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2.7.수. 독서노트 ‘아직 오지않는 날들을 위하여’ 3;
ㅁ.기회; ‘죄송해요 늦으셨습니다.’
-판매완료, ‘죄송해요 늦으셧습니다’ 재능을 타고났다는 정도의 운으로는 충분치 않다. 운이 따르는 재능도 있어야한다.
-우리가 잡지않은 기회들,..조건법 과거형 ‘~ 했더라면’ 나르시스트는 원래 약속은 좀 늦어야한다는 것으로 생각한다..그는 주위사람들을 짜증 나고 초조하게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이 일부러 기다릴 만한 존재임을 확인하곤 한다. 그는 약속을 자주 미룸으로써 자기를 향한 남들의 애착을 느끼고자 한다…유럽남부애서는, 대체로 약속에 15분쯤 늦어도 ㅓㄴ혀 문제가 되지않는다. 오히려 약속시각을 너무 정확히 지키면 요령없는 사람, 문화적인 이해가 부족한 사람취급을 받는다.
-필멸자의 시간; 우리는 그저 언젠가 죽어야할 존재들이다. 우리는 늘 나중에야 깨닫는다. 조짐이 있었다는 것도 나중에야 안다…미네르바 올빼미(지혜의 상징)는 황혼이 내려앉은 후에야 날아오른다.
후회는 피할 수 없는 만큼 무익하다…다시 붙잡기엔 너무 늦었다…이제 와 내가 뭐해, 겁쟁이는 그렇게 말한다. 20세든 80세든 하면 된다.담대함이란 돌이킬 수 없는 숙명에 지지않는 것이므로..
간발의 차로 비행기를 놓쳣는데 그 비행기가 이륙후 탑승객 전원이 사망햇다..이걸 행운이라고 생각해야할까, 끔찍한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해야할까?(사고가 날지 모르니 앞으로도 예약해놓은 비행기는 보내고 다음 편을 탈까? 편집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원래 비행기를 놓치고 그다음 비행기가 사고를 당할지도 모른다고 할 것이다.
냉소적드로 말하면, ‘자유의 나무는 수시로 애국자와 독재자의 피를 먹고 다시금 무럭무럭 자란다…평화는 때때로 무력갈등을 거쳐 더욱 공고해진다…문명이 성장하려면 늘 위협적인 야만이 마치 산소처럼 필요하다.
-아직도 춤을 추고자한다…카이로스, 그리스인들은 행동에 나서기 적합한 순간, 너무 늦지도 않고 너무 이르지도 않은 시기, 시간의 틈새 속으로 파고드는 기술을 ‘카이로스’
행동력이 있는 사람만이 직감에 힘입어 순간을 잡고 버틸 수 있다…그들은 사건을 잘못 해석했고, 그 사람만이 남들이 눈뜨고도 보지못한 기회를 보았다…기회는 언제나 일종의 선택, 우연이 내민 손을 잡느냐 마느냐에 달려 있다.
죽음이라고 예외일까, 세상을 떠나는 것도 때를 잘 타야한다. 너무 이찍 죽거나 너무 늦게 죽으면 곤란하다.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날에 죽거나 다른 유명임과 같은 날에 죽는 것도 안 좋다.
-내세라는 백지 위에; 네가 아직도 인생을 새롭게 살 ㅜㅅ 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죽을 날이 가까워지면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다..생물학적 생존에는 궁극적 가치가 없다. 자유와 존엄이 더 중요하다…자율성, 세상을 다른 ㅏ람들과 더불어 사는 능력이 사라지면 먹고 자고 숨 쉬는 것이 고문처럼 괴롭다. 그러면 사라질 때가 된 거다. 할 수 있는 한 우아하게, 세;상과 작별할 때다…
그는 삼페인 한 잔, 담배 한 개비를 마지막으로 즐긴 후 침대에 누워 평온한 분위기에서 마취제와 독극물 주사를 맞았다…벨기에는 환자의 의식이 명징한 상태에서 ‘숙고한 후 자지의지로’ 요청하는 경우 조력자살을 법으로 허용한다.
ㅁ.한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나는 늘 삶이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무릅써야 할 위험이라고 생각했다. 그 전적인 위험을 마주한 상태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능력은 사랑과 거룩함뿐이다.
-이게 나인 걸 어쩌겠어…진정성, 다시 말해 근본적인 나다움은 관습에 우선한다. 진정성은 변덕이라는 낡은 단어, 국왕의 입에;서 나오는 ‘짐의 뜻’을 현대적으로 고상하게; 부르는 단어다.
지고의 가치는 나를 초월한 ㄱ;ㅔ 아니라, 내 안에서 확인하는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이제 무엇이 ‘되는게 아니요, 매 순간 존재해야 하는 바로 그것이다…나는 기탄없이 내 성격, 내 감정, 내 기분대로 해도 된다. 우리는 언제나 편의상 자아라고 부르는 그 무엇이 된다. 자기로서 사는 편안함에 자기일 수 밖에 없는 불편함이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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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9;.금. 독서노트 ‘아직 오지않는 날들을 위하여’ 4;
-.자유의 세 얼굴; 모든 사람이 자기
뜻대로 살아갈 권한인 자유는 반항, 구속, 고독이라는 세 단계를 거친다…..그러다가 자유는 책임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확인할
때가 온다. 자유는 행위의 결과를 감당하는 것이다.
-미지를 향해 문이 열리고;
-왼전히 성공하지느 말라; 인생에서 성공을 거두면 그 다음에느 무엇이 있을까? 자신의 영광에 드러누워 잠들면 도ㅜ리까? 인생은 50쯤 정상을 찍고 그다음ㅂ무터 석양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슬슬 내려오는 걸까?
내 안에는 늘 복수하고 싶어하는 패가자 있다..성공한 삶보다는 자기를 실현하는 삶이 중요하다.
-안 되는 거는 안 되는 거다; 지상의 삶은 매순간 완벽하거니와 매 순간 완성되낟…현실은 옹색하나 가능성은 광대하다…자기 역할을 하고, 자기 이야기를 하고, 자기 방식대로 세상에 반응해야 한다. 사랑하고 일하면서.
ㅁ.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각 개인에게 죽음은 큰 사건이고 비록 다 알고 동의햇다 하더라도 부당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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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2.11.일. 설날+1, 독서노트 ‘아직 오지않는 날들을 위하여’ 5(,끝)
1.어젯밤 ‘아직 오지않은 날들을 위하여’,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잠이 들었다. 낮에 소파에서 모르는 사이 낮잠을 자서 밤잠을 설칠까 걱정하엿는데 의외로 숙면을 한 모양, 아침 7시30분
쯤 일어났다. 우싸우사.
초록여사는 아침일찍 밥을 해놓고 아마도 대중목욕탕으로 가서 그동안 피로들을 푸는 모양이다. 나는 거실 티브를 켜고 피지에이골프를 보다가 아침뮤스를 보다가, 무엇하나 딱 끌리는 것이 없어서..그러면 아침밥을 간단히 ajrdjqhwkgkud….해놓은 밥과 만들어놓은 돼지볶음을 곁들여 냠냠..그리고 막커피.
그러고도 크게 해야할
또는 하고싶은 일이 떠오르지않아서 빈둥빈둥하다가 또 소파에서 잠의 유혹속으로…얼마를 잤을까 30분? 초록여사가 목욕탕에서 돌아왔는지 둘째아들이 늦잠에서 깨었는지 두런두런 소리가 들려 나도 짧은 소파잠에서 깨어났다.
초록여사가 사온 새끼귤을 까서 먹고..아들이 내려준 커피를 또 마시면서..이제는 무엇을 할까 마땅히 할일이 역시 없으니, 그러면 그 독서노트 끝편을 써보자 하였다.
(그 전에 나의 노트북콤퓨터와 아들의 콤자판이 먼지 가득하여, 물휴지로 번지를 하나하나 제거해보았다. 훨 깨끗해졌다얏호)
2.서리풀산책 둘째날;
-점심을 먹고나서, ‘아직 오지않은 날들을 위하여’의 남은 부분 독서노트를 마저 ㄲㅡㅌ내기로 하였다. 금방 끝날 것이라 짐작하였는데 의외로 길어졌다. 내가 욕심이 생겨서 밑줄 친부분만 간단하게 그래도 노트하면 될 것을, 욕심이 나니 그 앞.뒤부분을 더 챙겨서 옮기다보니 많아지고 길어졌다.
-노트 마무리하기가 늦어져서, 집에서 3시가 넘어서 서리풀로…서리풀길은 여전히 질퍽질퍽 그러나 서울시내에 걷기에 좋은, 이만한 곳이 어디있을까보냐. 나는 정말 축복받은 사람 아닌가.
어제는 물통을 가져오지안g았지만 오늘은 물통을 챙겨서, 그때그대 물을 마시면서 jrfdjTek. 물을 마시고 입안에 물을 머금고 걸으면, 코로 숨쉬기하는 것을 습관화할 수 있다. 호흡은 입으로 하지않고 코로 하면 무엇이 좋을까 딱히 뭐가 좋을지 모르겠지만 코로 숨을 쉬어 버릇하면 입안이 마르지않으니 이것만은 좋을듯하다.
할아버지 쉼터에는 어제보다는 더 많으 사람들이 왔가갔다 하였다. 나는 언제나 3라운드 몸풀기를 하지만 오늘은 1라운드만 하기로 하였다..늦게 온 것도 있지만 어제 처음 몸풀기하여서인지 뱃가죽쪽이 아파서 무리하지 않기로 하였다…독서노트끝내면서 늦었으니 서리풀산책을 아예 생략할까도 생각하여보았지만, 늦었으니 가지않은 것보다는, 늦었지만 그래도 가는 것이 낫고 또 뱃가죽이 아프니 하지않는것보다는, 3번을 그래도 1번으로 줄여서 하는 것이 더 나을것이었다.
무슨 일이든 핑계를 대면서 하지않기는 쉽지만, 핑계를 멀리하고 그래도 계{속하는 것이 다음 일을 계속해나가는데 매우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경험상 잘 안다. 이를 지키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나의 발전이 달려있다.
가까스로, 그래도 오늘 해야할 일, 특히 서리풀산책 이틀째를 마치게 되어 참 다행이다. 역시 나는 무엇이든 마음먹은대로, 뜻하는대로꼭 실행해나가는 매우 좋은 습관을 가졌다는 것이 오늘 또 증명되었다.
오늘은 내 남은 삶의 첫날이면서, 아직 오지않는 날을위하여, 내가 할수 있는 모든 것을 하였으니 나는 오늘도 행복한 사람이다.
==독서노트 ‘아직 오지않는 날들을 위하여’ 5(끝)
ㅁ.죽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죽는다. 하지만 각 개인에게 죽음은 큰 사건이고 비록 다 알고 동의햇다 하더라도 부당한 폭력이다.
-죽음을 각오함으로
써 죽음과 화해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죽음은 우리가 티끌로 돌아갈
때가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죽음은 협상 가능한 상대가 아니라 하루도 빠짐없이 우리의 활동과정을 부식시키는 냉혹한 법칙이다. 죽음과는 임시로 휴전 맺는 것만 가능하다. 생은 죽음에 저항하는 힘들의 총체다.
죽음은 생을 더 잘 되살리기 위해 파괴하는 힘들의 총체다…우리는 지워질 것이요, 그로써 다른 이들이 세상에 나타날 것이다.
-죽음의 죽음; ..죽음의 신아라는 저 평등주의자. 죽음을 생각하면 정말 화가 난다. 죽음이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별을 헤다가 시냇물에 빠진다.
-오디세우스의 역설; 그는 이타카로 돌아가는 길에 난파를 당하낟. 님프 칼립소는 그를 구해서 보살펴주고 사랑해주었다. 오디세우스는 7년간 칼립소의 애인으로 산다. 아리따운 수호자는 그에게 붋멸을 선물로 주었다. 하지만 오디세우는 허구한 날 바닷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향과 가족을 그리워한다. 그는 매일 밤 그를 잠자리 상대로 삼는 칼립소가 지긋지긋하다. 여신만큼 아름답지 않아도 페넬로프가 더 그립다. 고향과 그곳 사람들이 보고싶다. ..익숙한 것의 매력이 낯선 곳의 유혹보다 질기다…제우스는 오디세우스를 측은히 여겨 헤르메스를 zkfflqa소에게 보내 그를 고향으로 보내주라고 권한다. 오디세우그가 나흘에 걸쳐 뗏목을 완성하자 칼립소는 그를 향유로 목욕시키고 식량을 마련해준다. 망망대해로 나선 오디세우스는 무서운 폭풍을 만나지만 천신만고끝에 결국 고향에 도착한다.(1..오디세우스는 칼립속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언젠가 끝날 수 밖에[ 없는 삶, 제한된 삶을 더 좋아한다…칼립소 또한 필멸의 인간, 생의 덧없음을 사랑하는 불멸의 존재라고 볼 수 ㅇ lTek. 호메로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 이야기는 심오하다 못해 심란하다…2눈에 보이지 않으며 어디에나 있는 신들은 영생을 누리지만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질투한다…예수 그리스도 역시 인간의 육신으로 태어남으로써 그의 사랑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그로써 영원의 위대함과 육신을 가진 이들에게 부여된 시간의 가치를 동시에 입증하지 않았는가? 십자가에 매달려 흘린 눈물은 인간의 뜨거운 눈물이었다.]
-신이 자기 위치에 싫증이 나서 세상을 만들었다면? 신은 피조물에게 온 힘을 다해 천국에 들어오라고 권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들과 사랑에 빠지지 않았나? 신의 전능이 그의 약점은 아닐까? 인간의 의무는 신이 죽을 수 있도록 돕는 게 아닐까?
-에덴동산의 즐거움도 덧없는 인간의 운명만큼 즐겁지늠 못하다..영원이 있다면 우리가 사는 이곳 여기가 영원이다.
=죽을 수 있다니 운이 좋기도 하지; 사망은 구원 아니면, 영원한 벌로 가는 좁은 문이었다…보잘 것 없는 지상의 재물을 버리고 더 귀하고 영원한 것을 얻는다는 희망도 있었다. 대속을 생각하면 끔찍한 공포를 조금은 달랠 수 있었다.(그리스도교가 재창조한 영원 관념의 독특한 점은, 비참하기 그지없는 한사람 한사람에게 중요한 자리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나라는 개인이 지상의 삶 이후에도 존재한다니, 실로 놀라운 소식이다.
=’마크폴로스 사건’, 체코의 작곡가의 오페라; 16세기에 태어난 가수 에밀리아 마크로폴로스는 마법사의 실험대상이 되어 불로불사의 영약을 마셨다…3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젊고 매력적이며 아름다운 목소리 또한 그대로인 그녀는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생에 싫증이 난다. 주위 사람들은 다 그녀보다 일찍 죽거나 그녀이 방약무도한 태도에 질려서 떠나버리낟. 에밀리아는 사물들과 그림자들 사이에서 아무 애착도 없이 살아간다…자식들 친구들도 그녀에게 무관심하다…에밀리아는 주위의 평범한 인간들에게 ‘당신들은 다 죽을 거야. 운이 좋기도 하지’ 라고 말한다. ‘오, 주여, 어둠의 문을 열어주소서. 제가 그 문으로 사라질 수 있도록.; 죽음이라는 지평이 없는 삶은 기나긴 악몽이다. 모든 종류의 권태를 통틀어 보더라도 불멸자의 권태는 최악이다..불멸자는 영원한 벌을 받는 자다.
=다시 보지 못할 것을 사랑하라;
-프로이드가 젊은 tldlsa(릴케?a)과 어느 산에 올라 경치를 보면서 대화를 나누다가 계절의 변화를 언급했다…시인은 이토록 아름다운 경치가 겨울에는 흔적조차 남지않고 사라진다 생각하니 전혀 즐겁지 않다고 말했다..시인은 하염없이 감탄하고 싶은 것들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점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였다..프로이드는, 덧없음이 가치를 더해주고, 아름다움과 완전성은 계속 가지 않기에 귀하다고 반박한다..’하룻밤밖에 피지않는 꽃이 잇다면 그 꽃은 한층 더 화려해 보일 겁니다’’
릴케는 만물의 무상함에[ 우울해하지만 프로이드는 소멸하는 것의 환희를 찬양한다…우리를 포함해 그 무엇도 사라지지않는다면, 삶을 견딜 수 없을 테고 영원은 소멸만큼 끔찍할 것이다…지속되지 않는 것에는 통렬한 위대함이 있다.
=죽지 않을까 두렵다;
-건강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들에게는 죽지 않으려 발악하다 사는 법을 잊어버린다는 반작용이 돌아오곤 한다…접시가 가벼울수록 명줄이 길어진다? 100세까지 그저 생존하기 위하여 진짜 삶을 스스로 금한다?
-수명 연장에 정신이 팔려 그 연장의 의미를 묻지 d낳고 자기도 모르게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다. 키케로의 말마따나 ‘짧은 생도 충분히 아름답고 좋을 수 있을 만큼은 지속된다.;
-우리는 100세 넘게 장수한 이들에게 도대체 비결이 뭐냐고 눈을 빛내며 묻는다..그들의 대답은 늘 비슷비슷하다…많이 웃고 잘 먹고 많이 마시고, 왕성하게 사랑하고, 담배도 피우고, 아무것도 금하지 않았다나..나하고는 정반대라는 생각에 마음이 점점 불편해진다…주치의가 나한테는 그것들을 당장 끊지않으면 올해를 못 넘길지도 모른다고 했는데??? 이 사람들은 뭔데 나에게는 금지된 것들을 누리고도 이렇게 잘만 살지? 어떤 사람들이야?
-양자택일의 문제다, 무미건조한 삶을 오래오래 살 것인가. 진짜 부딪히고 느끼는 시간의 충만함을 누릴 것인가..오래 살면 점점 쇠약해진다는 위험요소가 있다. ‘나는 왜 몸에 나쁜 담배를 계속 피울까? 죽지 않을 까봐 두렵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가수 세르주 갱스부르가 네 번이나 심장마비를 겪고도 끝ㄲㅏ지 하루 두 갑엣허 다섯 갑의 담배를 즐겼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결국 1991년에 일어난 다섯 번째 심장마비가 그를 데려갔다.
=우리 안의 좀비; 영화 속의 좀비는, 자기가 살아있다는 걸 모르는 죽은 자다. 현실의 좀비는 자신이 죽었다는 걸 모르는 산 자다. ‘그 사람 아직도 살아 있어? 난 진작 줄은 줄 알았지!’ 그들은 동시대인들에게 이런 잔인한 말을 끌어내곤 한다.
-사건이 아니라 소식일뿐.
-현재보다 과거가 거 무겁게 느껴질 때가 온다. 그 무게가 얼마나 큰지 무거운 짐꾸러미 내려놓듯 내려놓고 싶어질 것이다.
-늙은 아이와 젊은 노인; 모든 세대는 이전 세대를 상징적으로 살해하고 일어나기 마련인데, 요즘 아이들은 대부분 이 특혜를 박탈당햇다.
ㅁ.영원; 불멸의 필멸자들..너에게 닥치는 일이 네 뜻대로 닥치기를 기대하지 말라. 만사가 일어나야 하는대로 일어나기를 바라는 자는 행복할 것이다.
=병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
-파스칼이 보기에 질병은 신이 보내는 신호요, 아픔을 참고 견딤으로써 조물주와 다시 가까워지는 방식이다..그러니 시련을 준 신에게 감사해야한다. 질병은 신이 가장 충성스러운 백성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낭만주의는 각각의 병을 예술저 영감의 전주곡 수준으로까지 격상시켰다..보들레르와 모파상의 매독, 도스토에프스키의 간질, 프루스트의 천식, 루소나 카프카의 우울, 프리츠 조른의 암이 그랬다.
-건강한 자들은 아직 자기가 병든 것을 모르는 환자들이고 병자들은 이미 자신에게 병이 있다는 명철한 의식이 있기에 치유를 생각할 ㅜㅅ 없다. 정상과 질병의 경계는 흐릿하다.
-이런 격언이 있다. 50세가 넘었는데 아침에 일어날 때 어디 아픈 데가 없으면 당신은 이미 죽은 거다. 통증은 살아있다는 증거다. 몸뚱이가 삐꺽대고 항의하고 화를 낸다..
=고통의 위계;
-어디서 들은 말로 환자가 되는 사람들도 있다. 떠들썩한 소문이 도는 병, 가장 친한 친구의 병이 다 자기 병이다. 다른 ㅏ람이 걸린 병이면 나도 걸리겠지….
자기가 걸린 병은 잔뜩 띄우고 다른 사람이 겪은 시련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은 웬만한 환자는 자기 앞에서 명함도 못 내민다고 생각하는 절망의 귀족계급이다…질병으로도 귀쪽계급과 평민이 나뉜다.
-남의 건강문제를 유독 꼬치꼬치 캐묻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호 기심은 수상쩍ᄃᆞ. 그들은 우리가 아파하는 모습을 좋아하고 우리가 팔팔하고 잘나갈때는 싫어한다.
-우리는 어떤 의사를 선호할까? 우리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크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 주는 의사다….우리는 안도하며 진료실에서 나오고, 그러다 어쩌면 의사가 오진을 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에 빠지기도 한다…고통받는 자에게 불안은 끝이 없다..불안은 그의 나날을 극적으로 만들고 입체감을 더해주기게 없어서는 안 된다.
-끝이 두렵기에 우리의 하루하루는 더 환하다…비극적 낙관주의가 탄생한다…우리는 겸허하지만 결연하게, 결코 무릎 꿇지않겠다는 각로 불행을 상대하ㄴ다. 현대인은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자신의 고통에 반항하는 주체다.
=초라한 위안;
-나는 죽을때까지 살고싶다.
-낙담케하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라. 최악을 상상하면 눈 하나 깜짝하지않고 그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세네카는 시리아를 정복한 로마 장수 파쿠비우스의 예를 든다. 그는 늘 그날 밤 죽기라도 할 것처럼 장례 만찬을 즐기고 술을 마신 후 자기를 장사지내게 했다…이 장수가 단말마의 고통을 흉내 내면 손님들은 박수를 치며 즐거워 gotgek. 그는 죽음을 연습한다는 핑계로 폭음과 폭식을 즐겼다..
-예방 차원의 불안은 도착적 낙관주의의 한 형태다.
-앞으로 닥ㅊㅣㄹ 나쁜일을 세세하게 상상한다고 해서 정말로 대비가 될까? 예측한다고 비탄이 완화되지는 않는다. 불행한 일이 닥치면 우리는 그저 정신없고 황망할 뿐이다.
-식물 아닌 식물상태가 죽음보다 더 잔인하다..그 상태는 두려워함이 마땅하다…오늘 날 정말로 무서운 것은 신체와 정신의 기능을 하나하나 잃으면서도 남의 도움을 받아 병원 침상에서 생존하는 삶이다.
=망나니 양반,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정말로 인생을 충만하게 ‘살만큼 살면’ 편안한 마음으로 죽을 수 있을까? 살 만큼 살았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오히려 개동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들 한다…어떤 이들은 죽음이 생의 사건일 수 없다고 본다..’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은 죽음이 없고, 죽으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죽음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중에, 우리가 먹는 양식 속에, 우리가 죽지않기 위해 먹는 약 속에까지 있다..그 이유는 죽음이 생의 원천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죽음이 온다는 것은 어찌 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종교와 철학이 아무리 너그러움을 발휘한들 죽음의 공포를 가리지는 못하낟…우리는 언젠가 무대에서 퇴장할 테고 잔치는 우리 없이도 계속되리라. ‘아주 컴컴한 그 문턱에서는 현자도 가련한 고아일 뿐이다’
-오 제발! 망나니 양반, 조금만 더 기다려주시오. 그런 순간에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15분 남짓한 시간이 온 우주의 보화보다 더 값지고 소중하게 느껴지는 날은 오고야 만다’
=영원은 지금 여기에;
-죽음은 새로운 세대의 탄생을 마련한다는 점에서 출발의 수호자, 다양성의 ㅂ ㅗ호자다. 탄생의 은총에는 그것을 가능하게 한 죽음의 숙명이 따른다. 헤겔은 이 섭리를 ‘아이의 탄생은 부모의 죽음이다’라는 인상적인 표현으로 요약했다.
-생은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요, 번성하는 자손들을 통해서 영속되기를 원한다.
-있을 법하지 않은 천국을 추구하기 보다는 이승에서 몇 번이고 거듭나는 역량으로 불멸을 생각하면 어떨까?
-불가론자인 우리를 지탱해주는 놀라운 불꽃은 생이 끝날 때 오는 해방이 아니라 지금 여기, 소박한 일상의 산문 속에 있다는 믿음이다..영원은 지금 이 순간의 우리 삶이다. 다른 영원은 없다.
-나의 죽음은 당연히 끔찍할 것이다..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보다는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들을 전부 다 떠나보내고 나 홀로 이 세상에 남아 있고 싶지는 않다..나의 죽음은 잔혹한 공식 사실이다..’오래 산다는 것은 많은 이들을 먼저 보내는 것’/괴테. 우리에게 허락된 것은 찰나의 영원뿐이다. 사랑하는 동안, 창조하는 동안 우리는 불멸이다…생이 언젠가 우리를 떠나는 jrt을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다음 세대에게 희열을 넘겨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충분히 생을 사랑해야만 한다.
=놀리적 ㄱ ㅐ소리를 피하느 위로의 기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위로에는 2가지 함정이 있다…형식적인 말이 되어버리거나 논리적인 개소리가 되느 것이다.
로마 철학에는 고결하고도 비장한 위로가 넘쳐난다…가령,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더 끔찍한 일일 수도 있었는데 그만하기를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논리가 그렇다…한쪽 손을 잃었다고? 팔이 통째로 잘려나가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라..상실을 획득으로 바꾸고, 악재를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로 상상해야한다.
-세네카는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마르치아을 이렇게 위로한다..아들이 그대로 덕행의 길에서 충분히 오래 살다가 갔으니 기뻐할 일이다…아들이 더 오래 살았다면 방탕에 ?빠졌을지도 모르고, 감옥에 갔을지도 모르고..유배를 가거나 자결을 명받았을지도 q모른다….
-허구적인 고통을 들먹이는 자들은 슬픈 시늉도 거의 하지않는 상조회사 직원들 만큼이나 마음에 닿지 않는다.
-‘신께[서 주셨으니 신께서 거두어가심이라’; 종교는 여전히 고통과 죽음을 변모시키는 시스템으로서 비견할 상대가 없다…집단은 종교을 통하여 구성원의 상실에서 의미를 찾고 산 자들이 너무 힘들지 않게 지탱한다…
-그 예외적인 불행이 시간이 흐르면, 평범한 불행이 되고 자연의 섭리에 들 수 있어야 한다..’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일은 누구에게든 일어날 수 있다.’ 개별 사례는 그렇게 인간 조건의 일반성으로 녹아든다.
-위로하는 자는 상대의입장에 서서 상대가 불가피한 일을 받아들일 수 있게끔 도와야 한다…관습은 가혹하지만 부인할 수 없다…애도의기간이 규칙으로 정해져 있는 사회들이 많다…소득없이 괴로워하는 시간은 집단의 처방으로 끝을 내주는 것이 중요하다.
-슬픈 마음은 사회 질서와 다시 조화를 이루어야하낟…그 질서가 개인적 회한을 차츰 억눌러준다..가만히 귀를 기울여주거나 마음껏 슬퍼할 수 있게 내버려두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돕기에 충분한 때가 얼마나 많은가..위로하는 분야에서 가장 섬세한 배려는, 상대가 스스로 날개를 펼 수 있을 때까지 그냥 곀을 지키면서 넉넉한 애정으로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다.
ㅁ.에핖로그; 사랑하고, 찬양하고, 섬기라.
-젋고 예븐 여성과 함께 차를 타고 가던 46세의 남성이 샞벽 2시까지 문이 열린 담배가게에서 잠시 차를 세웠다. 그는 밤새 동안 죽어라 달렸지만 쫓아오는 한무리들에게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레고라라는 남성은 노인이 되어있었다…우리가 기성세대를 바라본 경멸반 연민반의 그 눈빛으로 다음 세대가 우리를 바라볼 날이 언젠가 온다. 이것이 뼈아픈 교훈, 마침내 돌아온 부메랑이다..우리는 우리가 옛날에 멸시했던 바로 그들이 되었다…
-성장이 나를 긍정하고 주장하는 것이라면 노화는 비틀거리는 것이다…꿋꿋이 살아왓다는 사실이 나를 소유자로 만들어주기는커녕 내게서 소유권을 빼앗아간다. 나는 지난 세월을 박탈당하엿다. 마치 그 나날이 쌓이면 쌓일수록 마이너스가 되어 내 존재를 축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지난 세월은 보물처럼 모이지 e않고 되레 나의 빚으로 기록된다.
-삷은 증여인 동시에 채무다…신께서 우리에게 내리는 부조리한 선물이자 우리가 이웃에게 진 빚이다.. 하지만 삶의 빚은 그들에게 상환할 게 아니라 감사한 마음으로 인정하고 후손에게 또같이 베풂으로써 갚아야 할 ㅓ것이다.. 빚 청산의 날은 생을 청산하는 날, 우리가 더 돌려주거나 선사할 것이 없으므로 죽음으로써 산 자들의 먹이가 되는 날이다.
-생은 우리 이전데도 있었고 우리가 떠난 후에도 계속 될 것이다…우리는 지나가는 사람들, 생을 받았다기보다는 잠시 빌려 사는 사람들이다..우리에겐 생의 이용권만 있고 소유권은 없다..나이가 든다는 것은 으레 생각하듯 의무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늘어나는 것이다…오래 살려면 새로운 의무를 질 각오부터 해야한다. 자유는 느슨한 풀어짐이 아니요, 책임의 증대에 더 가깝다..자유는 우리 어깨를 가볍게 해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름없는 티끌이 되어 우주 속으로 사라질 테지만 그건 서러워할 일이 아니다..오히려 그 반대다..
-흐르는 시간을 저주하기 보다는 열정적으로 이 시간에 동조하는 편이 낫다. 그러니 마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은 사람처럼, 70세, 80세에도 황금기를 추가로 더 받아낸 사람처럼, 자기 신체와 정신과 애정에 허용된 능력 이상으로 살아야 한다…우리가 어릴 때 배운 거라곤 딱 하나밖에[ 없다..생을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값지다는 것…호기심 잃지 않고 체념도 하지 않은 채 살아갈 때만 자유롭다..
-애일 아침, 받은 바에 감사하면서 입 밖으로 소리 내어 ‘고맙습니다’라고 말하자. 당연히 받았어야 했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이 터무니 없는 은총이 감사하다…2024.2.11.설낢+1에, ‘아직 오지않은 날들을 위하여’, 독서노트하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