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김치제조용 ‘멸치액젓=Fish sauce’ 시험수입,...나의 최초회사 ‘비공식적 Park Trading Co.'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1. 2. 17:15

/김치제조용 ‘멸치액젓=Fish sauce’ 시험수입, ‘비공식적 Park Trading Co.'

또다른 길인, 내 사업을 하는 것도 검토한 결과...내가 당장 해태상사를 떠나 바로 사업을 하기에는 너무 위험부담이 크니, 시험적으로 몇가지 품목을 시장에 내놓고 그 반응을 본 후, 다시 결정해보기로 하였다.

그래서 선택된 품목이 태국산 ‘멸치액젓’이었다. 이미 미국 한인사회에서 호평을 받은 바 있었으니 한국시장에서도 환영받을 것으로 보고, 최소수량을 수입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비공식적으로 만든 내회사 이름은 Park Trading Co.로 하였고 우리역곡집에 전화겸 팩스를 설치하여 태국의 거래선과 상담하였다. 지금생각하면 참 겁 없는 시작이었으며 한편으로는 세상물정 잘 모르는, 무조건 저지르고 보자는 '준비덜된 생각‘이었다.)

(아무래도 처음이니 한 콘테이너 물량은 많을 것이라 줄이고 줄여서 반콘테이너 물량을 한국으로 보내게 되었다. 물론, 이는 내이름을 쓸 수 없고, 전해태상사출신 일고선배 김기0사장이 운영하는 무역회사에 대행수입을 의뢰하여 처리하였다. 이 기회에 그선배에게 감사말씀을 드린다. 그는 나의 고충.고민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해태그룹의 인력관리에 대한 안타까움을 그는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개인적.비공식적인 일을, 하나도 시비하지않고 흔쾌히 도와주신 그 선배에게 감사드린다.)

 

태국산‘멸치액젓=Fish sauce’ 시험사업은, 당초 예상했던 것보다는 매우 지지부진하여 좀처럼 재고품 전량을 판매하기가 어려웠다. 최소수량을 수입하였는데도 재고소진하는데 상당한 기간이 걸렸다. 1년? 2년? .큰 물량을 들여오지 않기를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그만큼 최초 사업은 쉽지 않은 것.

88올림픽이 끝나고 서울은 경제환경이 서구화되어 갔고, 도시의 식생활패턴도 서구식을 많이 따라가고 있었다.

김장김치를 대하는 자세도 신세대와 나이든세대가 달랐다. 나이든세대는 여전히 집에서 김장김치를 담갔지만 신세대는 마트에서 김치를 사먹는 것에 큰 부담이 없게 되었다. 즉 공장김치가 출시되어 젊은세대의 입맛을 겨냥하던 때였다.

 

미국의 한인사회에서 이미 검증된 것처럼, 태국산 멸치액젓=Fish Sauce는 김치담그는 데 없어서는 아니될 재료였다. 재래식 멸치젓을 달이고 끓이는 복잡한 과정을 거치지않고도 전통적 김치맛을 낼 수 있으니 얼마나 획기적 멸치젓대행품인가?

젊은부부들의 김장담그기나 공장김치 담그기에 빼놓을 수 없는 멸치젓대행품이었다.

그런데, 한국시장에서 태국산멸치액젓이 외면당하다니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만 해도 멸치액젓의 쓰임새가 아직 일반대중과 일반주부들에게 알려지지않았던 것이다..지금 멸치액젓이 김치담그는 재료로 이미 널리 알려진 것과는 격세지감이 났다...그때 잘 알려졌다해도 나같은 소규모무역상이 취급하기는 적당치 않은 아이탬이었다..미원그룹처럼 식품대기업이 대대적인 마켓팅을 통한 시장공략이 선행되어야 성공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시험수입으로 빨리 정리한 것은 참 다행스런 결론이었다. Park Trading Co.는 멸치액젓 반콘테이너를 시험수입판매하는 것으로 그 운명을 마감하였다. 좋은 경험이되었다. 사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내가 해태상사에서 다시 자리를 잡아가자, 이 재고품판매를 서울대식품공학과 동기생, 오뚜기식품출신 문동0에게 맡겼다. 그도 오뚜기식품을 그만두고 식자재.식품첨가물.향료등 국내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 특별한 품목이 없어 고전하고 있었다..그는 현재 MDS라는 중견식자재공급회사를 운영하며 대성공궤도에 들었다. 년매출 7-8백억원을 한다고 하니 대단한 성공이다. 내가 해태상사 농산사업부장으로 자리를 잡은 후, 그의 현장경험과 나의 상사맨의 아이디어가 보태어져, 서로 도움이 되는 일들을 하였고, 이것이 그의 사업확충에 크게 기여하게 되었다... 식품산업은 다른 중공업산업에 비하여 비교적 열세이고 특히 식품공학전공자에 대한 대우.처우가 매우 빈약하였다. 그래서 우리 서울대 식품공학과 출신들이 크게 출세하지 못하는 형편이었다. 그는 과감히 오뚜기에여 퇴사한 후, 엄청난 고생과 거듭된 실패를 극복하고 오늘날 식자재.원료분야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그에 대한 것은 ‘후술’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