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스크랩] `샴페인!`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5. 14:20

드디어 밤 8시 10분.
에티오피아 항공의 탑승구는 걷고 또 걸었더니 마침내 나왔다. 이것이 국력인가. 아마도 태국정부가 제일 구석진 곳에 자리잡게 한 모양이었다.

벌써 전혀 새로운 그리고 색다른 세상 속으로 들어온 기분이었다.
공기도 다른 것 같고, 어쩐지 분위기도 다르고, 당연히 사람들의 얼굴색이 확연히 달라 너무 낯설었다.
대부분의 탑승객이 우중충하고 어둡기만 하다. 쉽게 말해서 온통 시커멓다.
그러니까 순종의 아프리카 흑인들이 대기실 넓은 공간을 듬성듬성 거의 차지하고 있었다.
그 속으로 떠밀리듯이 그러나 괜히 성큼성큼하게 하면서 걸어 들어갔다. ‘거치른 벌판으로’ 들어가는 듯이.
10여년 전, 수단을 처음 들어갈 때도 이렇게 낯설었던가. 그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무덤덤한 일상적 출장여행일 뿐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나이를 먹긴 먹은 모양이었다.

조물주가 인간을 만들 제, 졸다가 시간을 넘겨서 꺼낸 것이 흑인이고, 시간을 다 채우지 않고 꺼내서 역시 불량품으로 만들어진 것이 백인이며, 다행히 우리 동양인들은 조물주가 신경을 써서 제대로 만들었다는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
그래 제대로 만들어진 내가 제대로 일을 보지 않으면 누가 잘 할 것인가 자문하였다.

‘오렌지쥬스? 샴페인?’
이국적이어서 더 매력적인 갈색의 여승무원이 물어왔다. 지상에서 보았던 순종의 흑인류가 전혀 아니었다. 쭉쭉빵빵에 갈색, 아니 흑갈색이 더해지니 야릇하고 독특한 아름다움이 나타났다. 전혀 새로운 아름다움이었다.

잠시 멈칫하다가 ‘샴페인’하였다. 기내에 자리를 잡으면 보통 와인을 필두로 이러저러한 음료들을 권하고 나는 거의 ‘오렌지쥬스’ 하는데 오늘은 왠지 ‘샴페인’하고 싶었다.
샴페인을 권하는 것이 처음이기도 하며, 우리에게 샴페인은 식전 음료이기보다는 ‘축하’의 의미가 더 각인되어 있지 않던가.
무엇에 대한 축하일지는 놓아두고 그냥 ‘축하할 일’이 생길 것으로 작정해버린 것이었다.

‘샴페인!’
어느새 비행기는 땅 위를 박차 떠오르고, 곧 남국의 밤하늘 위로 올라와 어둠이 내리덮인 대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아래 방콕은 이미 어둠 속 ‘불빛 바다’, 아니 ‘별빛 하늘’이 되어 있었다.
어디가 바다이고 어디가 땅이고 어디가 하늘인지 도통 구별이 되지 않는 세상 속으로 비행기가, 내가 들어와 있었다.

순간적으로, 나는 어디에 있지, 나는 누구이지, 잠시 꿈속에서 헤매는 것 같았다. 샴페인을 기분좋게 마셔서일까, 장자의 나비꿈 ‘호접몽’이 또 생각되었다. 장자가 헷갈리고 있었다. 내가 나비인가 나비가 나인가.

‘샴페인!’ 하며 샴페인을 마신 나비가 어둠 속으로, 하늘 속으로 들어가며, 잠시 헷갈리고 있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거치른 벌판으로 들어가면서 꿈을 꾸고 있었다.
/2005.5.5.밤 9시경, 에티오피아 항공 기내에서.
-----야, 넘아짜샤야,아직도 방콕이냐? 언제 에티오피아 구경하냐,이 눈보넘아!/조금만 더 기다리면 안될랑가요옷, 뭐 별 것이 없을 것이지만서도...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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