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공방기

독수공방기(2)/고개들어 관악을 보라

햄릿.데미안.조르바 2005. 8. 17. 02:02

妻城子獄 탈출, 독수공방 시작 5일째,
홀로 도시탈출하여 어디론가 훌훌 사라져도 좋을, 전무후무할 황금시간을 내일모레 입찰이 ‘나 여기 또 왔소, 혹시나 하였는데 역시나 방해해야 맞는 것이었다.
오늘은 일요일, 毒獸는 어디로?

나에게는 새벽같은 시각, 일요일 아침 9시, 벌써 사당동쪽 관악산 입구.
하루종일 산에서 있어도, 집에 일찍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게 된 일요일.
굳이 짧은 청계산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 관악을 보라 하였으니 오늘은 관악으로 가자!
청계산과는 달리 사당동쪽 연주암가는 관악은 땡볕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나
오늘은 '나 잡아 먹으슈'하듯 쉬엄쉬엄, 하루종일이라도 가기로 하면 그 길도 왕도가 될 것

오랜만의 관악산,
아침부터 푹푹 찐다. 벌써 땀이 비오듯, 숨이 턱턱 막힌다.
사당쪽 매표소가 보이지 않는다. 늘 그곳에서 얌체처럼 돈을 내라던 곳이 보이지 않으니 괜히 기분이 좋다. 공짜라니, 돈을 내지 않아도 되니, 아무리 적은 돈이라도 기분이 좋으니 나도 별수가 없다.

처음 생각대로, 무조건 쉬었다. 그럴듯한 그늘만 나와도, 분명한 쉼터는 물론 쉼터 비슷한 곳에서도 무조건 쉬고 무조건 물을 마셔댔다. 더워서 땀이 나고, 힘드니 또 땀이 나고, 물을 마셔대니 또 땀이 쏟아지니 바로 땀의 제국이었다.
금새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고 옷들이 몽땅 물을 들이마신 듯 땀범벅이 되었다.
누군가 옷을 짜면 푸른물이 주르륵 쏟아질 것 같은 푸르름이라더니, 오늘은 그런 싯적인 일은 못되고 옷을 짜면 땀물이 줄줄 흐를 것이었다.

곳곳마다, 쉴 만한 곳에는 어김없이 더위에 지친 날 유혹하는 것들이 있었다.
좀처럼 넘어가지 않던 나도 오늘은 확실히 헤퍼지기로 다짐해두었다.
쉬엄쉬엄 가기로 한 마당에 참으면 무엇하며 이것저것 따지고 들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초코렛 '자유시간'으로 듬뿍 자유를 마음 속으로, 그 다음은 가정집 식혜를 들이마시고는 가정집의 안온함을, 또 다음은 팥 아이스께끼를 핥으면서 옛시절로 돌아가 보기도 하였다. 또, 약수터마다 물도 마셔댔으니, 내 배가 오늘은 주인님께서 무슨 일 났는지 의아해했을 것이었다.
깍쟁이 놈이 오늘은 돈을 팍팍 마구마구 물쓰듯 했다는 것, 오래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연주대에서는 막걸리 한사발까지 게걸스레 마셨다. 비주류의 백주 홍인면이라 참고 참기만 하였지 좀처럼 마시지 않던 산행이었는데 오늘은 헤퍼지기로 한 것, 그깟 얼굴이 붉어지면 어떠하며 또 가다가 넘어지기라도 한들 어떠하리, 벌컥벌컥 마시고 꼴딱꼴딱 들이켰더니, 사는 것이, 행복이란 것이, 자유란 것이, 즐거움이란 것이 뭐 별거냐 하면서 빈 뱃속으로 술술 넘어가는 것이었다. 마늘쫑도 양파도 멸치도 시큼한 김치까지도, 이십수년만의 처성자옥 탈출, 독수공방 시작을 축하해 주는 소품이 되었다.

그렇게 쉬엄쉬엄 별 짓을 다하고 왔는데도 12시 반쯤, 그러니깐 3시간여, 몸과 마음을 다스리고 다지기에는 마치 좋은 시간의 양 아닌가 싶었다.
연주대 넓은 바위, 비스듬히 누워있는 바위 위에는 모두들 자유, 자유 그것이었다.
손을 꼭잡은 젊은 연인들이나 다소곳한 만년의 부부들이나, 병아리들을 달고온 초년부부들이나 얼마나 평화로운가, 얼마나 보기 좋은가.

저 멀리 도시 아파트들이 오늘은 늘씬하게 잘빠져 보여 확 트인 시야를 더 넓혀주고 있었다. 저 시멘트더미 속에서, 저 아스팔트 길바닥 위에서 오늘 하루만이라도 탈출하여, 땀 흘려 산 위에 올라왔으니, 우리는 이제 만세 만만세일세, 속으로 정리하고 있을 것이었다.
산은 시야가 있어야 좋은 것이구나 싶었다. 관악의 등성이를 오르면서, 이곳 연주대 바위 위에서, 청계산과는 또다른 시야가 있었다.

'이 음식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무엇을 하였는지 돌이켜 보아라. 욕심부려 많이 채우려 하지 말라. 하나도 남김없이 먹고 또 깨끗이 씻으라.'
연주암의 점심공양은 속세를 떠나있었다.

'수레가 망가지면 더 이상 가지 못한다. 몸이 늙어지면 더 이상 낚지 못한다. 그런데도 누워서 헛된 고집을 부리고 낚기를 게을리하는구나.'
막커피를 마시면서 외워본 구절이 가물가물 제대로 옮겨지질 않는다.
하나를 들으면 곧 둘이 되어 머리 속에 자리잡던 시절이 있었던데, 지금은 새기고 새겨서 머리에 집어넣어도 이렇게 잡히지 않으니, 이것이 또 자연일 것, 너무 속상해 하지 말 것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