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서민;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치’아래서 부자보다 숫자가 많은 서민이 정치적 지배력을 갖는다고 했다.
데모크라시 아래 철인정치가 가능하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그래도 그는 소수 부자들이 갖는 부의 힘과 다수 서민이 갖는정치력이 균형을 이뤄 자유오하 평등이 가능하다고 본 듯했다.
그의 전제는 콜롬버스의 달걀만큼이나 간단한 일이다.
그러나 달나라가 지구의 식민지가 되어간다는 오늘날까지 테모크라시가 꾸준히 발전해왔다고 하지만 부자들의 권력은 더욱 집중되고 강화되고 있을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디서 오류를 범했을까?
달걀을 세우려면 폭력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둥근 면을 제거하면 되었다.
현명한 인간은 자유와 평등이 민주적 절차와 선거권에서 온다고 믿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민주적 절차와 보통선거권을 열망했고 그것을 위해 싸웠다.
그러나 그것을 얻은 뒤에도 그런 사회느 오징 않았다.
이 ‘황당한 현실’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일까?
이는 자본주의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본이 국가를 관리, 통제해 노동자의 파업권을 제한하는데 성공한 탓도 있겠지만, 그것만은 아니다.
서민은 서민 전체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지 않는다. ‘서민 나’들은 자본이 주인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의 마름이나 머슴이 되겠다고 다투면서 선망과 경쟁의식으로 ‘서민 우리’를 배반한다.
사회적 약자들의 ‘자신을 배반하는 의식’은 의외로 쉽고 간단하게 형성된다. 동물을 조련하듯 당근과 채찍으로....
성적과 등수 올리기 경쟁이 채찍이라면...‘대한민국1퍼센트’ ‘부자아빠’에 대한 선망과 성공한 연예인이 거머쥔 부에 대한 동경은 ‘99퍼센트의 사람들’에게 던져지는 당근이다.
그 가능성은 로또복권에 당첨되는 확률에 불과하지만, 수많은 서민이 로또에 명운을 걸듯이, 그리고 잠자리에 들 때마다 모두 ‘자기만’ 1등에 당첨되는 꿈을 꾸듯이, 모두 성공 예감으로 뜀박질하도록 내모는 것이 제도교육과 대중매체가 맡은 일이다.
오늘은 세입자의 처지에 있지만 장래에 되리라고 기대하는 부자나 집주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민주정치 제도 아래서 20대 80의 양극화 사회가 관철되는 것은 ‘80’에 속하는 사람들 중 적지않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미래상으로 자신을 일치시켜 오늘의 자신을 배반하는 것도 한몫한다.
모든 나들이 ‘나’만의 행운을 위해 ‘우리’ 모두의 행복을 짓밟으며 살고 있다는 충고는 판도라의 상자에 애당초 희망이 들어있지 않다는 악담이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끝내 죽더라도 싸우다 지쳐 시어질 때까지 살아내야 한다.
-보잘 것 없음;
‘무엇이 되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하는가?’
‘삼성’왕국이 주는 떡값을 받는 마름이나 머슴이 되거나 그에 버금가는 인물이 되기 위해서라고 대답을 하는 청소년은 없을 것이다.
일제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출세를 위해 학업에 정진한다는 의미는 지배계급이 설정한 평가기준에 잘 따른다는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배계급의 충실한 마름이 되어 그 하부에 편입하려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천에서 용난 사람은, ‘개천 사람들’의 이익을 대변할 nt 없고 지배층의 요구에 순응하는 조건으만 출세할 수 있다.
여기서 짚고 싶은 얘기는...한국사회에서 부러워하는 근엄한 지위에 오른 인물들의 보잘것없음에 대해서다.
남달리 형성한 ‘교육자본’을 통해 성공한 엘리트들ㅢ 전형적인 모습이 ‘보잘것없음’이라면 이 사회는 참담할 정도로 보잘것없다.
자유인.평화인.문화인이 가당키나 한가?
검사는 국가의 엘리트들인데 ‘법 정의’의 파수꾼이 되라는 소명을 받은 그들이 삼성왕국이 던져주는 떡값을 받아 챙기고 그 경비견이 되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국가 엘리트들이 자신의 보잘것ㄱ없음조차 부끄러워할 줄 모를 정도로 보잘것없는 것이다.
검사뿐인가. 우리는 국호ㅓㅣ의 인사청문회에서 예외적인 인물을 만나기 어렵다. 부동산 투기나 학군을 바꾸기 위해 대충 위장전입하고, 대충 탈세하고 그것을 관행이라고 천연덕스럽게 말하는 것, 이 땅의 사회귀족들이 보여주는 보편적 모습이다.
마름의 속성은 ‘자발적 복종’에[ 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많은 선 가운데 단 하나의 고결한 선이 있으니 그것은 곧 자유이다.우리가 만약 이것을 잃어버린다면, 곳곳에 악이 창궐하며 남아 있는 다른 선에서도 어떠한 맛과 흥미를 느낄 수 없게 된다. 자발적 복종은 모든 것을 망가뜨리며 자유만이 유일하게 선을 정당화한다.’
오늘 한국 사회의 각 부문에서 출세한 인물들은 자유인이 아니라 지배권력과 맘몬의 신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충실한 마름들이다. 그래야 출세할 수 잇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인들은 대개 불온하지만 한국사회의 경우 그 정도가 더욱 심해 불온하지 않고는 자유인이 될 수 없다.
지배권력과 맘몬의 신을 모시는 신료들은 자신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유인을 억압하며 가학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말은 이렇게 바꿔쓰면 더 좋을 것이다. ‘스스로 보잘것없으려면 출세하ㅣ라’
마름의 좌우명은 ‘한 번밖에 오지 않는 소중한 삶을 기존 체제에 기생하여 그것이 허용한 기름진 생존을 누리며 환호작약하라’쯤 되겠다.
-몰상식;
‘스님들은 쓸데없는 짓하지 말고 빨리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머리를 민 정신 나간 사람들’
‘불교 믿는 나라는 가난하고 하나님 믿는 나라는 다 잘 산다’
다른 나라라면 ‘정신 나간’ 보통사람도 하기 힘든 말들이 한국 목사들의 입에서 나왓다.
‘예수천국, 불신지옥’은 서울 명동거리에서 마주치는 일부 광신자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세상에 엽기적인 일이 참 많지만 가장 엽기적인 일은 엽기적인 일을 엽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다. 한국 개신교의 주류를 차지하는 목사님들의 행태가 그런 예에 속한다.
루소;‘자기가 믿는 모든 것을 믿지 않으면 선의의 인간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와 똑같이 생각하지 않는 모두에게 냉혹한 저주를 내리는’ 불관용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몰상식은 불관용을 낳고 불관용은 제어되지 않을 때거침없이 폭력으로 나아간다. 이 사회에서는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몰상식이 용인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주류를 차지한다.
다른 종교에 대한 불관용이 인류역사상 얼마나 잔인한 살육을 낳았고 집단광기르 불러왔는지...
‘한국과 같은 다종교 사회에서 종교 갈들이 없는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정말 한국사회구성우너들이 유독 종교의 다양성만큼은 존중하는 것이F까?
현상이 본질을 감추듯이 이유는 다른 데 있다.
1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된다는 점. 그래서 어떤 종교도 절대 다수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다./불교22.8 개신교18.3 천주교10.9
2종교의 차이말고도 사상.이념의 차이와 지역의 차이로 편가르기를 할 게 이었기 때문이다.
극우 반공주의와 영남 패권주의는 사상.이념의 차이와 지역의 차이를 차별.억압.배제의 근거로 삼는 강자.다수에게 아주 편리한 무기다.
공자;‘군자는 화이부동’하고 소인은 동이불화한다‘ 군자는 하나로 획일화하지 않으면서 평화로운데, 소인은 별 차이도 없으면서 불화한다.
지상의 꽃들은 스스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뿐 다른 꽃을 시샘하지 않는데, 소인들은 자기와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차이를 찾으려 애쓰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자기와 같지 않다고 시비를 건다.
이 이중성은 남에 비해 자기가 우월하다는 점을 확인하면서 만족해하려는 저급한 속성에서 비롯된다.
자기성숙을 모색하지 않는 사람일수록, 개인으로서 내세울 장점이 없는 사람일수록, 자기가 속한 집단인 국가.민족.종교.지역.혈연.출신 학교를 내세;운다.
자기성숙의 긴장이 없는 사람에게 스스로 우월하다고 믿게 해주는 것은 그의 소유물이며, 그가 속한 집단이다.
볼테르;‘우리들의 부싯돌은 부딪혀야 빛이 난다’ 서로 다른 견해가 표현되어 부딪힐 때 진리가 스스로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견해를, 다르다는 이유로 없애려고 하는 것은 내 견해의 정당성을 밝히기 위해서도 옳지 못한 행위다.
그러나, 사회구성원의 성찰이성이 성숙되지 않고, 긍정적 가치를 공유하지 못할 때, 다름의 관계는 서로 부정하는 관계로만 설정된다.
공익과 진실이라는 목표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이 합리적 논거를 통해 경쟁하는 대신, 서로가 서로를 극복해야 하는 부정의 관계로만 설정되는 것이다.
다름이 경쟁 대상이 되지 않고 오직 극복 대상으로 되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약자와 소수자는 항시 인권침해의 대상이 될 위험에 처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같다’의 반대말인 ‘다르다’와 ‘옳다’의 반대말인 ‘틀리다’를 뒤섞어 사용한다.
‘다름=틀림’의 등식은 한국사회에[서 ‘자유’의 반대를 ‘불안’이나 ‘무질서’로 받아들이는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관철된다.
‘자유’의 반대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억압’이라고 정답을 내놓기도 하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자유의 반대가 마치 ‘불안’이나 ‘무질서’인 양 받아들인다. 그래서 용산참사 사태나 쌍용차 노조 파업에서 보듯이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사회정의와 인권요구를 법과 질서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데 동의한다.
무릇 잘못된 행동이나 발언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있으되 존재에 대해서는 비난할 수 없는 법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성적 소수자들은 소수자라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 배제의 대상이 된다. 그들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라는 사회적 폭력 앞에 노출되어 있다.
아프리카나 동남아등 제3세계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사람일수록 비굴할 정도로 제1세계와 백인을 선망한다.
미국인한테는 마냥 ‘바치기’를 하면서 굶주리는 북한에 대해서는 ‘퍼주기’라고 떠들어대는 모습과 상통한다.
사람은 죽어 누울 자리는 선택할 수 있으나 태어나는 자리는 선택할 수 없다.
유럽인들이 16세기에 같은 하느님의 자식이면서 신/구교로 분연되어 서로 잔인하게 죽이고 전쟁을 일으켰다면, 우리는 20세기에 같은 민족이면서 사상과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서로 잔인하게 죽였고 전쟁을 일으켰다.
20세기 초 유태인 청년은 자고 일어나는 아침마다 ‘아, 난 유태인이야’라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지만, 게르만인 독일인은 자고 일어난 아침에 ‘아, 난 게르만인이야’라고 확인하지 않는다.
아침마다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유태인에게 독일인은 걸핏하면 ‘너, 유태인이지?’라고 말하는 반면에,...‘너, 게르만인이지?’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
한국사회에서는...‘난 서울사람이야’‘난 경상도 사람이야’라고 혼잣말하는 서울사람이나 경상도사람은 없지만...‘나는 전라도 사람이야’라고 혼잣말하는 호남사람은 없지 않다. ‘너 경상도 사람이지’하고 묻는 사람은 없지만 ‘너 전라도 사람이지?’하고 묻는 일은 이따금 일어난다.
‘너, 경상도 사람이짐?’‘너, 전라도 사람이지?’라는 두 개의 질문에 차이가 없을 때는 언제쯤 올까?
소수자는 소수자이기 때문에 소수자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된다.
소수자에게 강요된 ‘자기 돌아봄’은 사회적으로는 천형일수 잇지만 인간적으로는 천혜일 수 있다.
소수자들은 일상적인 ‘자기 돌아봄’을 통해 역지사지를 쉽게 익히지만, 다수자들은 자기 돌아봄도 부족하고 역지사지도 어렵다.
소수자에겐 자기성숙의 긴장이 살아 있지만 다수자는 다수파에 안주함으로써 자기성숙의 긴장은 놓치기 쉽다.
우리는 비교라는 말에 관해 성찰해야 한다.
남과 비교할 때 서로 장점을 주고받기 위한 경우로 한정할 일이다.
나의 우월성을 확인하려는 비교는 멀리 하라는 것이다.
남과 비교하는 일이 아닌, 어제의 나보다 더 성숙된 오늘의 나, 오늘의 관계보다 더 성숙된 내일의 관계를 위한 비교에 머문다면 다수자, 소수자의 구분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2012.5.1.화.노동절.노트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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