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기러기 카페 글모음)

[스크랩] `산 자들이여 모여라`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1. 15. 11:16
2005.1.9. '산자들이여 모여라'/정환이네 문상을 다녀와서

아직도 서울의 토요일 오후시간은 바쁘기만 하다.
시간의 양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이겠지만 괜스레 바빠지는 것이 우리들 서울사는 현대 도시인들의 마음, 덩달아 택시도 빨리 달리고, 그러다가 오히려 거리는 더디게 움직인다.

2005년 1월 8일 오후 2시 45분,
용산역 KTX 대합실.
역사의 토요일은 더 바쁘게 보인다.
시끌벅적, 왁자지껄, 여기저기의 웅성거림과 설레임이 뒤섞여 더 바뻐보이고 내 마음도 함께 바뻐지고 있었다.
처음 만나는 KTX 용산역은 새로우나 낯설었고, 복잡하였지만 활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돋보기를 쓰고 있는 동원이는 전혀 딴사람, 무엇인가 문자멧돼지를 암키러기 여러분께 보내시고 계시는가, 너무 진지하였다.
이윽고 나타난 찬웅은 손에 ‘시조’ 한권을 들고, 토요일 애플노래방을 ‘휴방’한 사장님답지 않아 보였다.
조금 있으니, ‘우리의 상숙’ 우상이, 역시 토요일 인성참치를 땡땡이 치고, ‘짜아-안’하며 털털하게 나타났다.
마지막 ‘상태’,
우리의 상태가 좋아져서 제 시간에 도착할지, 상태가 좋지 않아서 혹 늦어지면 어쩌나, 궁금해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따르릉, 따르릉, 여기 성모병원 앞인데, 몇 시까지 가면 되는 거유?’
‘늦어도 3시 10분, 출발 5분전까지만 오시드라공,,,,,‘ 대답하였는데, 토요일 오후 도로가 말해주는 것 아니겠나요?
걱정반 조바심반 하기를 20여분, 그는 날아서 왔는지 축지법을 썼는지, 말짱하게 늦지 않게 도착하였다.

토요 영업을 마다하고 온 '찬웅'과 '상숙'
새롭게 대한성형학회 이사장이 되시고, 신년하례식을 숨가쁘게 치르고 벌떡헐레 숨차게 달려온 '상태'
평소 기러기 산행 참여가 원천적으로 쉽지 않았던 위 세 기러기들도 이 날은 날아들 오셨다.
돌아가신 돌부처 어머님께서 흩어져 살고있던 자들을 이렇게 한자리로 모이게 하셨으니, 얼마나 좋은 일을 하시고 계시는가.

우리 다섯은 케이티엑스 안에서 신이 났다.
상태가 출발시각 바로 전에 도착하면서 우리를 재미있게 긴장시키더니, 기차 속에서도 재미있는 성형 이야기로 우리를 신나게 만들어 주었다.
절벽을 갖고 있지 않은 자, 이 세상의 절벽을 모르지만, 절벽을 갖고 있는 자, 이 세상이 절벽일 수 밖에, 이 절벽을 솟아오르게 하는 자, 그대 지금 우리와 함께 있어 서로들 즐거워 하노라.

우리의 '원'이는 신이 나면서도 또 바뻤다. 몸은 비록 가지 못하지만 마음과 봉투를 부탁한 여기저기 암키러기들에게 실시간 중계하랴, 봉투에 이름 적으랴, 우리의 케이티엑스 사각테이블 좌석은 안성마춤이었다.
봉투에 '전남여고' 아무개가 나으냐 '68 기러기' 아무개가 나으냐 갑론을박하였지만 결국은 쓰는 놈 맘, '전남여고' 아무개, 그러고 보니 암기러기들 전원참석 아닌가. 멀리 완도가는 와중에도 급하게 참여해주신 ‘우리의 솔향’ 까지.
거기에 간간이 눈발까지 흩날리니, 죽은 자가 산 자들에게 너무 호사를 주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광주역 6시, 서울에서 3시 15분에 출발하였으니 3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우리를 맞이한 것은 전혀 생각지 못한 눈발과 '정선생'.
가느다란 눈발은 얼른 머리에 얹히고 부쩍 젊고 날씬해버린 '정선생'을 모두들 한참 반가워하였다. 혼자 가시기 뭐시기 해서일까, 아니야 우리들 잘생기고 씩씩한 서울 숫기러기들 먼저 볼려고 그랬던 거지였던 거지다.

찬규와 수남은 벌써 자리를 잡고 돌아가신 고인의 깊은 헤아림을 만나고 있었다.
조금 있으니 나주의 거물 '제평'과 광주의 빛나는 원장 선생님'홍식'이 들어오니 주위가 갑자기 훤해졌다. 둘이서 앞뒤 이마에서 쏘아대며 반사되는 빛이 새해들어서 더 강렬해졌음을 알리고 있었다.
몸이 오지 못한 '용환'의 훤한 이마까지 합세하였다면 장관이었을 것인데 일이란 조금 남겨두어 조금 부족한 것도 좋을 것이었다.

시끌시끌 벅적벅적, 소주잔은 기러기들 날개 위로 날아다니고, 벌써 술이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가, 상태와 동희의 얼굴에 빨간꽃이 때아니게 피었더라, 눈꽃과 어우러졌더라면 더 볼만했을 터인데........
'흩어져 산 자들이여 오늘 이곳에 모여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들 하고 가거라'


정환은 정선생에게 이름이 무어냐고 서슴없이 용감하게 묻고 말았다. 감히 숙녀에게 이름을 물어보다니, 그래도 오늘은 상주의 특권, 벌칙없이 신나게 웃으면서 넘어갔다. 옛 이름은 '정'아무개요, 새로운 이름은 '정'아무개이오니 부의록에 잊어먹지 말고 잘 챙기라고들 난리였다.

순남이가 갑자기 일어서며 소리하였다. '어, 저기 정희하고 신랑이 온다.'
그동안 순천에 살았다고 자기 식구들 먼저 알아보고 반가워하였다.
모두들 생각지 못한 친구가 오니 좋고, 더불어 쌍으로 오니 더 좋았다.
우리의 호프 '거멍이'를 잡아간, 말로만 들어왔던 장본인을 이곳에서 만나다니, 역시 죽은자의 산자들에 대한 또다른 베풂이었다. 그 장본인은 키가 훤칠하시고 잘 생기시기까지, 젊은 날 한가닥 하셨을 ‘훤훤장부’.

찬웅과 찬규가 정희 신랑 앞에서 갑자기 순한 양이 되었다. 호기있게 떠들고 소리치던 방금 전까지의 그들이 아니게 표변하였다. 사람들이 저렇게 변하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족보를 따지더니 정희를 보고 '형수님' 하는 것이 아닌가.
찬웅은 초등학교부터 대학서클까지 내리 몇 끝발 아래라니, 정희에게는 좋기만 하였다.
앞으로 '두찬'은 정희 앞에서도 순한 양이어야 할 것이다.
다시는 ‘황정희’인지 ‘이정희’인지 헷갈리는 척, 고단수를 부리면 안될 것이었다.

두 분이 부러 순천에서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은 물론 정환이네 문상도 문상이지만, 다음 토요일 아들 결혼식 때문이었다.
서울 기러기들이 다음 토요일 또다시 순천에 오는 것은 너무나 고마운 일이나, 염치없이 넙죽 받아먹기가 편치 않아서, 오늘 여기서 고마운 마음을 받고 아들 결혼식 참여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자는 것이었다.
'아, 이 깊고 넓은 헤아림을 무엇으로 갚아드려야 할 것인가.'
마음과 마음을 깊이 깊이 주고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축하하고 또 축하합니다, 윤영철군의 결혼을 축하드리며 내내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시간이란 이럴 때 흐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님을 그린 여인네가 동지 섣달 긴긴밤 한 허리를 잘라내어 이불속에 고깃고깃 넣어두었다가 님이 오면 꺼내서 쓰겠다 하였는데, 오늘도 그 시간이 필요하였다.

9시 30분에 맞추어져있는 서울행 기러기들은 갑자기 흘러가는 시간이 얄미워졌다.
애당초 당일치기 한다는 것이 어울리지 않았지만 각자의 사정 또한 여의치 않았던 것인데 막상 와서 닥치니, 밤을 세우지 못하고 서둘러 날아가야 하는 기러기들 신세가 처량하고 따분해지고 말았다.

곁들여서 나도 덩달아 광주에 계시는 노모를 그냥 지나치고 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불효막심인데 여기까지 와서도 뵙지 않고 훌쩍 떠나기가 전혀 내키지 않았다.
부랴부랴 서둘러 찾아뵈러 일어섰더니, 미안하고 또 미안할 따름이었다.
상주에게도, 광주에서 모처럼 만난 제평 홍식에게도, 순천에서 멀리 오신 정희네 부부에게도, 미안함만 잔뜩 남기고 말았다.


우리의 삶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은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태어남이 시작이고 죽음이 끝인가.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 아닐까.
태어남과 죽음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다르지 않은가.
태어남도 죽음도 모두 우리의 삶 아니던가.
태어나는 시작이 없다면 끝나는 죽음도 없는 것이고, 끝나는 죽음이 있어야 또 태어나는 시작이 있는 것 아닌가.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고, 끝이 있어야 시작이 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슬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처럼, 죽음도 즐거워해야 할 대상이다 라고 상식을 뒤집어서 이야기 해보자고 하는 것 아닌가.

'죽은 자가 산 자들을 모이게 한다.'
돌아가신 분이 죽음을 서러워하지 말고, 너희들 모두 다시 만나고 모여 앉아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즐거운지 이야기하라고 하지 않은가.
그동안 제각각 살아가는 일로, 바쁜 일상 때문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가족들, 옛친구들을 한자리로 불러모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하니 얼마나 좋은 일인가.

본인 정환이야 황당한 일이고 당황스런 일임에 틀림없지만, 난 이럴 때 의외로 담담하고 순리적이 된다.
시작이 있어야 끝이 있고, 끝이 있어야 시작이 있는 것이니,
그렇게 막상 일어난 일을 뭐 슬퍼한들 무슨 소용인가 차라리 담담하게 맞이하자,
우리가 내놓고 아직은 즐거워하지는 못해도 그렇다고 엉엉 울면서 청승을 떨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더군다나 평균수명을 지나시고 큰 병 앓으시지 않고 이승의 끝을 맺고 저승의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면, 어쩌면 정말 좋은 일 아니던가. 그래서 점잖게 모두들 그동안 '호상'이라는 중성적 두리뭉실 표현을 해왔지 않을까.

우리가 끝까지 죽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시라.
이것보다 더 끔찍하고 황당한 일이 또 있겠는가.
우리는 늙어가면서도 죽지 않고 계속 살아있고, 우리의 아이들은 또 계속 나이들고 따라 늙어오고, 우리의 손주들도 또 따라 늙어오면서 또 죽지 않을 것이니,
이런 일은 좋다고 할 것인가, 황당하다고 할 것인가, 이는 분명히 황당한 일임에 틀림없을 것.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끝이 있어야 또다른 시작이 있게 되는 것.
죽음은 하나의 끝이고 또다른 시작일 뿐, 기뻐할 일일지는 알 수 없어도 슬퍼할 일은 전혀 아닐 것 아닌가.







출처 : 68 기러기
글쓴이 : 박동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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