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글로벌(주)에서(1995-1996)

동양글로벌에서 5; 어느 날, 우리 사업본부만 6층(?)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날 ‘동양’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2. 17. 15:09

/동양글로벌에서 5; 어느 날, 우리 사업본부만 6층(?)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날 ‘동양’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동양글로벌’에 근무 시작한 것이, 1995년 5월 15일(?)

맨 바닥위에 주춧돌을 박고 새건물을 세우고, 경력사원 채용등 내부 살림살이를 어느 정도, ‘상사전쟁’을 치를 수 있는 수준정도까지, 어느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외출하고 돌아오니, 나의 사무실이 본래 있었던 곳(15층?)이 아닌, 6층(?)으로 옮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아니, 무슨 큰일이 일어났다 해도, ‘이사’의 사무실, ‘본부장’의 사무실을 옮기는 데도 당사자인 ‘본부장’이 아무런 내용도 모르게 ‘도둑이사’를 해야하는 무슨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정말로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아무도 내게 설명을 해주지않았다. 아마도, 아니 틀림없이 그 ‘유실장’(유실장은, 연세대 식품공학전공, ((나와는 식품공학전공이 같네요..)) 삼성물산 전략기획실 차장출신으로, 동양글로벌의 ‘부장’직급이면서 ‘기획.경영본부장’역할을 하고있었다.)의 짓일 것이었다.

 

‘동양글로벌’이 신설법인이다 보니, 외부로부터 ‘경력사원’들을 채용해야하다보니, 기존의 사무실 공간으로는 태부족인 것은 사실이었다.

거의 날마다 사무실 조정하느라, 시끌시끌하였었다.

짐작컨대, 결국에는 ‘사업본부’ 하나가 층을 옮겨야 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모양이었다.

 

신설 동양글로벌에는, 관리총무본부, 시멘트사업본부, 중공업기계사업본부, 화학사업본부, 건설사업본부, 그리고 농산.식품사업본부, 기획경영본부등이 있었다.

(동양글로벌은, 창설때부터 여의도의 동양증권빌딩에서 시작하였다. 인원이 늘어나니, 동양증권빌딩의 사무실 여유공간이 있는 층으로 ‘확장’해야하는데, 사무실 형편상 ‘동양글로벌’의 본부와는 좀 떨어진 ‘6층’을 추가로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것)

 

7개 사업본부중 사업본부 하나가 옮겨야 하는데, 나의 ‘농산.식품사업본부’가 옮기는 것이 최선이라는 결론이었다는 것.

회사 형편상, ‘농산.식품사업본부’가 옮겨야 한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지만, 왜 사전에, 본부장인 나에게 일언반구 아무런 이야기도 하지않고 실행해버렸느냐에, 나의 관심은 집중되었다.

 

지난번, 사료곡물사업담당을 해태상사에서 스카우트하려고 했을 때도,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효성물산출신을 채용하더니(유실장의 편견.잘못판단으로는, 사료곡물담당까지 해태상사에서 데려오면, 박이사의 독주.전횡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인가, 이를 우려했다면, 채사장은 왜 나를 ‘사업본부장’으로 뽑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채사장은 유실장을 잘못 신뢰하고 있었지 않을까?),

이번에는 사무실 옮기는 문제를 나와 전혀 의논하지 않고 집행해버리는 것을 보고는, ‘채오병사장체제’에 대하여 나는 실망 또 실망하고 말았다.

이러한 일들(경력사원 채용문제. 6층으로 이사하는 문제등)에 채오병사장의 의중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이(경력사원 채용이나 6층 이사문제) 채사장의 지시였다해도 아니 유실장 개인의 독단으로 이루어진 일이라 해도, 그것은 나에게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유실장은 채오병 사장이 삼성물산 전무시절, 가까이 챙겼던 삼성 전략기획실의 요원이었다.)

채사장의 인품으로 보아, 나에 대한 대접을 그렇게 일방적으로 처리하지 않았을 것, 유실장이 사전에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 쳐버리고, 단독으로 밀어부쳐버린 것이었다해도 문제였다. 그만큼 채사장.유실장의 사고판단기준은 이미 정상적인 ‘기업운영체계’를 무시해버리는 것이기때문이었다.

(이사한 6층은, 본부가 있는 곳과는 전혀 딴 세상이었다. 사무실 곳곳이 허름하기도 하고, 분위기가 어둑컴컴하였다. 나의 사무실 또한 사면이 꽉 막혀있어서, 두 면이 훤히 트여서 한강과 여의도가 보이던, 최적의 전망이 아니라, 좁은 공간에 간신히 책상하나가 들어가는, ‘속좁은’ 곳이었다. 어찌 ‘속좁은’놈인 내가 또 ‘속좁은’공간에서 생활해야 한단 말인가? ‘속좁은’놈은 ‘속넓은 ’곳에서 생활하면서 ‘속좁은’마음을 ‘속넓게’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못하게 하니 이를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요? 사소한 것에서 나의 ‘운명’이 나를 다른 ‘운명’으로 이끌고 있었다.)

 

그날, 6층으로 이사한 날, 나는 전직원들과 저녁회식을 하였다. 직원들 또한 갑작스런 사무실 이사로 마음이 무거웠으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않은 채 저녁식사는 거의 하지 않은 채, 술만 홀짝홀짝 마시고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나는 ‘동양글로벌’에 들어와서, 오늘까지, 지난 시간들을 하나하나 되돌려보았다.

숨쉴사이 없이 달려온 시간들이었다. 무슨 결론을 낼만한, 무슨 평가를 할 것도 없는, 매우 짦은 시간이었고, 무작정 달려오기만 한 시간들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니구나 싶었다. 내가 ‘동양글로벌’에서 이런 대접받으려고, 해태상사에서 ‘본부장’ 보임을 뿌리치고 ‘동양글로벌’에 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싶었다.

해태상사에서 잘 나가던 시간들이, 왜 내가 해태상사를 떠났는지, 그래도 해태상사에서는 ‘박수석’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들어주었는데, 이곳 ‘동양글로벌’에서는 ‘박이사’말은 들어도 보지않고, 유실장 원하는대로 해치우다니, 말이 되지 않았다. 도저히 그냥 지나쳐서는 안된다고 판단하였다.

때를 봐서, 채오병사장에게 다시는 이러한 일들이 재발되지 않도록 해주든지(유실장을 바꿔주든지), 또는 이런저런 구차한 말 필요없이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듯이’ 내가 ‘동양글로벌’을 떠나야한다고 생각하였다.

(감정적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 아니라, ‘동양글로벌’을 떠난다면, 이제는 다시 ‘월급쟁이’는 할 수 없다 생각해야하고, 그렇다면 내가 완전히 독립하여 ‘나의 회사’를 꾸려가야 할 것이니,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미리미리 준비해두어야 한다고 다짐하였다.)

 

나도 모르는 사이,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직원들은 내 사무실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몰랐다. 저녁식사때도 아무런 말없이 밥과 술만 드시더니, 본부장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서는, 꿈쩍도 하지않고 있으니, 모두들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더 이상 내가 내 사무실에 오래 머물고 있을 수 없었다.

흐르는 눈물을 가까스로 수습하고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나는 그날, ‘결정’하였다. ‘동양글로벌’에 오래 머문다는 것에 큰의미를 두지 않기로 하였다. 신설하는 ‘동양글로벌’에 ‘임원’의 한사람으로 합류하면서도, 한 3년정도 열심히 해보면서 ‘나의 세계’ 구축이 어려우면 곧 ‘그만두고’는 바로 ‘내 회사’를 차리겠다는 생각을 하였었다. 이제는 3년이 아니라, ‘1년’만하고, ‘독립선언’을 하기로 하였다.)

(그날 이후, ‘6층’사무실 이사를 한날 이후부터, 나의 해외공급자들과 나의 ‘독립선언’에 대한 그들의 생각을 들어보기 시작하였다. 태국의 Chaiyoung group, Nanapan group, 인도네시아의 Dharmala group, 홍콩의 Wide Source, 영국의 Huyton Group 등과, 하나하나 의견을 들어보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적극적으로 도와주겠다 하였지만, 그들의 말만을 믿고 ‘독립선언’을 바로 결행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였다. 누군가 ‘실세’일때는 누구나 ‘도와주겠다’하다가도 막상 ‘실제 자리’에서 떠났을때도 똑같이 도와주겠다고 변함없이 약속을 지켜주는 사람들은 나는 주위에서 보지못하였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100% 믿고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들의 입치례는 정말 립써비스, 참고사항일뿐, 나는 시간을 두고 하나하나 준비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