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개의 질문;
‘한국의 택시기사들만 불친절한 것은 아니다. 돈 없는 사람들에겐 모든 한국사람들이 불친절한 것 같다.’
‘한겨레신문을 읽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확신에 찬 견해를 가질 수 있느냐’는 황당함이 담겨있다. 내 질문에 택시기사들 역시 황당해한다. 황당함과 황당함이 부딪치는 경우인데, 기사 중엔 백미러를 통해 ‘그런 신문을 왜 보느냐’는 식으로 나를 힐끔 쳐다보기도 한다.
알지 못한 채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것, 택시기사는 자신이 빠진 함정에 대해 인식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한겨레를 읽지않고도 한겨레가 어떤 신문인지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 한겨레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 ‘가까이 할 필요가 없다’는 것으로다. 사람들은 민주노총에 대해, 전교조에 대해 알고 잇을까?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잇다고 믿고 있다. 어떻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을까? ‘알 필요가 없는 것’ ‘가까이 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이미 부정적으로 의식화되어 있다.
2. 회색의 물신 사회
-고향;
‘우리 땅이 나를 부른다’
귀소본능이란...누군가와 비교하고 경쟁하는 관계로부터 비켜나 있다고 기억되는 곳에 안기고자 함.
명절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란...땅을 떠나면서 잃어버렸던 교감을 땅을 매개로 하여 잠시나마 복원하는 데 있지 않을까? 그 때문에 명절이오면 교통 체증을 무릎쓰고 고햐으로 달려간다. 설령 내용은 사라지고 형식으로만 남았다 하더라도.
대학이 산업이고, 종교가 사업이 된 사회에서...
실업률이 10퍼센트를 넘으면 사회 불안을 넘어 ‘사회 폭발’의 가능성까지 있다고 말했던 프랑스 학자들은, 당시 실업률이 25퍼센트에 육박햇던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남부 지방이 어떻게 비교적 안정을 유지했는지 주목했다. 그 나라들은 프랑스에 비해 사회안전망도 허술한데 어떻게 사회가 안정을 유지하는지 의아했던 것이다.
그들의 답변은..그 지역은 핵가족화가 아직 진행되지 않아 가족 이기주의나 개인주의가 발전하지 않았고, 씨족관계와 가톨릭 전통이 상부상조의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지역사회의 안전망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에 모아졌다.]
-탐욕;
나는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다고 본다.
자본주의에 미래가 없는 것은 억압과 착취를 당하는 인간의 자발적 반란때문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때문이라고 전망한다.
자본을 매개로 인간에게 지배당하는 인간의 반란이 아니라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을 인간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때가 기어이 올 것이고, 그때까지도 자본주의는 탐욕스러운 아집을 계속 nflrpT지만 끝내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인간은 전쟁 수행자이고 인간 문명은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자연의 반란은 지배, 피지배 관계를 뒤어넘어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가져온다.
인간은 지배계급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싸우기도 하지만 사라남으려고 굴종한다. 인간이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않고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면 억압과 착취는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 죽는 대신 굴종을 택한다. 인간의 삶은 모진 것이며 인간에 대한 인간의 억압과 착취는 계속 된다.
자연의 인간의 억압과 착취에 굴종하지 않고 스스로 파괴되어 죽는다. 자연이 놀라운 복원력을 가졌다고 하지만 인간의 파괴행위는 속도에 있어서 자연의 복원력을 앞지른다.
그리하여, 자연의 죽음 앞에서 인간은 끝까지 발버둥치겠지만 인간 또한 어쩔 수 없는 자연의 일부이므로 함께 죽을 수박에 없다.
‘우리는 이땅을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후손에게서 빌린 것이다’
오늘 자본주의 사호ㅓㅣ에[서 인간의 탐욕은 통제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오만성과 결합해 ‘정말 이래도 되나’와 같은 성찰적 물음을 멀리 한다. 특히 신자유주의의 시장만능주의는 소비를 미덕으로 하는단계를 넘어 탐욕을 미덕으로 칭송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인간은 이제 다른 인간과 자연을 착취하는데 멈추지않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의 몫까지 착취한다.
마하트마 간디;신은 우리 모두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만 단 한사람의 탐욕도 만족시킬 수 없다./2012.4.25.수.비오는날. 노트정리
인간은 이성을 가진 동물이지만, ‘인간의 탐욕은 인간과 자연 모두의 공멸을 가져올뿐’이라는 성찰이성의 소리는 도구 이성의 소리에 비하면 아주 약하다.
인류가 역사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최첨단의 문명을 자랑하는 시기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전쟁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분명한 것은 인간의 탐욕이 사라지지않는 한 전쟁 또한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탐욕이 사라질 수 없다면 인간의 자연파괴 또한 멈추지 않을 것이다.
거시적으로 역사를 바라볼 때,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전에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자연이 절대 우위에 있었다.
당시의 인간사회를 ‘원시공동체사회’ 또는 ‘원시공산사회’라고 부른다.
당시 인간에게 변화무쌍한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 흔적은 지금까지 남아잇는데 12월25일 성탄절이 하나의 예다. 시베리아와 위도가 비슷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옛 사람들은 겨울이 다가오는 것을 무척 두려워했다. 여로모로 지혜가 부족한 시대였지만 당시 사람들도 태양이 사라지면 생명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태양이 사라지면 뭇 생명이 죽는다. 태양은 곧 생명이었는데 바람에 날리는 가을이 지나고 흰 눈 날리는 겨울이 다가오면 낮은 갈수록 짧아졌고 태양은 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려했다. 두려웠다.
그러다가 동지가 지나면서 태양이 다시 되살아나는 것을 확인한 사흘째 날이 바로 12월25일이다. 일년 중 가장 중요한 축제일로 기념했다.
나중에 그 지역에 기독교가 전파되면서 태양축제일은 성탄절이 되었고 그것이 유럽 전역으로 역으로 전파된 것이다.
자연에 맞서 생존해야 했던 인간에게 배고픔 이상으로 두려워한 것이 또 있었으니 더불어 사는 인간이 줄어드는 것이었다.
벼.밀.옥수수를 발견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힘의 관계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자연의 일부로 자연을 두려워했던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잉여생산물은 인간에게 여유 시간을 주어 문화와 역사를 일으키게 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계급과 소유하지 못하는 계급으로 나누어지게 했다.
잉여생산물은 계급분화를 불러왓고, 노동력을 필요오 하는 경작에는 다른 공동체를 공격하여 손에 넣은 노예를 동원했다.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간이 자연의 일부로 남아있을 때엔 잉여생산물이 없었기 때문에 계급분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도 없었는데,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기 시작하며서 다른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전쟁도 일으키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이때까지도 인간은 자연을 존중할 줄 알았다. 무엇보다 땅에서 잉여생산물이 나왓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후 인간은 더욱 오만해졌다. 시간이 갈수록 땅에서 멀어졌고 옛 사람들이 가졌던 자연에 대한 외경심은 점차 흔적조차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인간의 탐욕은 오만에 비례하여 더욱더 거칠 것이 없어졌다. 탐욕이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와 착취의 뿌리이듯이, 다른 인간에 대한 지배와 착취, 그 최종형태인 전쟁 또한 인간의 탐욕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뿌리는 이제 너무 깊이 박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찌할 nt 없는 지경에 이른 게 아닐까. 아직 태어나지 않은 후손까지 착취하기에 이르렀으니 갈 데까지 간 것이고, 마침내 인간은 자연의 반란 앞에 직면하게 되었다.
천만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인간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희망이 실체를 드러냈다.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이 그것이다.
지금까지 인간은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는 다른 인간의 자발적 반란에 대해서는 전쟁과 탄압으로 억누르고 굴종시켜 왔지만,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앞에서는 속수무책이다. 아무리 오만한 인간이라도 자연에 맞서 전쟁을 벌일 수 없다. 자연과 벌이는 전쟁에서 이긴다는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게다가 자연은 인간과 달리 인간에게 지배당하고 착취당하면 스스로 파괴되어 죽을 뿐 살아남으려고 굴종하지 않는다.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어떻게 끝날까? 자연의 비자발적 반란 앞에서 결국 투항할까. 그리하여 자연을 존중하고, 자연을 존중하듯 다른 인간을 존중하며 더불어 살아갈까. 아니면 끝까지 고집을 부리며 공멸의 길로 나아갈까?
-회색;
서울은 다이나믹하지 못한 사람에게 우울을 강요하ㅓ는 회색의 도시다.
비인간화된 욕망은 물질과 출세를 가치 판단과 평가의 기준으로 삼는다.
과정이 어떻든 성장의 결과만을 중시하는, 회색의 사회가 받아들인 새 원책에 따라 평가한다.
전두환의 카리스마와 의리가 거론되는 것 역시 과정이 어떻든 출세한 자의 비범한 능력이 평가되는 새로운 상식 때문이다.
이처럼 과정이 어떠하고 수단과 방법이 어떠하든 물질과 출세를 획득하는 것이 원칙이고 상식인 사회다.
회색은 배경이 흰색일 때 검은 색이 되고, 검은색이 배경일 때 흰색이 된다.
‘깨끗한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않는다’라는 말로 포장된, 흰색에 대한 이 사회의 부정적인 반응은 내부 고발자나 촌지거부 교사들에 대한 따돌림처럼, 고발에 대한 정서적 반감의 표현이라기보다 자신이 검정으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회색의 사회에 내재한 방어본능의 반영이다./2012.4.30.노트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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