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독서노트 다시읽기

옛독서노트 다시읽기; '생각의 좌표'/홍세화의 에세이(8)='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

햄릿.데미안.조르바 2025. 6. 2. 20:04

3.긴장의 항체

-쓸쓸함;

사람은 전망이 보이지 않을때 절망한다.

사람은 처지에 따라 변한다고 하지만, 정서는 처지가 빠뀌어도 변하지 않은가 보다.

나는 어린 학생들이 장래희망으로 ‘CEO'를 꼽을 때 더 쓸쓸함을 느낀다.

‘너는 왜 그렇게 사니?’라고 말없이 묻는 동창생의 시선에 ‘너는 왜 그렇게 사냐?’라고 똑같이 말없이 대꾸하기 전에 먼저 슬쓸함을 느낀다.

역사의 진보를 일컬어 힘없는 정의가 힘을 얻어가는 과정이라고 했는데, 그 길은 답답하고 인타깝고 험난하다.

반나치투쟁하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프리모 레비;‘괴물이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위험한 존재가 되기에는 그 수가 너무 적다. 그보다 더 위험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인 인간들 말이다’

광주항쟁은 ‘민주화운동’으로 기념되고 학살 책임자들은 사면되었다. 학살책임자들이 참회하지도 않았고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용서와 화해가 주장되었다.

나로선 그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가 없었고, 힘이 약한 정의가 힘을 키워가며 강한 불의의 힘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스스로 주저앉으며 그럴듯한 수사를 붙인 것으로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그 비겁한 합리화 과정에서 영악하게 정치적.경제적 이권을 챙긴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그래서 억압과 불의에 저항한 시민들을 ‘폭도’라고 부르고 사실을 왜곡하여 보도앴던 신문들도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오늘 광주사람들까지도 그 신문들을 잘 보고 있고, 합천에는 일해공원이 들어섰다. 나는 시민의 휴식공간에 버젓이 학살자의 이름을 사용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도대체 이 쓸슬함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람시;‘이성으로 비관하더라도 의지로 낙관하라’라는 말을 품고 살아도 사라지지 않는, 이 사회에 대한 비관적 전망에서 오는 것일까?

어느 곳에선 돈이 아직 사람을 덜 규정하고 사람들을 덜 이간질하며 덜 오염시킨다.

‘지겨운 천국’보다 ‘즐거운 지옥’이 더 낫다?

한국에서 즐거우려면 일단 돈이 많아야 한다?

우리 사회 대부분은 백인들에게는 받는 것 없이 배려하고 호의를 베풀기도 하지만, 자국민들 사이엔 주는 것 없이 좀처럼 배려나 호의를 베풀지 않는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가 공중파를 통해 거리낌없이 토해지고 있는 사회?

자본주의 생활방식의 특징은 제로섬 게임에 있다. 내가 승리하려면 너는 패배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필연적으로 황페화하는 것은 이러한 성질 때문이다.

인간성의 발현은 이 제로섬게임과 정반대의 성질을 갖는다. 사랑이 그렇듯이 하염없이 주고 또 주어도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성의 발현은 베풀수록 스스로 충만해지고 베풀지 않을때 오히려 그 샘이 마른다.

‘교양이 밥 먹여 주니?’라고 대드는 듯한 사회,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대신 몰상식이 막무가내로 관철되며, 생존하려면 스스로 뻔뻔해지든지 뻔뻔함에 굴종하라고 강요하는 사회,....

‘여기건 거기건 살아있잖소’

-자화상;

사람은 본디 다른 사람을 속일 수 있을지언정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는 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까지 적당히 속이면서 살아간다.

지금 사람들은 물질의 급속한 팽창과 가치관의 변화와 붕괴로 온갖 허상의 욕망과 이미지들 속에서 부유하고 있다.

약육강식.승자독신의 논리가 이처럼 위풍당당하게 큰 소리를 내며 굳건히 자리매김을 한 예를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지난 시절, 세상의 끝일 것만 같은 광란의 역사를 만든것도 인간이었지만,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 것도 인간이었다. 어느 때곤 그들은 소수에 불과했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오늘 이만큼이라도 덜 비인간적인 사회에 살 수 있는 것은 그들 덕분이다.

그들은 항상 소수파였다.

완벽한 승리는 애당초 기대밖의 일이었고 안타깝고 답답할 정도의 작은 진전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더 인간적인 사회’로 가기 위한 채찍질에 있다기보다 ‘더 비인간적인 사회’로 가려는 강력한 힘에 안간힘으로 맞서는 데 있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희생도 무릅쓰면서 어렵게 싸워왔는데 여기까지밖에 오지 못했나?’라고 말하기보다는 ‘그래도 그들 덕분에 이나마 올 수 있었다’라고 말해야 한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

남보다 많이 소유함을로써 만족해하려는 인간의 저급한 속성을 겨냥한 그런 광고에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거부감이나 위화감을 느기지 않는다. 그런 광고를 일상적으로 보면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질 것인지에 대한 문제제기조차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이 사회의 물신주의는 강력하며 공격적이다.

소비능력이 없거나 부족한 사람들은 박탈감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고 아예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쪽방촌에 사는 사람에게 ‘당신이 사는 곳이...’라는 말은, 그 자체로 저급한 폭력이며 야만이다. 물질적 소유에 대한 선망에 빠져 인간성이 훼손된 것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사막에서 신기루를 좇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지만, 물질만을 좇는 것은 인간성의 왜곡과 황폐활를 뜻한다.

사람에게는 이기적 선택을 하게하는 동물적 본능이 있다. 존재 또는 처지가 의식을 규정하는 일차적 이유다.

그러나 지배세력은 제도교육과 대중매체를 이용하여 사회구성원들에게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을 갖도록 꾀한다. 그래야 원활한 지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잡아 시실처럼 되어버린 ‘거짓’들이 많이 잇다.

‘너 빨갱이지?’‘너 전라도 사람이지?’

‘무지한 소신주의자’를 양산한다./2012.5.9.노트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