생이 강조되는 수업이 있던 날은 더욱 그랫다. 어린 가슴을 울컥하게 하고 잠깐이나마 어린 눈에 힘을 주게 했던 애국이었고 국가였다.

그러나, 우리의 보호자이어야 할 국가가 국민을 유기하고 이간질시켜 서로 욕보이게 하고 마구잡이로 짓밟앗다.

내 안에 있던 인간과 국가가 부서졌다. 졸지에 고아가 된 것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어린 고아였다. 우선 내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했다. 나는 누구이며, 왜 이곳에 잇는가. 왜 하필 여기인가.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다음 문제였다.

더 이상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이지 않앗다. 절박햇다. 살아지거나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살고 싶어서였다. 어려웠다. 어렵다기보다 누구도 답을 갖고 있지 않은 문제였다. 나는 끝없이 서성였다.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샤르트르.

나, 곧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존재이유를,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서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실재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의의이며 이유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은 인간 존재의 이유와 의의를 부정하는 것이고 훼손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고유한 영역을 보존하면서 존재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 반인간적인 것. 비인간적이게ㅐ 하는 것들과 싸우고 저항하는 실천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자에게 있어 휴머니즘은 필요조건이며 동시에 권리이다.

이것이 내가 자 자신을 그 무엇보다 우선 휴머니스트라고 부르는 이유이며, 내가 기계적 이데올로기 논쟁과 후유증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던 근본 이유다.

딱히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사회에서 휴머니즘은 왠지 낭만적인 센티멘탈리스트나 심지어 프티 부르조아의 유약하고 따뜻한 마음 정도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휴머니즘의 탄생이 중세의 종교라는 성채에 대한 저항에서 비롯되었다는 단순한 사실만 가지고도 그것이 얼마나 강건하고 적극적인 힘을 갖고 있는지 짐작핧 수 있다.

이 사회에서 휴머니즘에 대한 왜곡된 이해는 자유애 대한 왜곡된 이해와 쌍벽을 이룬다.

실존적 고민은 비로소 이 땅의 배반과 증오, 그리고 절망의 역사 속 인간을 사랑하게 했다. 자기연민에서 벗어나 나를 사랑할 수 있게 했다.

이땅은 나에게 실존적 고민의 한가운데서 선택한 시지프스의 바위였다.

우리를 둘러싼 사회상황은 마치 고릴라가 사람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하여 잘만 하면 사람을 낳을 수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얼토당토 않은 부조리의연속이었다.

나는 지금도 ‘믿어만 주면 사람을 낳을 수 ldT다’고 주장하는 고릴라들에게 놀아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이 위험하고 부질없기 짝이 없는 기대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우리들으 l 피페한 현실이다. 너무 오랫동안 우리들 곁에 달라붙어 있더 절망, 좌절 그리고 생존의 욕망이 만들어낸 엽기적 판타지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결과만을 중시하는 풍조는 성과에 대한 조급성과 일에 대한 전문성과 지적.논리적 취약함을 은페하려는 의도와 맞물려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풍조가 자리잡은 데 기여한 것은 도덕적 결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떳떳하게 잘 먹고 잘 사는 이들이다.

칠흑같은 어둠 속 느닷없는 총부리에 놀라 밥 한그릇 펴준 것은 부역죄가 되어 온갖 고초를 겪게 되지만, 독립이 물 건너가기를 바라듯 일제에 붙어먹던 자들은 주인을 바꿔가며 배를 불리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 부도덕한 사회의 도덕적 인간에게 남는 건 낭패감과 박탈감 뿐이다. 정신적 공황을 피할 nt 없었고 올바른 생활은 개그가 되었다. 차차 부도덕한 사회의 비도덕적인 개인들이 되었고 고릴라가 들어설 자리는 더욱 확장되었다.

생존을 삶의 기본조건으로 한다는 점에서라면 생존을 위한 동물적 본능은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치 인간적 삶을 위한 충분조건인 양 생존을 위한 동물적 본능이 강조되는 것을 내 정서는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인간은 언제나 생존의 굴레 앞에서 굴종을 강요하는 상황에 절망하고 분노했다. 그리고 인간적 삶을 되살리기 위한 지난한 저항의 시기를 가져야했다.

자유와 평화. 사랑과 예술도 삶의 필수조건일 뿐, 인간에[게0 충분조건이란 없다.

세월은 역시 약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젊은 날에 품었던 의식과 이념은 세월과 함께 그 빛이 바랬다. 그 빛바램이 오히려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그 세월은 또한 자유.민주.인간의 자리에 토익점수.학점.취업준비가 들어앉도록 했다.

심각하게 살 필요가 없다고 한다. 진지하게 살 이유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세속적으로 남보다 잘 사는 확률은 언제나 마찬가지인데 온 사회가 호들갑을 떨며 무한경쟁의 전쟁터로 내달린다. 음악ㅇ 심취하고 문학을 예기하고 철학에 몰두하면서도 가질 수 있었던 확률이 그 모든 것을 다 버리고야 가질 수 있는 확률로 되었다. 이상한 현상이다. 모두를 위해 모두가 노력하자는 것도 아니고, 작은 수를 조금이라도 늘려 확률을 높이자는 것도 아닌, 확률은 그대로 둔 채 모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전력질주하는 것이다.

우리를 불안케하는 구체적 요인은 교육.의료.주거.실업.노후 문제다. 실제로 이를 위한 사회안전망이 갖춰지지 않는 한, 우리느 평생을 ‘떨어지지 않길 바라며 외나무다리를 건너듯’ 살아햐 한다. 우리 사회의 소득 100만원과 유럽사회의 소득 100만원은 그 가치가 다르다.

힘을 모아 크고 안전한 다리를 놓으려 하지않고 외나무다리에 연연해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공익적 가치가 실종되고 사회적 연대의식이 싹틀 수 없는 사회는 ‘나 먼저 살고 보자’ ‘내 것은 무조건 지키고 보자’는 이전투구의 풍토를 만들어냈다.

애석한 것은 ‘나만 안 떨어지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이 이 위태롭고 협소한 외나무다리에 매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이 위기감으로 사람들은 더욱 악착스레 매달린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야 한다. 우리으 것과 내 것을 함께 지키고 기름진 생존을 넘어 인간적 삶을 되찾기 위해.

나의 20대. 무엇을 위해 살았느냐고 묻는다면 ‘나 자시늘 위해 살았다’고 말할 것이다. 20대의 젊음은 분출하는 욕망과 삶을 향한 벅찬 기대, 그리고 낭만적 사랑에 대한 예감을 떠올리게 한다. 우리 세대는 억압된 욕망과 자유 그리고 인간과 삶에 대한 회의의 시작을 의미했다. 대신ㅇ0 우리에겐 자유와 민주의 복원에 대한 열정과 인간의 존엄성 회복에의 열망이 있었다.

인간에 대한 본원적 질문과 고민을 주저없이 할 수 있게 한 것 또한 젊음이었다. 엄혹한 상황이 주는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도 차라리 낭만을 찾을 수 이께 하는 능청스러움이 젊은 패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난하지만 생활에 대한 구체적 압박감이나 의무감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시기라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충실하게 젊음을 향유했다고 말할 수 ldT다. 출발선에 선 내게 주어졌던 삶의 얼개가 아무리 형편없었다고 한들 결코 주저앉지 않게 한 것 역시 젊음과 무관하지 앟다. 나에게 젊음, 그것은 저항이라는 단어와 항상 함께 한다. 애당초 ‘사는 게 다 그렇지 별거겠어’ ‘둥글둥글 살아야지’하는 기성세대들의 서글픈 비책에 나는 죽는 날까지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자아실현에 있지 기름진 생존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역사를 자유에 대한 극심한 왜곡과 핍박에 정항한 역사라고도 할 nt 있을 만큼 자유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절실하고 절박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젊은이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이 사회를 지배하늠 물신에 저항할 수 있는 인간성의 항체를 기르라는 것이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만 우리 사회의 인간성은 너무 오염되었다. 물신은 밀물처럼 일상적으로 그대를 압박해올 것이며, 그대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물질의 크기로 비교당할 것이다. 그것에 늠름하게 맞설 수 있으려면 일상적 성찰이 담보한 탄탄한 가치관이 요구된다.

그리고 자기성숙의 모색을 게을리 하지 말라.자아실현을 휘한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다.

그리고, 성찰이성의 성숙단계가 낮은 사회에서 그대는 자칫 의식이 깨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인간에 대한 연민에 앞서 오만함으로 무장하기 쉽다. 만약, 그대가 진정한 자유인이 되려고 한다면 죽는 순간까지 자기성숙의 긴장을 놓지 않아야한다.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모두 쉬운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삶은 단 한 번박에 오지 않는다. 그 소중한 삶을 어떻게 꾸릴 것인가? 자유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물신의 품에 안주할 것인가?/2012.5.15.화.노트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