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yton 6; 인도로 가자...Kakinada 항까지, 인도 대두박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나는 무슨 사업을 하든, 첫거래를 틀 때에는, 당사자의 사는 곳 즉 사무실이나 공장을 꼭 다녀온다. 당사자들의 사는 모습과 대표자 또는 담당의 얼굴을 보고나면, 어떤 영감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첫계약때 또는 첫 선적때도 마찬가지.
인도를 첫방문한 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잘 떠오르지 않는다.
참깨 시장조사를 하러, 참깨공급자를 찾으러 갔을 때였는지, 아니면 인도산 참깨 시장조사와 인도산 대두박 선적을 보려고 함께 갔는지,
또, M.V 메헤덴티의 싱가포르 가압류 후 갔는지, 그 전에 다녀왔는지...여러 기억들이 겹쳐져서 혼란스러워 잘 정리되지 않지만,
분명하게 기억되는 것은, 인도동쪽의 카키나다=Kakinada항을 방문하여, 대두박 선적하는 많은 노동자들을 보았다는 것. 수많은 파리떼들이 우글거리고 도처에 거지들이 내 앞에 줄을 섰다는 것은 선명하게 되돌아온다.
가끼나다항은 인도의 동쪽 항구인데 옛날에는 미국해군의 기지였다고 들었다.(윗쪽의 켈커타항보다, 훨씬 남쪽에 치우쳐있다.)
대두박선적하는 것을 보려고, 나는 봄베이에서 인도중앙의 Hydrabad 까지 비행기로 가서, 다시 그곳에서 자동차를 타고 포장이 되지않은 울퉁불퉁한 육로를 따라, 몇시간을 달렸을까? 나의 엉덩이가 불이 날지경이었고 기진맥진하여 인도동부항구에 도착하였다.(아마도 어둠속을 달린 것 같은 데, 거의 하루종일 달리지않았나 싶다...지금 생각하면 끔찍한 일정이었다.)
잠자리도 불편하였고, 식사도 입에 맞지않아서 해외출장중 그런 고생은 처음이었다.(나중에 1994년 수단의 포트수단항에서 겪은 사흘밤이 더 끔찍하였지만, 수단을 가기전에는 인도동부 가끼나다항 방문이 참혹했다.
대두박 선적하는 것을 보고, 다음에는 켈커타를 거쳐 중국산 참깨선적하는 것을 보러, 중국상하이로 날아갔다.(켈커타까지는 기차로 갔는지 버스로 갔는지 기억이 없지만, 아마도 기차로 갔을 것이다...어찌나 캘커타공항이 혼잡하던지...지금 생각하면 왜 그런 무리하고 고약한 출장일정을 잡았는지 이해가 되지않는다...아무리 젊은날, 한참 일하던 때이긴하지만, 위험한 여정이었다.)
강행군이었다. 결국은 상하이에서 ‘병원신세’를 지고 말았다. 처음으로 소위 ‘닝게루’를 맞게 되었다.
강행군도 강행군이었겠지만, 아마도 인도중부에서 인도동부까지, 포장되지않은 육로를 자동차로 거의 하루종일 달렸으니 아무리 내가 강철체력을 자랑한다 해도, 당해내지 못하였던 것. 거기에 잠자리와 식사까지 부실했으니, 또 중국출장까지 강행했으니 탈이 나고도 크게 나고도 남았을 것.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가끼나다항에서 어찌어찌 찾은 허름한 중국음식점에서 시켜먹은 볶음밥 비슷한 볶음밥...허기진 뱃속에 꿀맛식사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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