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장날이라 하더니
‘울릉도 트래킹 여행상품이 나왔던데......, 이번에도 가지 않으면 나 혼자라도 갈 거얏’
반 협박성 일방통보였다.
‘그럼, 7월 10일 전후해서 좋은 날을 잡아 봐-아-o’
난 허약한 숫컷이었다.
우리집 ‘그냥’씨의 협박이 이번에는 예사롭지 않기도 하였지만, 마침 예정되어 있던 입찰이 연기되어서, 여행을 가기로 결정을 하고 나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가벼웠다.
여름만 되면 겪어야 하는 숙제를 미리 풀었다는 홀가분함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강요된 상황이 때로는 뜻하지 않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어떤 기대감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느 때 같으면 사무실을 비워두고 어디 한가하게 여행을 가다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 언제 입찰이 뜰지, 언제 해외고객들이 날 찾을지 모르는데 내가 자리를 뜬다는 것은 그들에 대한, 일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울릉도,
뱃길이 어떤 것일까,
바다의 한 가운데,
고독하면서, 고고하면서, 약하면서 강하면서,
뭔가 새로운 것과 만나는 기쁨이 있을 것,
언젠가 한 번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7월 8일부터 2박 3일.
울릉도 맞춤단체여행을 우리집 그냥씨는 내 말이 떨어진 그 다음날로 예약해 버렸다.
언제 내 마음이 바뀔지 모르는 일, 우선 못을 쳐놓고 볼 일이었을 것이다.
자의반 타의반 울릉도 여행이 태어난 줄거리.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가는 날이 장날이라 하더니
태풍 ‘민들레’님께서 훼방을 부리신다.
내가 때아닌, 평소와 달리 이른 여름휴가를 간다하니 하늘이 가만히 있을 소냐?
푸닥거리라도 해야지
아니면 무슨 초라도 쳐야지
맹숭맹숭 그냥 지나치면 안되지,
민들레는 그녀의 존재를 알려왔다.
당연히 그냥씨는 예약을 취소하고 다음 어느 좋을 날을 기다렸어야 했다.
그런데, 연일 아무리 방송이 태풍의 피해를 강조하고 주말까지 비가 내릴 것 같다 해도
우리집 그냥씨는 확고부동, 비가 내려도 ‘나혼자라도 울릉도 간다’
‘여행사에 알아 봤는데, 비가 억수로 왔어도 오늘 팀은 예정대로 떠났대요’
중간보고까지 한다.
은근히 ‘민들레’양의 위력에 겁을 드시고 예약취소를 기대했던 나는 조용히 있어야 했다.
말을 거들어서 손해만 볼 것이 뻔하고, 3일 고생하고 나머지 360일 편하게 지키는 길이 있는데,
주절주절 떠들어서, 매를 벌어서 무삼하리오?
여자가 독하다는 것은, 어느 때 그 느낌이 있지 않던가?
‘혼자라도 이번에는 울릉도 트래킹을 가고 말 거야’ 할 때, 나는 허약한 남자가 되고 말았다.
요즈음 매스컴의 소위 ‘웰빙’ 바람이 큰 몫을 하며 여자들을, 우리집 그냥씨를 그냥 집에만 두지 못하게 바람을 넣지 않았던가?
주말만 되면 아침신문은 ‘느림과 비움’의 주제로 내 마음 속까지 ‘바람’을 불어넣었으니까.....
자연으로 가라, 채우지만 말고 비워라, 빨리만 가지 말고 느리게 더 느리게 살아라, 앞만 보지말고 뒤도 보고 옆도 보면서 천천히 둘러보면서 살아라, 하지 않았던가.
5학년이 되고나서 부쩍 ‘이렇게만 살 것이 아니라, 저렇게도 살면 더 좋겠다’ 싶은 것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우울증은,
뭔가 갑갑하고 답답하고 허전하기만 한 것이,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5학년 여성들에게만 있는 것인가?
그동안 무엇을 했는지, 모두 손해만 본 것만 같은 것이,
누구의 장난에 따라 나의 젊음을 몽땅 잃어버린 것이 아닌지,
앞으로 무엇을 해야,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울컥 치밀어 오르는 속끓음을 소리없이 앓는 것,
일밖에 모르다가 일이 갑자기 없어져버린 우리 5학년 남학생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또, 일을 하지 않으면 어딘가 불안하고, 회사에 나가지 않으면 괜히 불편하기만 한 것은,
나만이 아닌, 우리시대 5학년 남성들이면 공통될 것이다.
그동안 너무 많이 먹어 쓸데없이 비만된 것들은 이제 조금씩 버리고,
그동안 너무 잊고 살았던, 잃어버렸던 것들은 조금씩 찾아서 채우면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익숙했던 습관적 일들을 버린다고 조금 불안해도 조금 불편해도,
그냥 새로운 습관으로 익숙해지는 훈련을 지금부터, 더 늦기 전에 해야되는 것이 아닐까?
가는 날이 장날이어도,
자의반 타의반 울릉도 여행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내블로그; 자연.자유.자존, 2004.7.8, 울릉도 여행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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