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상사가 ‘입찰담합’을 끈질기게 요구하였으나, 나는 꿈쩍도 하지않았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어느 특정상사는 농유공의 참깨입찰이 뜨면, 나의 분당집에 까지 찾아와서 Huyton의 협조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까놓고 말해서, ‘입찰정보’를 달라는 것이었다.
(농유공 입찰이 뜨면, Huyton의 Mr.Philip은 그날로 비행기를 타고 서울로 날아와서, 나와 매일 입찰정보를 주고받았다. 주로 힐튼호텔의 스위트룸에 묵으면서, 나와는 Executive Floor의 미팅룸에서 하루종일 함께 있었다. 밤늦게 분당집으로 돌아오면 그때까지 모상사의 직원들이 진을 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만큼 그때 정부참깨입찰은 뜨거웠고, 물량이 커서 여러상사들이 적극적으로 입찰참여를 하고있었다.)
(그 상사는 퇴직농유공직원까지 간접고용하여, 농유공 내부의 입찰움직임을 조직적으로 관리하고 있었으며, 모든 수단방법을 모두 동원하여 정부참깨입찰사업을 공격적으로 전개하고 있었다..그 상사는 자금력과 해외지사망을 활용하여, 수단업체와 FOB로 계약하고, 홍콩등 해외현지법인으로 하여금 신용장을 개설하기 때문에, 낙찰이 되지않으면 수단현지에서 FOB로 구매한 참깨 처분이 어려워지므로, ‘낙찰’되는 것이 무엇보다 지상명령이 되었으니, 죽기살기로 나를 통하여 Huyton의 Position을 알려고하는 것이었다.)
내가 누구인가? 학창시절부터 모두가 컨닝을 하여도 차라리 백지답안지를 내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할 정도로 ‘원칙주의자’였고, 특히 금호실업.해태상사 시절부터, 무슨 압력이 들어와도, 내가 생각하는 것과, 상식에 어긋나면, 누구한테도 나의 뜻을 꺾지않고, 어떤 불이익이라도 감수하고, 내뜻대로 내생각대로 학교를 다녔고 또 그렇게 회사업무를 해왔지않은가?
더군다나, 정부의 입찰비즈니스인데, 내가 그들과 야합을 하면서까지 사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때로는 어떤때는 그들의 움직임도 입찰정보이므로, 전혀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매우 제한적으로, Huyton의 입장에 크게 문제가 되지않는 선에서, 입찰질서에 크게 문제가 되는 않은 경우는, 간접적으로 Huyton의 입장을 넌지시 흘려주었다. 예를 들어서, 입찰 Position이 여럿인데, Huyton이 전Position을 참여할 수 없는 경우는, Huyton이 들어가는 Position에 대하여 암시를 해주면, 그들은 이를 피하여 응찰하게하는 ‘협조’는 해주었다.
무작정 그들의 요청을 모두 무시할 수는 없었다. 어느때는 때로는 그들의 협조가 필요할때도 있으므로 적당히 그들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비즈니스였다. ‘공존공생’?)
(나의 이러한 대원칙은 참깨입찰비즈니스 하는 내내 철칙처럼 지켜졌다. 훗날, 또 결과론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일부 상사들이 또는 고추등 특정품목에 대하여, ‘입찰담합’을 하여, 관계기관의 수사를 받게되고, 형사사건으로 비화되었다. 잘 나가던 몇몇 종합상사 부장들이 졸지에 ‘험한꼴’을 당하곤 하였다. 아무리 국내시장상인들이 유혹해도, 몇몇 상사들이 끈질기게 ‘담합’을 요구해도, 뻣뻣하게 버텼던 ‘대평원’이 결국은 살아남은 것 아닌가.
Mr.Park은 너무 원칙적이고 답답하고 현실을 모른다는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은 ‘내가 옳았다’였다.)
(‘정부입찰비즈니스’를 하던, 해태상사때부터 직원들에게 줄곧 주장하던 바가 하나 있다. 시장상인들이니 경쟁업체 직원들과는 절대로 ‘봉투’를 받지말 것, 그리고 쏘주는 하되 절대로 ‘여자있는 술집’에 가지 말 것을 나는 신신당부하였다. 그 결과가 어찌되는지는 내가 상사생활하면서 수없이 많이 보아왔기때문이었다. 어린 직원들은 그결과를 보지않았으니, 혈기에 또는 인간적인 정으로 접근하는 ‘마수’를 뿌리치기가 쉽지않기때문이었다.)
반대로, 내가 그들의 요구대로 ‘담합’을 하였다면, ‘대평원’은 어떻게 되엇을까?
더 사업이 번창하여 더 큰돈을 벌었을까? 아니면, 다른 일부상사들처럼 검찰에 끌려가서 패가망신당하였을까?
내가 ‘가지않은 길’이 어떻게 열려있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내가 하고싶은대로, 나의 원칙대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것 아닐까? 돈을 더벌고 아니벌고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지않을까?
그것이 내가 타고난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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