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에서...일본바이어4, 빠다피넛=Butter peanuts=Fried peanuts.
네 번째 일본바이어.
일본북부지방 우쯔노미야 소재 오가끼쇼땡=Ohgaki co.
후꾸오까의 볶음피땅콩이나 볶음알땅콩수출이 확대되지 못하였고, 그 뒤를 이어 찌바현 수입상이나 미야까와상이나 볶음피땅콩만을 수입하였으므로 수출확대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던 차에, 일본식 이름인 ‘빠다피낫’=Butter peanuts, 우리 식으로는 튀김땅콩이 일본시장의 주메뉴였다.
우리식으로는 술안주 특히 맥주안주로 적격이었다. 가정에서도 맥주홀에서도 그만한 안주가 없었다.
문제는 빠다피넛을 튀기려면, 복잡한 튀김기계가 있어야 하고 좋은 식용유가 있어야했다.
우리는 일본땅콩공장에서 사용하고 있는 기계와 식용유를 그대로 쓰기로 하였다.
일본에서 기계를 수입하고, 식용유로는 ‘야자유’를 역시나 일본을 경유하여 수출용원자재로 수입하였다.
(본격적인 수출완제품을 만들어내기까지는 시험 또 시험.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제품을 만들어냈다. 어떻게 하면 알땅콩이 두쪽으로 쪼개지않게 하느냐가 관건이었는데 100% 깨지지 않게 하기는 불가능하였고, 가능한한 그 %를 줄이는 것이 수익과 직결되었다...원자재소요량을 어떻게 나쁘지않게 받아내느냐가 또 주요포인트가 되었다...원자재소요량은 후술)
오가끼사는 초대 사장인 아버지가 현업에서 물러나고, 큰아들이 사장을 하고 둘째아들이 상무를 하면서 한국땅콩수입을 전담하였다. 나는 그를 주니어 오가끼상이라 불렀고 나보다 세 살 연상이지만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다.
(내가 우쯔노미야에 처음 갔을 때, 나의 호텔체재비 모두를 지불하고 일본의 여러 재미있는 곳을 안내해주었다...야한 라이브쇼하는 데도 보여주었는데, 한국촌놈의 눈이 더 크게 뜨였다.
또, 내가 처음 우쯔노미야호텔에 묵던 날밤, 텔레비죤에서 나오는 야동을 보다가, 한국에서는 꿈에도 생각지못할 소재들이 나오니, 나는 시간가는 줄 모르고 야동에 정신이 팔려 한숨도 자지않은 채 야동을 보기도 하였다. 가지고 있던 동전을 몽땅 TV에 쏟아부었던 ‘추억’이 있다 후후훗. 31살? 32살?때...
또다른 에피소드 하나; 그때는 안보교육을 받고 외국출장을 나가던 때인데, 북괴의 공작원이 어디 있을지 모르니 함부로 이곳저곳 다니지 않을 것등...범생인 나는 ‘대동강’ 또는 ‘평양’ 등 북한과 관련된 이름이 들어가는 식당은 발길이 가지 않았다. 참 웃픈 기억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그에게서 일본말을 더 배우고, 그는 나에게서 한국말을 배우게 되었다.
그는 한국을 너무 좋아하여, 김치가 맵다하면서도 맛있다고 또 먹고 또 먹고 하였다.
대전의 한국음식점이 좋아서 한달이 멀다하고 또 출장오고 또 출장왔다. 그러다가 대전 도청앞 행복여관의 단골손님이 되었다. 음식점의 미스김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이제는 눈치도 보지않고 공개적으로 사귀기까지 하게 되었다.
덩달아 수출실적이 매년 늘어났으며, 나의 일본말 수준도 좋아졌으며 또 덩달아 우리집사람의 부수입도 몰라보게 늘어났다. 하하하(앞서 설명한대로, 내가 일본출장을 가거나 국내출장을 가면, 회사는 규정에 따라 출장비를 일당으로 정산하여 지불하였으므로, 당연히 나의 출장비는 거의 월급만큼 많아졌다. 일본출장을 거의 3개월마다 한번꼴로, 내가 일본가지 않으면 그가 한국에 왔으므로 또 나는 대전으로 출장을 갔다.)
그와는 내가 곡물과장으로 전보되면서 공식적으로는 헤어졌다.1983년 1월?
(곡물과장은 해태상사의 최선임과로서, 농산사업부의 중추였으며 태국으로부터 주정원료인 타피오카를 주수입원으로 하였다. 후일 한.태구상무역으로 발전시켜 해태그룹이 타종합상사들보다 태국사업을 더 잘한다는 말을 듣게 하였다.)
나는 곡물과장으로 전보되자 일본땅콩수출사업은 나의 일고.농대후배인 나상0에게 물려주고, 나는 사료사업개발에 몰두하게 되었다.(후술)
(내가 방콕지사에서 서울본사에 돌아왔을 때에는, 일본의 주요바이어에서 Mr.Ohgaki는 없고 다른 바이어가 서울본사에 들락거렸다. 세월은 변화하는 것이지만, 내가 물려준 바이어가 아닌 다른 바이어가 드나드니 내마음은 요란하였다. 소위 권력이 바뀌니 세상인심도 바뀌는 것인가 하였다....내가 어떻게 만든 시장이며, 내가 어떻게 그들을 오늘이 있기까지 거두워 키워줬는데 이렇게 안면을 바꾸어도 되는 것인지 세상 참 고약해졌구나 싶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땅콩과의 실세가 바뀌고, 현실세가 새로이 시장을 개편한다는 데....검은머리 인간은 정을 줘서는 안된다더니 나를 두고 하는 말인가?)
오가끼상과 헤어지면서 나는 그에게 ‘개소주’ 한말을 선물하였다. 그는 그 댓가인지 골프셋트를 주기로 하였는데 통관상 문제로 아이언 7번만 가지고 왔다.
그와는 개인적으로, 인간적으로 친형제만큼 많이 친해졌는데...요즈음 어찌 지내는지 궁금하다. 나와 사업을 같이 할때는 와이프와 아들 하나 있었는데, 국내외출장을 많이 다니다보니 와이프와 사이가 벌어져 결국은 이혼까지 했는데...형과는 재산분할을 잘 하였는지...
일본 여기저기 수소문하면서 그의 소식을 찾아보았으나 현재까지 알 수가 없다.
거의 30여년이 지난 일이지만 어제일처럼 생생하기도 하고, 또한 어쩔수없이 30여년의 세월은 적지않아 가물가물 까마득하여...아쉬움만 가득하다. 부디 아직 건강하여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내가 방콕지사장 근무명령이 났다하니, 골프를 본격적으로 해야한다면 골프채를 내게 선물하려 했다.)
(내가 일본출장 다닐 때, 일본바이어들과 만나면 언제나 골프 이야기가 난무하였고, 골프가 뭐길래 그렇게 어렵다는지, 왜 그리 재미있게 말이 많은지 이해못하였다. 골프가 야구 비슷하게 하는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 뭐 그리 쉬운걸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지 이해를 못하였는데, 골프채가 하나인 줄 알고 골프채 하나 가져오라 하였더니 셋트로 14개라 한번에 가져옺오지못하고..우선 대표적으로, 연습하기 위해 아이언 7번을 가져다 준다해서...실소를 금치못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그 아이언7번으로 우리집 옥상 동신아파트 옥상에서 밤마다 빈스윙하염서 방콕지사생활을 미리 준비하였는데...행인지 불행인지..그 스윙덕분에 나는 아직도 싱글을 못하고..남에게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 어느 날 ‘왕싱글’을 목표로 한 4년정도 끝을 보자고 렛슨하며 골프를 죽을정도로 해보았지만, 끝내는 나의 골프는 ‘엉망진창’수준이 되고 말았다....나의 골프이야기는 별도로 쓰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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