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내가 얻은 것은...‘업무능력의 급상승’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백지보증수표’ 한 장.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1. 12. 19:34

/내가 얻은 것은...‘업무능력의 급상승’ 그리고 아무도 모르는 ‘백지보증수표’ 한 장.

 

인도산 대두박 10건 계약(약 2천만불수준?)은 예상치못한 ‘해상운임폭등’-축협 5건 ‘계약보증금 몰수’-M.V.메헤딘티 ‘가압류’-한국사료협회의 ‘Unpaid'

 

사건과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고 또 일어났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하나를 풀어놓으면 또 다른 문제가 나오고, 그 문제를 풀어놓으면 또 새로운 문제가 나오니...대마는 대마답게 문제도 많고 사연도 많다더니..대두박 10건 계약에, 한 10년동안 할 일을 몇 달안으로 처리하는 듯하였다.

마지막 문제를 풀어나갈 때, 바이어와 공급자의 ‘상호불신’으로, 나의 절묘한 제안으로 ‘해태상사’가 그 완충지대를 맡기로 하였는데도...또 ‘문제’가 생겼지않은가?

'한국‘을 믿지못하겠더는 Huyton에게, 내가 ‘사직서’를 담보로 하여, 한국사료협회의 돈을 받고 또 동시에 Huyton의 돈을 받기로 하였으니, 그 외의 어떤 ‘불신’도 할 필요가 없고 지금은 다만 ‘상호신뢰’만이 필요할 뿐이라고 신신당부하여, 내 계좌로의 송금조건은 철회하였다. 그래도, 큰놈들과의 싸움이라 무척 힘들었지만, 그래도 Huyton이 Mr.Park은 믿어서 내 계좌로 송금하겠다하니 힘들에 일한 보람이 있구나싶었다.)

 

거의 1년여에 걸친 격렬한 싸움, 대장정이었다. 최초로 인도산대두박을 공급한다는 것이, 계약할 때만 ‘영광’이었지, 남는 것은 ‘상처뿐인 영광’으로 끝나게 되었다.

상처뿐인 영광이었지만, 그래도 따져보면, 나에게는 크게 남는 장사였다 싶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업무를 보는 시야가 엄청 크게 트이고 넓게 보게 되었다.

여러 이해관계당사자들을 만나게 되니, 자연스럽게 나의 안목이 깊고 넓게 만들어진 것.

그 위에, 외국인과의 대화에도 자신이 붙은 것. 영어가 한계단 늘어서 하고싶은 내용을 모두 자연스럽게 전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또하나, 내가 귀하게 얻은 것은, Huyton이라는 무쇠팔 인도산 대두박공급업자를 확실히 얻어냈다는 것. 건당 수백만불의 계약이니 계약이행보증금 ‘몰수금액’만도 수십만불에 상당할 터인데도, 인정사정없는 ‘국제상전’에서 수십만불의 손해를 감수하고도 계약이행을 위해 끝까지 할 수 있는 데까지 계약이행을 하다니, 기특하기도 하고 존경스러웠다.

Huyton의 Mr.Philippas는 무엇을 얻었을까?

한국사료곡물시장에서의 Huyton에 대한 ‘신뢰’? 첫계약부터 계약불이행으로 Black-listed 되는 ‘불명예’를 벗어나려고? 그래서 얻는 것이 무엇인데?...내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않는 Huyton의 계산법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니, Mr.Philippas=필립(나는 그를 ‘필립’이라 그는 나를 ‘Dong'이라 서로 편하게 부른다.)은, 아마도 ’박동희‘를 얻지 않았을까?

한번도 내색을 하지않아서 그의 속마음은 알수 없지만...한달여동안, 대두박계약-축협물량 불이행선언-사료협회물량 선적이행중 ‘가압류’‘unpaid''나의 사직서 보증’등을 거치면서, 나의 진면목을 있는 그대로 몸소 겪었을 것.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마치 자기 일처럼 처리하는 우직함.성실함을 보지 않았을까?

일본종합상사 어느 부장도 나처럼 일해주지 않았을 것. 오히려, 공급자의 약점을 잡아 뒷돈을 챙기기도 하는데 한국의 해태 어느 ‘누구’는 삥땅치는 법을 아예 모르는지, 한번도 그 비슷한 요구를 한적이 없지않은가?

(===내가 ‘동양글로벌’을 갑자기 그만두고, 내회사 ‘대평원농상주식회사’를 창업할 때, 자진해서 ‘대평원’의 해외공급자가 되겠다 하였던 것이, 대평원은 소규모 오파상에 불과하니, 대신 대기업인 대우나 엘지상사를 에이젼트로 지정하는 것이 좋다해도,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대평원’만이 Huyton의 에이전트 자격이 있다고 우겨댔던 것이, 바로 이 첫 인도산대두박 계약으로 비롯된 길고긴 지루한 싸움에서 얻은 ‘교훈’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때 못받은 ‘빚’을 드디어 내게서 받게되었다 판단했기때문이었을까?)

(보이지 않는 운명의 신은 이때에도 나에게 ‘대두박시련’을 주고,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눈여겨 보고 있었고, 그 일부의 대답은 훗날, 내가 ‘대평원’을 창업할 때 Huyton의 그를 통해 ‘대답’을 한 것 아닐까?)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끝까지 내 스스로의 힘으로, 발로 뛰면서 해결하였다. 마침 그때, 한국사료협회 부회장(실무총책임자)은 문철0 현대사료회장이었다.

(한국사료협회회장은 농림부장관의 추천을 받은, 농림부차관급 퇴직공무원으로 실권이 없었다.)

나의 서울대농대 10여년 선배이자, 그의 아들이 ‘간염’으로 취직이 힘들자 그를 우리 농산부에 자리를 만들어 주었던 인연까지 있었으니, 한번쯤 그 부회장에게, 한국사료협회의 부당한 ‘Unpaid'에 대하여 ’철회‘를 요청할까 하다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쩐지 아들취직을 빌미로 그에게 심적 부담을 준다는 것이 나의 자존심을 건들였다.

그의 불같은 성격과 화끈한 일처리가 한국사료협회내에서는 정평이 나있었고, 그의 말이라면 회원사 거의 모두가 따랐다.

더군다나, ‘Unpaid'가 국제상거래 관행상 매우 부당하게 처리된 것이니, 그의 특별한 요청이 있다면 곧 ’철회‘할 수도 있었다.

내 밑의 부하직원의 아버지가 아닌, 단순한 한국사료협회 부회장이었다면, 공적으로는‘Unpaid'가 국제규정상 부당한 것이니 ’철회‘하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였을 것이고, 또 사적으로는, 내가 ’도와달라‘고 쳐들어갔을 것인데, 내가 그의 아들을 취직시켜줬기 때문에 ’도와달라‘고 쳐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를 보고, 직원들은 내가 너무 ’고지식하다‘고 투덜대었고, 쉽게 풀일을 어렵게 풀어나간다고 수군대었지만, 나는 나였다...

지금도 그 부회장은 나를 보면 ’허허허‘ 웃으며 ’별난놈‘으로 대접해준다. ’한번 놀러와‘ 잊을 만하면 내게 연락하여 뭘 도와줄 것 없는지 물어오지만, 나는 아직도 그에게 부탁하나 한적이 없다...여기서도 아직 써먹지않은 ’백지보증수표‘가 하나 남아있는 셈이다.

그때 당시, 해태상사에서는, 특히 내가 그의 아들을 어렵게 우리부서에 입사시킨 것을 알고 있는 몇몇 사람들은, 인도산 대두박 계약 10건중 축협5건을 제외한 최소 5건은, 그의 특별한 도움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지레짐작하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며, 직접 우리직원들이 발로 뛰어서 얻어낸 결과였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그의 아들이 해태상사에 입사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농산부 박부장’의 개인기에 의해서였다. 그의 아들은 ‘선경’에 특채되기로 내정되었으나, 신체검사에서 ‘간염’이 있다는 이유로 취소되었고, 마침 사료사업에 뛰어든 우리 해태상사에 요청이 들어왔는데, 그의 아들을 만나보니 세상물정을 아직 모르고는 있으나 다재다능하여, 우리부서사업에 나쁘지않을 것으로 평가하고, 인사부서에 강력추천하게 되었다. 역시나 우리 인사부서에서도 ‘간염’을 이유로 ‘입사불가’딱지를 붙이려는 것을, ‘간염’은 전염병도 아니고, 살아가면서 치료될 수 있는, 모두가 아는 병인데 ‘간염’을 이유로 능력있는 청년의 앞길을 막으면, 우리해태의 인간중심 경영에 역행하는 것이라 주장하니, 평소 나의 ‘못된 성향’을 익히 알고, 좋아하고 있던 홍상무님께서 특별히 ‘오케이’해주셨다...다른 부장들에게는 까다롭고 무서운 인사본부장이었지만, 나만 보면 홍상무님은 ‘요즘 어때? 좋아? 뭘 도와주까’ 하며 격려해주었다. 그는 해태제과에서 잔뼈가 굵어진 원년멤버중 하나인데, 외부에서 유입된 직원들이 많은 해태상사가 커지자 해태그룹의 인력관리차원에서 그를 인사본부장으로 앉혀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