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억명 먹여살리기...1만년 전 이후의 농업 The feedig of the 9 billion; Farming after 10,000 years ago.
아담 스미스의 '자본'; '필요한 경우 미래의 언젠가 사용하기 위해 비축, 저장한 일정량의 노동'
잉여농산물의 축적을 통해 자본의 출현을 가능하게 만든 것은 농없이었다. 농업이 도입되기 전에는 아무도 잉여를 축적할 수 없엇다.
농업덕분에 인구밀도가 높아진 사회들은, 협동.조직화.노동의 분업이라는 잠재력을 더 잘 이용해 많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5.도시의 승리...5천년 전 이후의 교역 The triumph of cities; Trade after 5,000 years ago.
도시가 존재하는 것은 교역을 위해서다. 도시는 사람들이 노동의 분업. 전문화.교환을 위해 찾오오는 장소다. 도시는 교역이 팽창할때 커나간다.
오늘날 사상 최초로 세계인구의 대부분이 도시에 살고있다.
1900년에는 전체인구중 도시민이 차지하는 비율이 15%에 불과했다.
기계화 영농은 인구의 도시유입을 가능하게 했고, 인구의 도시유입 덕분에 가능하기도 했다. 희망고 포부를 안고 도시로 온 사람들도 있엇고,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 도시로 밀려온 사람도 잇엇다. 하지만 모두의 목표는 동일했다. 바로 교역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권력이 제한적이거나(약탈행위가 광범위하게 일어날 정도로 약해서는 안되지만) 공화제로 통치되거나 혹은 쪼개져 있는 편이 노동으ㅟ 분업이 발전하는 데 뭔가 유리한 점이 잇다는 것이다. 강한 정부는 그 정의상 독점체제이기 때문이다. 독점기관은 언제난 현실에 안주하고, 침체하고, 스스로에게(고객이 아니라) 봉사하게 마련이다. 군주들은 독점기관을 좋아한다.
사실, 군주들은 ㄸ고같은 오류에 빠진다. 스스로 발달하도록 놔두고 장려하는 것보다 자신이 계획하고 통제하는 편이 상업을 더 잘 돌아가게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난 1만년간 인류가 치러우ㅠㄴ 위대한 전투는 독점에 대항하는 전투였다'
중국은 세계애ㅔ 유일하게 1950년의 1인당 지디피가 1000년에 비해 낮아진 지역이다 . 그책임은 정확히 역대 중국정부에 있다.
중국이 호시절을 보낸 것은 통일되지않고 쪼개져 있을 땜ㅆ다.
경제가 처음 제대로 번영한 것은 불안정한 주 왕조(기원전1046-256년)때였다.
그 뒤 문화와 기술이 융성한 시기는 서기 220년 한제국이 무너진 후의 삼국시대였다.
907년 당제국이 무너지자 오대십국은 서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이때 중국은 폭발적으로 장대한 발전을 이룩했다.
서기 1000년대 후반; 나침반.도기.화약.차.종이.인쇄분야의 거장들이었다....
1200-1300년대에 고난이 닥쳤다...처음에느 몽골의 침입. 다음에는 흑사병 그리고 일련의 자연재해..그 후 명나라의 전체주의적 통치라는 완전한 인위적인 재난이 덮쳤다.
유럽에서와 달리, 중국의 장인들은 도망쳐서 보다 관대한 통치자 밑으로 들어가거나, 여건이 좋은 공화제 국가에서 일할 수가 없엇다.
(유럽은 반도와 산악지역이 많아서 중국처럼 일통하기가 훨씬 힘들었다...카를 5세, 루이14세..나폴레옹.히틀러에게 물어보라)
로마인들이 한때 유럽통일 비슷한 것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명나라와 똑같았다. 침체와 관료주의였다...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때, 명나라 영락제때와 똑같이...세리의 수가 납세자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유럽은 그후 서로 싸우는 국가들로쪼개졌다..그래서 유럽인들은 언제나 달아났다..때로는 잔인한 지배자를 피해 도망쳤다...이탈리아인 콜럼버스는 포르투칼를 포기하고 스페인의 문을 두드렸다..
도시의 절정기;
인도의 농촌 젊은이들이 뭄바이에 끌리는 것은 돈때문만은 아니다. 자유때문이기도 하다.
세계인구의 과반ㅅ가 자급자족적 가난을 벗어나 교환을 기반으로한 삶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잇다는 것은 경제적 진보의 척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