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에서....일본땅콩수출의 개척자? ‘일본말이 잘 되니 이젠 영어가 잘 되지않았다?’
(일본말 하기는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우리말과 어순이 똑같을뿐만 아니라, 1천자정도의 단어만 알아도 의사소통에는 전혀 지장이 없었다. 거기에 어휘가 딸린다해도, 적당한 일본말이 바로 떠오르지않으면 한자말의 발음을 몇번 달리해보면 통했고, 그래도 잘 되지않으면 영어단어를 비슷하게 발음하면 거의 다 통했다. 동양3국은 한자문화권이라 하듯, 똑같이 같은 한자를 밑글자로 쓰고 발음만 조금씩 다르니 한자말을 몇번 달리 발음해보면 일본말 한자뜻과 서로 통하게 되었다...영어말하기는 영어가 우리말 어순과 전혀 달라서 우리학교교육에서 배운 문법중심 영어로는 구어체영어가 여간 어려운게 아닌데, 일본말의 경우는 우리말과 어순이 같아서, 일본인들과 대화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었다.)
내가 처음 일본출장을 갔을 때가 1981년 초. 아직 여권조차 없던 때.
앞서 말한, ‘마메쇼’와의 거래가 끊기고 나서, 마땅한 바이어가 없어서 막무가내 바이어 찾으러 일본출장을 홀로 갔던 기억이 새롭다.
‘일본땅콩신문’에서 잠재바이어를 리스트업하여, 후꾸오까부터 우쯔노미야, 센다이까지, 신깐센을 타고, 주요역마다 내려서 1박 내지 2박을 하면서, 주소아 전화번호 하나만 들고 물어물어 찾아다닌 경험이 있다.
그때 지하철을 처음 타봤고, 그때 역창구에서 표를 사서는, 개표창구에 넣어서 개찰하고 들어가는 것이 그렇게 신기하였던 기억이 있다.(한국은 아직 그때 개찰은 역무원이 하였다.)
주소지 하나 들고 물어물어 ‘어느 땅콩상점’을 찾아가면, 어찌나 신기해 하는지, 젊디젊은 한국청년이 서투른 일본말로 이것저것 따져 물으면 그들에게는 정말 신통방통했던 모양이었다...한국이라고 하면, 못된생각으로 미개하고 일본의 식민지였는데...아이고 이런 일이 있다니..아니 이렇게 젊은친구가 홀홀 단신 주소 하나 들고 바이어찾는다고 돌아다니니 참 별일이다 싶었던 모양 아닌가?
신기해서, 저녁밥까지 대접해주고 2차 선술집까지 가서, 그때 막 유행하던 가라오케방에 가서 노래 한번 불러보라하면, 나서기 싫어하는 내성적 성격이지만, 술한잔 걸쳤겠다 까짓껏 일본땅에서 어디 한번 불보자 하면서 ‘고래사냥’을 목놓아 소리쳐 불러대면 모두들 깜짝 놀라 까무라쳐주었다.
(자기 아들놈이 저리 씩씩해야하는데...우리 일본젊은이들은 패기가 없어가지고서는..쯔쯔즛 큰일이야 큰일 하면서...한국에서 온 젊은친구의 ‘고래사냥’을 뜻은 모르고, 씩씩하게 부르니 좋아하는척은 해주었다...일본술집의 도우미아가씨는 그때 한국과는 달리, 손님당 하나씩 붙는 게 아니고, 새끼마담등이 손님테이블을 돌아다니며 써비스하엿는데, 그 아가씨들도 멋지다좋다하였다...히힣)
말이 일본땅콩 수출이지 어떻게 원료땅콩을 수입하고, 어디서 가공하고 또 어떻게 일본에 수출해야 하는지, 그 사후관리는 어떻게 해야하는지,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가공수출이니, 섬유옷수출하는 것을 모방해서 그대로 따라하면 되겠지..막연히 생각하고 밀어부쳤다.
사실, 가공수출하려면 완제품을 만드는 수출용원자재를 수입하고, 얼마나 소요되는지(관련 기관에서 원자재소요량을 받아서..필요수량을 수입한다.), 수출하고나서는 기술소득분을 반영, 사후정산하고 마지막으로 관세환급을 받아야한다.
땅콩수출은 아무도 수출해본 기록이 없으므로, 해태상사가 하는 것이 즉, 내가 만들어 해나가는 것이 ‘법’이 되었고 ‘규정’이 되었다.
먼저, 원자재소요량(수출기록이 없으니 ‘가소요량’을 발급받아 나중에 수출 때 실검을 통하여 ‘정소요량’을 받아 사후정산하게 하였다...이는 농촌진흥청의 농업기술연구소에 의뢰하여 소요량을 발급토록 하였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농대 나온 것에 대하여, 다른곳에서는 ‘농대디스카운트’되며 푸대접.냉대를 받았지만, 일본땅콩수출사업하면서는 여기저기, ‘서울대농대’출신들의 협조와 도움을 음으로 양으로 많이 받았다. 그중 하나가, 농업기술연구소의 ‘원자재소요량’고시를 체계적으로, 기술적으로 완벽하게 발전시켜준 사람들이 ‘서울대농대’ 농화학과=식품공학과 선배박사들이었다.
땅콩수출사업뿐만 아니라, 나중에 곡물과장으로서 ‘옥수수전분수입사업’‘사료곡물수입사업’이나 ‘타피오카 주정원료수입사업’할 때 그리고 또, 내가 ‘대평원농상주식회사’를 차려 농수산물식품유통공사의 국제참깨입찰사업을 할 때도, ‘서울대 농대’출신들의 파워 덕분으로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인사드린다.
인연이란 것이, 운명이란 것이 이렇게 연결되어 있었다. 내가 ‘농대’를 들어가지 않았다면, 내가 하는 농산물.식품관련 사업이 다른 경쟁자들 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겠는가? 대기업 직장생활을 하다가 내 회사를 차린 것도, 내가 농산물.식품사업을 한 것도 모두가 다 그 많은 전공중에서 ‘농대식품공학’을 선택한 것과 끈이 닿아있는 것인가?)
완제품 수출후, 원료땅콩수입관세는 수출면장을 제출하고, 원자재소요량에 근거하여 소요된 원료량만큼 관세환급하여 원가에 반영시켰다.
(구로세관의 환급담당 과장님은 특별히 나 해태 박과장을 좋아해주었는데, 대한민국에서 제일 일을 잘한다고 추겨세웠다. 왜냐하면, 모든일을 깔끔하게 처리했다는 것보다는, 아무래도 내가 때가 되면 맛있는 것을 신문지속에 잘 넣어주었기 때문 아니었을까하하하. 처음에는 그일을 어찌해야 하나, 인사는 해야하는데 어찌해야하는지 아무것도 몰라서, 고민고민 또 고민하다가...신문속에 맛있는 것을 넣었노라 말했더니 더듬더듬거리며...자식 별거 다 걱정한다는 듯, 그의 책상서랍을 쫙 열더니 빨리 넣으라 눈짓 하는 게 아닌가하하, 나는 엉겁결에 가져온 신문지를 그 서랍속에 넣고 말았다. 그 뒤로 나는 ‘대한민국에서 제일 일잘하는 박과장’으로 통했다.)
또, 최초 원자재소요량 보다 더 향상된 원자재소요량이 나오면, 그만큼 ‘기술소득분’이라하여 임의처분할 수 있도록 정부가 수출자에게 특혜를 주어서 수출을 장려하였다.
(원자재 소요량에 근거한, 기술소득분이 얼마가 나오느냐는 수출업자의 채산성과 바로 연결되었다. 당시 오징어땅콩의 선두주자인 동양제과와 치열하게 경쟁하던, 해태산업으로서는 수출용원료땅콩의 기술소득분이 많이 나오면 나올수록 그만큼 경쟁력이 높아지는 것. 해태산업에서는 일본바이어를 데리고 오는 해태상사 박과장은 ‘인기’였다. Butter Peanuts의 빅바이어인 Mr.Ohgaki는 VIP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한번은 해태산업사장이 직접 그를 데리고 명동에서 양복정장을 맞춰주는 것이 아닌가? 수출하면 최고의 대접을 받던 때였다.)
여기서 한가지 더 추가하자면, 나의 무용담이자 ‘무모함’의 극치라 할 수 있는데...그때는 거침없이 일중심으로 밀어붙였고 그 중의 하나가 ‘아프라톡신’시험성적서 발급하는 것.
그당시 한국정부 어느 곳에서도 ‘아프라톡신’시험성적서를 발급해주는 연구소 또는 기관이 없었으므로, 일본정부에서는 그 증명서를 신용장상에 요구하고 있으니, 긴급 응급처방으로, 그 증명서를 내가 자작으로 만들어썼다는 것.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기 짝이 없고 그렇게 해서는 안될 일이었지만, 그때 일개 ‘과장’으로서 전권을 행사하게 되었다.(앞서 말했듯이, 우리부장/상무는 구체적내용을 알지도 모르고 모두 나에게 일임하였으므로, 나는 보고도 하지않고 나 독단으로 집행해버렸다...아, 이런일을 하고 말았다니@@@@)....
(물론, 얼마지나지않아, 카이스트 생화학실과 용역계약을 체결하여 공식적으로 발암물질인 아프라톡신 검사를 하고, 정식으로 ‘시험성적서’를 발급받아 제출하였다.)
가칭‘한국 아프라톡신 연구소’(?)라는 연구소를 페이퍼상으로 만들고...명판과 도장까지...
내가 만들고 내가 명판과 도장을 찍어서 신용장 상 선적서류에 포함시켜 은행을 통해 일본의 바이어에게 보내 수출대금을 회수하였다.(마메쇼와의 클레임 이후, 일본바이어는 아프라톡신 불검출시험성적서를 요구했고,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가짜서류로 대응하였다. 정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고...조금도 개의치않고 그대로 실행까지 하였는지...지금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할 일이었다...그렇게 원칙을 중요시하고 합리적 근거없이는 한발짜국도 나아가지 않는 박과장이 그런 일을 했다니..믿어지지않는다...
(뒤늦게 위험한 일을 서슴없이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행히 정식절차를 밟아서, 카이스트의 생화학실=노정구박사?,과 년간용역계약을 체결하고, 수출신용장마다 매건 아프라톡신검사를 공식적으로 발급받아 일본바이어측에 제출하였다. 시험검사도 하지않은 ‘시험성적서’가 아닌, 진짜 시험검사를 거쳐 ‘성적서’를 발행하여 처리하였다.)
위와같은 위험천만의 가짜서류 작성까지 하면서 나는 일본땅콩수출을 2년여동안 엄청 열심히 하였고,
그결과..일본어구사가 영어보다 더 잘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일본인들의 비즈니스 원칙과 일본식 비즈니스를 몸소 체험하게 되어 후일 상사맨으로서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한편 아쉬운 것이 있다면, 일본말이 잘되면 잘될수록, 어찌된 노릇인지, 영어말이 생각보다 늘지 않는다는 것. 쓰는 것이야 물론 영어가 더 잘되지만, 말하는 것이 아무래도 어순이 같은 일본말은 청산유수처럼 되지만, 더 잘되어야 할 영어는 진도가 썩 좋은 편이 아니었다.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방콕지사장 근무후 본사에 돌아와서 농산사업부장으로서 본격적인 해외영업을 할 때 일본땅콩수출 때 배운 경험이 큰도움이 되었다...내 사업 창업후 더욱 더 빛을 보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빌어, Mr.Miyakawa 사장과 Mr.Ohgaki 에게 감사인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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