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2)(독서노트)
김성호의 유라시아 기행
ㅁ.김성호의 유라시아 기행/2004.6.26
--모스크바의 야경, 표트르 대제(1672-1725)의 동상.
러시아 근대화에 앞장 선 개혁가, 서유럽의 관습과 풍속을 적극적으로 수용,
또한 전쟁을 일으켜 러시아 영토를 발트해까지 확장하였으나,
오히려 전쟁으로 인하여 농민반란의 불씨가 되었다.
큰 도로 옆의 오래된 집들의 대문에는 여러 문양들이 있었다.
사람, 동물, 식물.
사람 문양의 집은 왕족, 동물은 귀족, 식물은 평민.
러시아 국산차 볼가가 많이 눈에 띄었다.
크렘린궁 앞의 붉은 광장.
소련군의 사열장소로 자주 이용.
크렘린궁과 함께 공산주의 시대 소련의 부정적 이미지를 나타내는 상징물.
붉은 색은 없다.
17세기 무렵 이곳 광장 자리에 들어섰던 시장을 정리하였다.
광장의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기다란 직사각형의 돌은 오히려 온통 검은 색이다.
‘크라스나야 광장’
고대 슬라브어로 ‘붉다’ 또는 ‘아름답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름답다는 의미는 사라지고 붉다는 의미만 강조되고 있다.
이렇듯 ‘붉은 광장’은 빨갱이들의 광장이 아니라 ‘아름다운 광장’이다.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이나, 베니스의 산마르코 광장, 그리고 파리의 화합의 광장‘콩코드’와 어깨를 나란히 할만큼 아름다운 광장이다.
붉은 광장과 레닌의 묘,
열정과 정의, 사회적 평등과 이상에 기울일 수 밖에 없었던 한국의 젊은이들에겐 마르크스와 레닌은 한동안 우상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일하는 자의 천국이며 모든 인간이 평등하게 사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상 그 자체를 거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상적인 평등사회의 현실적인 정치체제로 알려졌던 공산주의는 1991년 6월 몰락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주의 ‘이상’이 현실의 정치권력으로 현실화할 때 엄청난 ‘공산독재’가 된다는 교훈을 남겼다.
레닌의 묘소가 온전히 보존되고 있으며 일부 지역에 그의 동상이 그대로 남아있다.
러시아 국민들이 갖고 있는 레닌에 대한 애증의 이중심리가 반영되어 있을 것이다.
비록 현실의 정치권력으로는 실패했지만, 레닌이 추구했던 모든 인간들의 평등이라는 이상은 러시아 국민들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붉은 광장을 바라보고 묻혀 있지만 러시아의 현실을 지켜보는 그의 눈은 편히 잠들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바실리 성당과 모스크바의 봄’
붉은 광장을 뒤돌아 나오면 오묘한 자태로 서 있는 건축물, 바실리 성당.
200여년 동안 군림한 몽골족 카잔한국을 물리친 기념으로, 이반 4세(1530-1584)가 1555년 건축을 명해 5년만에 완성하였다.
색깔, 크기, 모양이 각각 다른 아홉 개의 탑이 빚어내는 조화가 아름답다.
마치 양파 모양으로 볼록하게 솟아있는 아홉 개 지붕,
보는 각도에 따라 모양이 모두 다른데다가 각양각색의 형태와 독특한 질감, 햇빛을 받아 더욱 돋보이는 색깔의 미묘한 조화가 압권이다.
이반 4세는 혹시라도 이 아름다운 성당을 누가 다시 지을까 봐, 건축가 포스토닉 바르마를 불렀는데 다시 지을 수 있다고 하니까, 그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시베리아 횡단 철도, TSR, Trans-Siberian Railway 와 한국 횡단 철도, TKR, Trans-Korean Railway.
부산에서 베를린까지, 선박으로 34일, 철길로는 21일.
물류비용 남한 1억불, 북한 1.5억불 경제효과.
철길을 따라 사람과 문화의 교류가 이루어진다.
남북통일로 나아가는 길이며, 남북분단으로 잃어버린 대륙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길이다.
남한의 해양세력과 북한의 대륙세력이 하나로 합쳐지면서 그 웅비의 힘으로, 국경없는 철길을 통해, 만주와 중국의 중원, 몽골, 시베리아를 거쳐 유럽대륙으로 뻗어가는 길이다.
문학과 낭만이 숨쉬는 아르바트 거리. 프랑스의 몽마르트 거리와 같지 않을까.
푸슈킨, 투르게네프, 도스토에프스키, 고골리, 차이코프스키가 그들의 한 시절을 보냈던 곳.
과거 스탈린의 압제 하에서 젊은이들이 자유를 갈구하며 몸소 나섰던 저항의 거리,
공산주의 몰락 이후에는 자본주의 물결의 장으로 탈바꿈되었다.
얼핏 보기에 거대한 야외 카페, 곳곳에 맥주을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다.
러시아 맥주 기본이 12도.
러시아의 추위 40도는 추위가 아니고, 보드카 40도는 술이 아니다.
목각인형, 마트로시카, 같은 모양의 인형들이 크기만 다르게 많게는 10 개 이상 들어가 있다. 벗겨도 벗겨도 똑같은 인형들이 연이어 나온다.
곡시과 여인의 인형, 다산과 풍요의 상징,
아르마트는 무궁무진하고 다양한 색깔을 가진 거리였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푸슈킨, 문학적 천재성에 따라오는 여성편력.
귀족청년 푸슈킨은 술과 여인과 도박 속에서 세상의 쾌락을 사랑했던 시인.
절세미인이었던 그의 아내, 나탈리아와의 운명적 만남, 황제 니콜라이 1 세의 눈에 들어 불륜의 주인공이 되어 그를 배반하고 급기야 프랑스 남작 단테스와의 염문설까지 부린다.
단테스와의 권총 결투, 페테르부르크 변두리 숲에서, 38살의 젊은 나이에 삶을 마감한다.
시베리아 횡단철도,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 전장 9,466Km,
지구 둘레의 4분의 1. 경부선의 20배 이상.
‘에니세이’ EHUCEU, 에니세이 강의 이름을 땄다. 횡단철도 열차 이름.
매진이 되는 경우가 많으므로 예약을 해야 한다.
아무리 살기 어려워도 꽃 장사는 호황이다.
시베리아 사람들은 자작나무를 신성시 한다.
하느님이 하늘에서 자작나무를 타고 내려와 러시아인이 되었다고 믿는다.
경주 천마도와 해인사의 팔만대장경도 자작나무.
자작나무가 갖는 내구성 강한 재질적 특성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어느 나라든 자작나무에 대하여는 신비스럽게 생각하는 의식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다차 Dacha, 통나무로 지은 일종의 별장.
여행하는 사람들끼리는 서로 솔직해야 한다.
자신의 약점도 약간은 털어놓으면 분위기를 돋울 수 있다.
그러나 너무 긴 여행은 갈등을 빚을 수도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
고리끼 역, 모스크바에서 3 시간 쯤 후.
막심 고리끼 1868-1936, ‘어머니’, 노동자의 어머니로 글자도 모르던 한 여인이 혁명에 눈을 뜨는 과정을 그린 소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수로 추앙받았다.
고리끼는 ‘쓰라린, 견디기 어려운’ 뜻의 형용사, 필명.
고리끼는 레닌의 절친한 친구이자 혁명동지.
‘삶이란 대단히 좋은 건 아니다. 지독하고 잔혹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인생을 버릴 만큼 지독한 건 아니다.’
12세기 중엽부터 15세기까지 250여 년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았다.
이제는 시베리아 지역을 야금야금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어 가고 있다.
역사는 현재의 시각에 그쳐서는 안되고 미래를 내다봐야 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시베리아가 러시아 문학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데카브리스트’라고 불리는 청년장교들이 이곳으로 유형오고부터.
나폴레옹 군대를 추격해 간 프랑스에서 오히려 유럽의 자유주의 사상을 가져왔다.
1825년 12월, 제정 러시아 황실의 부패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실패, 시베리아로 유형,
12월을 가리키는 ‘데카브리’에서 나온 말.
도스토에프스키는 시베리아에서 4년간의 유형과 4년간의 군복무 등 거의 10여년을 보냈다.
흰 눈위에 핀 꽃 파스테르나크의 ‘닥터 지바고’
영화 오마 샤리프.
1917년 볼세비키 혁명 전후 격라에 휩싸인 주인공 의사 ‘유리 지바고’의 험난한 인생을 그리고 있다.
각각 저마다 아내와 남편을 둔 지바고와 라라의 순수한 그들의 사랑, 눈 덮인 시베리아의 배경, 더불어 사회주의 혁명시절 좌절과 고통을 겪어야 했던 지식인들의 비애,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모스크바에서 라라를 우연히 본 지바고가 버스 안에서 그 충격으로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고, 지바고의 주검 앞에서 라라의 고백을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길고 깊었으며 순수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설탕과 소금을 많이 먹는 식생활 탓에 젊은 시절에 아름답던 러시아 여성들이 나이가 들면 모두 뚱뚱보로 변하는 것이 아닐까?
유럽풍의 이름, 예카린부르크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처형된 곳.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의 고향, 마피아의 도시,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비인 오벨리스크가 있다.
우랄마쉬, 체첸, 손체보 마피아.
1860년, 러시아와 중국의 베이징 조약으로 국경을 맞대게 된다.
흑해를 통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이 크리미르 전쟁의 패배로 좌절된 뒤, 차르 정부가 또다른 해양출구를 찾아 동아시아로 관심을 돌리던 때.
1891년 부설된 시베리아 횡단철도.
1990년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
주먹을 쥐고 말뚝을 박는 시늉의 배웅 인사, 지금까지 걸어온 험난한 길은 땅에 묻고, 이제 편안한 마음으로 떠나라는 러시아식 배웅.
고려인의 유랑 1 세기.
러시아 거주 고려인의 유랑역사는 1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60년대 조선인들은 하나둘 두만강을 건너 러시아 땅에 정착한다.
1920년대 초반 불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크 등 연해주 지역 조선인 13만명.
1937년 고려인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볼세비키 혁명후)
이르크즈크, 시베리아의 진주, 시베리아의 파리.
1 시간 거리에 바스칼 호수.
혁명의 별, 데카브리스트,
유럽원정을 통해 계몽주의와 자유주의 사상에 물든 이들 젊은 장교들은 입헌군주제를 수립하고 농노제를 폐지 등을 위해,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의 즉위식 당일에 구테타를 계획했지만, 사전 발각돼, 주모자 5명 처형, 120여 명 시베리아 유형, 이르크즈크.
혁명은 비록 실패했지만 장교들의 자유주의 사상이 이곳 이르크즈크가 시베리아의 파리가 되는 문화에 영향을 주었고, 100년 후 레닌이 이끄는 사회주의 혁명과 연결되었다.
‘진보진영은 분열로 망하고, 보수진영은 부패로 망한다’
상하이파와 이르크즈크파의 싸움, 자유시 참변 또는 흑하 사변.
대지의 어머니 ‘바이칼’
남한의 3분의 1, 22개의 섬.
13세기 마르코폴로, 시베리아의 보물단지.
1933년 이광수이 ‘유정’의 배경.
‘바이’는 풍부한, ‘칼’은 호수.
시베리아의 크고 작은 300개가 넘는 하천이 바이칼 호수로 흘러들어오고, 오직 하나, 이르크즈크 시내를 가로지르는 ‘앙가라’ 강, 바이칼의 무남독녀라 부른다.
붉은 영웅, 울란바토르.
러시아의 붉은 군대를 이끌고 와 청나라를 물리쳤던 몽골의 장군이자 국가적인 영웅 수흐바토르의 명예를 기리기 위하여 붙여진 이름.
몽골은 몽골어로 ‘용감한’
몽고는 우매할 ‘蒙’가 옛 古, 중국사람들의 몽골 비하 표현.
1,565만 평방미터, 인구 250만명, 16번째로 면적이 넓다.
몽골의 전통가옥, 게르Ger, 이동식 가옥.
높이 1.2M의 원통형 벽, 둥근 지붕, 바람의 저항이 적고 여름에는 시원하다.
벽과 지붕은 버들가지를 비스듬히 격자로 짜서 골조로 하고, 그 위에 펠트를 덮어씌워 이동할 때 쉽게 분해와 조립이 가능하다.
무기의 종류에 따라 세계 지배 권력이 바뀐다.
보병이 최고의 전투력일 때는 로마가, 기동력이 최고의 무기였을 때는 몽골이,
비행기와 핵, 미사일이 최고인 첨단무기 시대에는 미국.
몽골의 초원, 여자의 몸매보다 더 아름답다.
몽골의 밤이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는 ‘별빛 바다’라면, 몽골의 낮은 푸른 초원이 끝없이 펼쳐지는 ‘풀빛 바다’
러시아의 모스크바는 1238년 몽골에 정복당해 불바다가 되었다가 1478년 이반 3세 때가 되어서야 해방되었다.
중국 역시 몽골의 원나라에 1368년까지 지배당하였다.
테무진 1167년-1227년,
1206년 몽골제국, 징키스칸, 황제 중의 황제.
단지 10여만명의 기마병.
‘나는 몽골의 푸른 늑대다.
너희는 신의 군대다.
우리의 신인 쾌쾌 탱그리와 시조 불테치노는 항상 우리를 지켜 보고 계신다.
너희에겐 패배란 없다.
나를 따르면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서쪽으로는 러시아, 항가리, 폴란드,
중동으로 간 몽골은 이란, 이라크 바그다드로 들어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압바스 왕조를 무너뜨렸다.
중국으로 가서는 양쯔강 넘어 남송까지 굴복시켰으며,
동쪽으로는 고려까지.
당시 100여만명의 인구에 10만여명의 군사,
탁월한 기마전술과 무기, 신속한 기동력, 그리고 엄격한 규율등.
1245년 로마교황 사절단에게 ‘세계정복선언’
‘해가 뜨는 곳부터 해가 지는 곳까지 하늘이 우리에게 주셨으니 우리는 그것을 정복하리라.’
몽골인들은 텡그리(하늘)의 명령을 받고 태어난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라고 믿었는데,
외국의 군주에게 투항할 것을 요구할 때는 항상 ‘텡그리’의 명령을 근거로 삼았다.
고려에 보낸 서한에도,
‘하늘의 힘에 기대어 내가 하는 말. 우리는 투항하지 않는 사람은 잡아 눈이 있는 자라면 그 눈을 멀게 했고, 손이 있는 자라면 그 손을 없앴으며, 다리가 있는 자라면 그 다리를 분질러 버렸다.’ 고 협박했다.
몽골의 역사를 보면, 역사는 돌고 돈다는 것을 평범한 진리를 알 수 있다.
영원한 지배자도 영원한 패배자도 없다.
역사에서 영원한 강자는 없다.
역사의 흐름에 앞서가는 민족은 언제든지 역사의 앞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것은 진보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
남북이 통일되어 한반도와 중국, 몽골, 러시아가 육지에서 ‘철의 실크로드’로 연결되면, 인터넷으로 세계가 얽혀지는 시대를 맞아 한반도가 인터넷망과 철길의 주조정실이 될 날도 멀지 않게 되었다.
몽골의 역참제도 ‘참’, 40Km 마다.
전령들은 하루에 말을 타고 500Km 씩 달려서 몽골제국의 수도 카라코롬에서 유럽과 중동 지역까지 보름만에 제국의 명령과 정보를 전달하였다.
무력으로 이룬 세계지배가 아니라 첨단기술로 이룬 세계지배는 인류의 발전과 평화에 모두 도움이 되는 진정한 진보의 승리.
몽골어와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갓난아기 엉덩이의 푸른 반점, 몽골반점.
몽골풍과 고려양.
족두리와 옷고름에 차는 장도, 신부의 연지 찍는 풍속, 댕기--몽골풍.
장사치 벼슬아치, 수라,
몽골로 건너간 고려의 풍속, 만두 떡 의복 신발 모자.
초원의 나라에서 사막의 나라, 고비사막.
몽골어로 ‘고비’는 식물이 자라기 어려운 자갈성의 건조지대.
강우량 년 50mm, 그러나 황량한 불모의 땅은 아니다. 자갈이 많은 토지에 지하수가 풍부하다. 그래서 고비사막의 비행장에는 활주로가 없다. 자갈이 많고 지하수가 풍부해 비행기의 바퀴가 흙 속에 빠지지 않는다.
사막의 하늘은 매우 아름답다. 구름들이 기차 위에 내려와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황사가 봄에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이유,
황사의 발원지인 유라시아 대륙의 중심부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있어 매우 건조하고 강수량도 적은데다, 겨우내 얼었던 토양이 녹으면서 부숴지기 쉬운 모래먼지가 많이 생기기 때문.
편서풍을 타고 한반도와 일본은 물론 멀리 알래스카, 하와이 미국 본토까지 날아간다.
‘흙가루가 비처럼 떨어졌다’ ‘한양에 흙이 비처럼 내렸다’ ‘흙비’--삼국사기, 신라 174년, 백제 근구수왕 때 379년, 1550년 조선 명종때.
황사에는 납과 카드뮴 등 중금속과 발암물질들이 들어있어 인체에 해롭지만,
석회등 알칼리성 성분은 산성비를 중화시켜 토양과 호수의 산성화를 방지하고 식물과 해양 플랑크톤에 유리염류를 제공하는 이점을 갖고 있기도 하다.
국제적인 표준궤 열차, 레일간의 폭 1,435mm,
러시아와 몽골은 광궤, 1,520mm,
중국은 표준궤이기 때문에 레일을 바꿔야 한다.
유럽과 한국은 표준궤.
단둥 철교는 단선,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하기 위한 일본의 정책.
만리장성
기원전 7-6세기 춘추전국시대부터 쌓기 시작, 진시황이 통일한 뒤 흉노족의 남하를 막기 위해, 기원전 214년부터 증축하여 연결하기 시작하였다.
동쪽의 압록강변에서 서쪽의 깐쑤성 자위관까지,
6개의 성과 2 개의 시를 가로지르는 6,700Km의 길이,
높이 7-8m, 폭 4.5m, 다섯 마리의 말이 달리고, 열 명의 사람이 함께 걸을 수 있다.
임어당, 린위탕 ‘진시황이 쌓은 만리장성은 이민족의 침입을 거부하는 지리적 폐쇄성’, 성벽문화의 비개방성.
중화사상, 다른 민족을 배척하고 다른 문화를 무시하는 우월의식, 배타적이고 자기중심적이며 폐쇄적인 세계관.
러시아의 다차, 몽골의 게르, 중국의 흙집, 각기 자기네 환경과 풍토에 적응해 가장 알맞은 가옥형태를 갖고 있다.
베이징 근처의 장성, 팔달령 장성, 명나라 때 지은 것으로 외국 귀빈들이 오면 안내하는 곳.
마오쩌뚱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대장부가 아니다’의 비석이 있다.
베이징, 쿠빌라이의 연경, 대도, 마르코폴로의 ‘칸발릭’, 동방견문록 1271-1295년까지 중국을 여행한 견문록, 쿠빌라이 황제를 알현하기도 하였다.
중국 고대의 수도, 시안 또는 장안, 주나라 무왕부터 한나라, 당나라까지 약 1,000년 동안.
쿠빌라이가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긴 것은 몽골 초원지대에서 바다로 나아가기 위한, 대륙의 육지와 바다를 연결하는 기착지이자 운하를 통하여 남북을 연결하는 중심지였다.
몽골족의 해양진출 의지가 담긴 베이징.
베이징에서 발견한 고구려
살수대첩, 을지문덕이 수나라 장수 우중문의 어리석음을 꾸짖는 시, 여수장우중문시, 삼국사기.
신기한 책략은 하늘의 이치를 다했고
오묘한 책략은 땅의 이치를 다했노라.
전쟁에 이겨서 그 공이 이미 높으니,
만족함을 알고 그치기를 바라노라.
신라의 삼국통일은,
애초부터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들인 비주체적 통일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고구려 땅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축소지향의 통일이었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통일이라는 비난을 면할 길이 없다.
우리 민족의 대륙지향성과 진취적 기개가 위축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단재 신채호는 ‘반도덕적 통일은 결코 통일이라고 할 수 없다’고 혹평하였으며,
‘다른 종족을 불러들여 동족을 멸함은 외적을 끌어들여 형제를 죽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 며 외세를 한반도에 끌어들인 것에 대하여 민족 주체적 입장에서 비난을 가했다.
‘역사는 我와 非我의 투쟁이다’
‘이승만은 미국에 조선의 위임통치를 요구한 인물이기 때문에 임시정부의 수반이 될 수 없다.’
광야의 시인 육사를 그리며
죄수번호가 64번, 땅의 역사, 육사.
이육사의 ‘광야에서’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흠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프랑스가 나치로부터 해방된 이후 반역의 역사를 철저히 청산했던 것을 우리는 깨닫고 본받아야 한다.
나치에 부역했던 기업가들은 몇몇 용서하였지만, 문학인등과 같은 지식인들은 일체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그들이 프랑스의 민족혼을 팔아먹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나치를 지지하는 원고지 몇 장을 썼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해진 지식인과, 나치정부의 특혜로 백만장자가 된 기업인이 몇 년의 옥살이로 그친, 엇갈린 운명에서 곧 정신을 호령하는 글이란 결코 돈과는 견줄 수 없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주고 있다.
동시에 민족정기를 훼손한 인물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모순의 파노라마 ‘천안문’
베이징 중심에 위치한 천안문, 남북의 길이 880m, 동서 500m, 면적 44만 평방M,
100만명 수용가능.
명나라 영락 15년(1417년) 건조 시작, 승천문/ 1651년 개수뒤 천안문.
명.청 두 왕조의 정문.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의 상징.
1919년 21개조항으로 이루어진 일본의 요구조건에 반대한 학생들이 천안문에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5.4 운동의 시발점.
마오쩌뚱의 신중국 선포한 곳,
문화대혁명의 횃불이 올려졌던 곳, 이념을 중시하는 紅과 기술을 중시하는 專이 싸우던 현장, 흑묘백묘를 주창했던 덩샤오핑이 유배지로 쫓겨난 곳.
1989년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던 곳,
천안문은 ‘모순의 파노라마’
부활의 새로운 가능성 자금성
명.청의 궁전.
1407년 명의 영락제,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천도하면서, 시작하여 1420년에 완성.
남북의 길이 1,000m, 동서 760m.
서태후(1835-1908), 자금성의 저수궁에 머물면서 청을 지배.
만주족인 서태후는 17살에 궁녀로 뽑혀 자금성에 들어갔다.
청나라 7대 함풍황제의 황귀비가 되었으며,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8대 동치황제다.
함풍황제가 죽은 뒤, 6살 난 아들이 황제가 되고, 서태후는 황태후로서 섭정, 그 때 나이 28살, 그 후 48년 동안 중국을 통치한다.
그러나, 자금성의 정문인 午門의 중간문은 한 번도 들어가지 못하였다. 황제도 황후고 아니었기 때문.
함풍황제의 정식 황후는 동태후라 불리운 ‘뉴구뤼’
황제의 모친은 태후라 불리는데, 정실은 東태후, 후실은 西태후.
오문의 중간문은 황제만 드나들 수 있는데, 황후의 경우에는 황제와의 결혼식 날, 가마를 타고 단 한 번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측천무후 624-705, 서태후라 할지라도 그 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오문을 지나면 9천개가 넘는 방이 있다.
紫禁城 Forbidden City.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아이신줴뤄 푸이 1906-1967,
청나라 12대 황제, 3살 때 즉위, 1908년부터 1912년까지.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이 건국,
1912년 그는 황제의 자리에서 쫓겨났다.
청나라가 세워진지 267년만,
광서제의 동생인 순친왕의 아들인 ‘푸이’, 황제에 오른 뒤 ‘선통제’라 불리었는데,
이 황제제도도 진시황이 시안에서 처음 제정한지 2,132년만에 ‘공화제’로 바뀌면서 끝, 역사 속의 한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
역사의 회오리 속에서 황제였다가 식물원의 정원사로 전락.
광서제의 후계자로 3살에 자금성으로 들어가 내시들과 궁녀들 사이에서 자란다.
1911년 신해혁명 다음해에 궁전과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
중국 내 군사혁명을 피해 텐진으로 도피하고,
일본군의 획책에 넘어가 1934년 만주국의 황제가 된다.
1945년 2차대전으로 만주국이 멸망,
소련의 전범수용소로 송치, 화장실에서 동맥 끊어 자살기도,
1950년 다시 중국으로 이송, 공산정권에 의하여 10년간 재교육을 받는다.
1959년 특사로 풀려나와 식물원 정원사가 되어 자유의 몸,
1967년 10월 사망한 뒤, 베이징 근교 팔보산 공동묘지 인민 납골당에 안치,
1980년 혁명공묘로 이장,
1955년 1월에야, 헤베이성에 있는 청나라 황릉으로 옮겨졌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의 무대, 자금성,
세계적 연출가 장이머우,
1998년 9월, ‘색채로 역사를 서술하고 음악으로 동서양과 고금을 관통할 것’
아랍의 천일야화에서 따온 것,
이방의 왕자 ‘칼라프’는 만주족의 차갑고 쌀쌀맞은 ‘얼음공주’ 투란도트에 반한다.
공주는 자신이 낸 3 개의 수수께끼를 맞추면 결혼하지만 그렇지 못하면 처형하겠다고 선언한다.
1. 그것은 어두운 밤을 가로 지르며 무지갯빛으로 날아다니는 환상이며, 모두가 갈망하는 환상이다. 그것은 밤마다 새롭게 태어나고 아침이 되면 죽는다.
2. 불꽃을 닮았으나 불꽃은 아니며, 생명을 잃으면 차가워지고 정복을 꿈꾸면 타오르고, 그 색은 석양처럼 빨갛다.
3. 그대에게 불을 주며, 그 불을 얼게 하는 얼음이다. 이것이 그대에게 자유를 허락하면 이것은 그대를 노예로 만들고, 이것이 그대를 노예로 인정하면 그대는 왕이 된다.
희망, 불 그리고 얼음공주인 자신, 투란도트.
‘동서양 문화의 결정체’
‘공주는 잠 못 이루고’ 원제 ‘아무도 잠들지 못한다’는 영화 ‘킬링필드'에 삽입된다.
중국역사를 바꾸는 휴양지 ‘베이다이허’
베이징에서 단둥까지 1,000Km, 14 시간.
완만한 해안선과 조용한 물결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
2천년 전부터 진시황 한무제 조조 등, 오늘날 중국 공산당 간부들의 여름 휴양지.
마오쩌둥, 덩샤오핑.
7월부터 휴양 겸 비공식 최고회의가 열리는 3주간은 ‘모든 지도력은 베이다이허에 있다’
이곳을 조금 지나면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하이관.
연암 박지원, ‘만리장성을 보지 않고는 중국이 큰 나라임을 모를 것이며, 산하이관을 보지 않고는 중국의 제도를 알지 못할 것’
산과 바다에 위치에 있다, 산하이관.
한민족의 영광과 굴욕, 독립의 희망과 반역의 물결이 교차하였던 ‘센양’, 심양, 봉천.
1644년, 청의 베이징 천도후 봉천, 중국 공산당 정권이 센양으로, 라오닝성의 성도.
라오닝셩, 지린성 그리고 헤이룽장성.
1625-1644년까지 청나라 수도, 센양.
청 태조 누르하치와 태종의 무덤이 있다.
삼전도의 굴욕, 소현세자 볼모,
척화파 홍익한, 윤집, 오달제 3 학사가 처형된 곳도 센양의 서문 밖.
다까기 마사오, 박정희.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고, 나를 죽여서 국가를 받들겠습니다.’ 혈서,
진충보국 멸사봉공--만주일보
식민지 국가의 장교가 독립된 나라의 국가원수가 된 최초 사례.
박정희는 또 고려무인정권이 붕괴한 1270년 이래 690년만에 제 2의 무신정권 수립.
역사에서 반역은 용납되지 않는다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역사가 흐를수록 독립운동가의 발자취와 친일파의 행적은 ‘조국의 빛’ 과 ‘반역의 그림자’로 뚜렷이 대비되어야 한다.
박정희 기념관에 1940년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반역의 5년 간을 어떻게 기록할려고 하는지?
압록강,
한국전쟁때 미군의 폭격으로 끊어진 ‘압록강 단교’, 우리에게는 비운의 역사를 상징하는 다리이며, 다리의 끊어짐은 한국전쟁의 비참함을 떠올리게 한다.
이셩계가 회군했다는 위화도,
1905년 7월, 가스라 테프트 밀약, 필리핀은 미국이 갖고, 한국은 일본이 갖는다.
8월, 2차 영일동맹, 인도는 영국이 갖고, 한국은 일본이 갖는다.
1931년 9월, 봉천 교외에서 만주철도 선로 폭파, 만주사변.
중국의 55 소수민족 중 몽골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조선족만 조국이 있다.
라이오닝성과 허베이성의 ‘박씨’ 조선족 신청.
회한의 위화도,
한민족 역사에 치명적 상처.
요동지역과 만주지역을 우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성공한 쿠테타는 처벌할 수 없다’의 선례, 권력지상주의.
민족의 이익보다 개인의 정권욕이 현실적으로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와 민족정기와 민족혼을 더럽혔다.
일제 말 수많은 지식인들이 변절하고 반역의 역사에 섰던 것도 ‘역사’보다는 ‘현재의 권력’을 우선시했기때문.
백성의 군대, 민족의 군인보다는 정치군인이 활개치는 선례를 남긴 위화도 회군으로 미루어 볼 때,
박정희의 쿠테타는 어쩌면 정치군인의 역사에서 필연적.
이성계의 명나라의 요동 정벌 4 불가론,
1.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일은 옳지 않다. 이소역대 일불가.
2.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하월발병 이불가.
3. 요동을 공격하는 틈을 타서 남쪽에서 왜구가 침범해올 것이다. 거국원정 왜승기허 삼불가.
4. 무덥고 비가 많이 오는 시기라 활의 아교가 녹아 무기로 쓸 수 없고, 병사들도 전염병에 걸릴 염려가 있다. 시방서우 노궁해교 대군질역 사불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영토전쟁에서 조국에 칼을 들이대는 반민족적 배신행위라는 점에서, 과거 역사 속 군부 쿠데타나 역성혁명과는 또 다르다.
고려정권의 개혁 필요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이것이 위화도 회군을 정당화시키지는 못한다.
애국과 개혁이 모순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개혁을 내세워 회군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역사의 현실에서는 이성계가 승리했을지 몰라도, 역사의 정당성에서는 최영 장군이 승리했다.
무속신앙이자 씻김굿, 무당의 사당에는 최영 장군의 영정이 모셔진다.
민중의 시각에서 원통하고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준다고 믿는 것일까?
민중에게는 ‘주체성의 역사’, 지배층에게는 ‘사대주의의 역사’
사대주의와 식민주의 사관의 폐해, 역사의 왜곡, 단군신화의 격화, 단군상 파괴,
종교의 자유도 중요하지만 자기민족의 뿌리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부정이자 곧 민족이 지닌 존엄에 대한 훼손이다.
사대주의와 식민사관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통하여 역사를 남의 나라의 시각이 아닌 우리 민족의 시각으로 다시 인식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왕이나 대통령등 권력자의 입장에서 보는 것은 협소한 시각이다.
역사는 권력자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민중들의 삶을 통해 끊임없이 계승되는 것이다.
왕이나 대통령을 부정한다고 해서 그 나라의 역사와 민족의 주체성이 결코 부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셩계를 부정한다고 해서 이씨조선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위화도 회군의 반민족성을 부정한다고 해서 조선의 건국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의 조선족과 러시아의 고려인,--재외국민특례법 적용대상에서 제외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나 만주지역에 대한 아쉬움은 과거 우리땅이기 때문에 다시 찾아야 한다는 속좁은 배타주의 때문이 아니다.
그저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는 뜻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그 민족은 죽는다.
조국과 민족보다 자신과 정권의 이익을 먼저 챙긴 지배권력층의 반민족성이 후대에 얼마나 큰 고통을 주었는지를 깨닫자는 뜻이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는 민족, 그들의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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