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글로벌에서 4; ‘대왕대비마마’에게 인사를 가야했다.
한국의 재벌가들이 어떻게 행세하는지의 일면을 잠깐 소개하고 넘어가자.
임원이 되면, 특히 첫‘이사’가 되면, 재벌가에서는 가장 높으신 어르신께 ‘인사’하는 절차가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5월 15일, 동양글로벌에 첫 출근하였으니, 두달여 지났을 어느 날, 동양그룹의 회장실에서 연락이 왔다.
모일 몇시에, 부부 동반하여 동양그룹의 최고어르신인 ‘사모님’께 인사를 올리러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동양그룹의 창업자인 이양구회장은 돌아가셨고, 그의 미망인이 아직 살아있어서 동양그룹의 실세였다. 이양구회장은 딸 둘을 두었는데, 큰딸은 현직검사였던 현재현과 혼인시켜서, 동양시멘트.동양증권등을 총괄하게 하였으며, 둘째딸은 타이완출신인 담철곤과 혼인시켜서 오리온제과등 식품사업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러니까, 외부에서는 형식적으로 현재현회장이 동양그룹을 대표하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아직 이양구회장의 미망인이 실세라면 실세였다.
그 실세에게 초임 ‘이사’인 나에게 소위 ‘충성맹세’같은 것을 하라는 것 아니었겠는가?
사실 나는 그때, 재벌가의 ‘실세’가 무엇이며, 동양그룹의 실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동양그룹의 최고 어르신이라하니, 부부동반하여 인사드리러 가야한다고 하니, 하나의 절차적인 일로서 받아들이고, 성북동(?)인가로 인사를 갔던 것이다.
다른 이사부부(최대0이사, 화학사업본부)와 함께 였다.
어떻게 인사를 했는지 전혀 기억은 없고, 다만, 매우 더운날이었고 우리집사람은 한복차림을 해야했는데, 어찌나 더웠던지 그리고 마음은 어찌나 무거웠던지, ‘인사’를 드려야 ‘이사’가 된다면, ‘이사’가 되고싶지 않을 정도로 ‘더운날’이었다.
(지금 기억나는 것은, 그날 매우 후덥지근한 날씨, 땀이 온몸에 줄줄 흘렀을 정도로 더운 날씨였고, 분위기 또한 편하지 않아서 우리부부는 한층 더위을 더 느껴야 했다.)
다행히, 함께 인사갔던 최이사가 말주변이 무척 좋아서, 이런 분위기를 마땅치않아하는 우리부부의 고충을 모두 덜어주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다시 ‘대왕비비’마마께 ‘충성맹세’같은 인사를 간다면, 참 잘할 것 같다.
알맞게 립써비스할 정도로, 내가 이제 세상살아가는 법을 좀 배웠고, 배짱도 좀 더 늘었고, 특히 ‘뻔뻔하게’ 얼굴을 내미는 기술도 좀 배웠기 때문이다.
그날, 우리는 꽃바구니 하나와 과일 바구니 하나를 들고 갔는데, 이는 우리부부가 준비한 것이 아니고, 동양그룹 회장실에서 미리 준비해두었던 것을 우리부부손으로 들고갔을 뿐이었다.
다른 그룹은 어찌하는지 모르겠지만, ‘첫임원’의 동양그룹 최고어르신에 대한 ‘신고’절차는 이렇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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