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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페이터의 산문`/이양하(1/4)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5. 11:19
‘페이터의 산문’(1/4)

만일 나의 애독하는 서적을 제한하여 이삼권 내지 사오 권만을 들라면, 나는 그 중의 하나로 옛날 로마의 철학자,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을 들기를 주저하지 아니하겠다.

혹은 설움으로 혹은 분노로, 혹은 욕정으로 마음이 뒤흔들리거나,

또는 모든 일이 뜻같이 아니하여, 세상이 귀찮고,

아름다운 동무의 이야기까지 번거롭게 들릴 때

나는 흔히 이 견인주의자 황제를 생각하고, 어떤 때는 직접 조용히 그의 명상록을 펴 본다.

그리하면, 그것은 대강의 경우에 있어,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회복해 주고, 당면한 고통과 침울을 많이 완화해 주고, 진무해 준다. 이러한 위안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모르거니와, 그것은

"모든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내 마음에 달렸다."

"행복한 생활이란

많은 물건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라."

"모든 것을 사리하라. 그리고, 물러가 네 자신 가운데 침잠하라."

이러한 현명한 교훈에서만 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도리어 그 가운데 읽을 수 있는 외로운 마음,

끊임없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가 생활의 필요조건이 되어 있는 마음,

행복을 단념하고 오로지 마음의 평정만을 구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시 말하면,

목전의 현실에 눈을 감음으로써,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현실을 아주 무시하고 망각할 수 있는 마음에서 오는 편이 맞을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 그 위안은 건전한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실, 일종의 지적 오만 또는 냉정한 무관심이 황제의 견인주의의 자연한 귀결이요,

동시에 생활 철학으로서의 한 큰 제한이 된다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반면, 견인 주의가 황제의 생활에 있어 가장 아름답게 구현되고,

견인주의자의 추구하는 마음의 평정이,

행복을 구할 수 있는 마음의 한 기본적 자체가 된다는 것만은,

또 수긍하지 아니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음에 번역해 본 것은 직접 명상록에 번역한 것이 아니요,

월터 페이터가 그의 <<쾌락주의자 메이리어스>>의 일장에 있어서, 황제의 연설이라 하여,

명상록에서 임의로 취재한 데다 자기 자신의 상상과 문식을 가하여 써 놓은 몇 구절을 번역한 것이다.

페이터는 다 아는 바와 같이, 세기말의 영국의 유명한 심리 비평가로, 아름다운 것을 관조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데 일생을 바친 사람이다.

나는 그의 <<문예 부흥>>의 찬란한 문체도 좋아하나,

이 몇 구절의 간소하고 장중한 문체도, 거기 못지 아니하게 좋아한다.

그리고, 황제의 생각도 페이터의 붓을 빌려 읽은 것이 없을 뿐 아니라,

한층 아름다운 표현을 얻었다 할 수 있지 아니한가 한다.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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