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주재임원으로 ‘김이사’가 오자...나는 바로 ‘항명’을 하였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9. 1. 2. 17:13

/주재임원으로 ‘김이사’가 오자...나는 바로 ‘항명’을 하였다.

 

주재임원 ‘윤이사’가 떠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또 주재임원으로 ‘김이사’가 온다고 해서, 나는 지사장자리를 내던지고 본사복귀를 요구하였다. ‘나를 가능한한 빨리 본사에 복귀 명령을 내달라’ 주장하였다.

쉽게 말해서 ‘항명’이었다.

일개 차장이 최고인사권자의 명령에 정면으로 거부의사를 분명히 하고 나선 것이었다.

재벌회사에서 누가 ‘오너’의 심기를 거슬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아무도 엄두를 내지못하는 그것을 눈하나깜짝하지 않고 저지르는 ‘뭘 한참 모르는’ ‘용감한’ 통괴짜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세상을 몰라도 한참 몰랐던 때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오너'의 결정에 어떻게 대놓고 '항명'을 한단 말인가? 나는 해태그룹에서 또한번 '스타'가 되었다...사적으로는 나의 자존심을 지키기위한 용감한 행위였을지 몰라도 또한편으로는 공적으로는 내가 매우 부족하였고 또 매우 부끄러운 행위였다.)

내가 지사장한지 2년차 중반쯤되었을 때 일이었다.

 ‘김이사’ 그는, 다른 종합상사중 하나인 ㈜선경 출신이었는데, 공산품사업본부에서 새끼쳐 나온, ‘자원사업부’의 사업부장격이었는데, 새로 부임한 박사장의 눈밖에 났다.

속을 들여다보면, 보기 싫으니 사표를 내라고 유배아닌 유배를 보내는 것이었는데, 그는 고개 뻣뻣이 들고, 그래 알았어, 네 속을, 그러나 나는 사표는 내지않고 ‘주재임원’으로 방콕에 가서 놀 준비가 되어있당게 하며 방콕에 왔던 것.(난 그때 그 속을 들여다볼 생각을 몰라서 못햇고 안다고 해도 하지 않았을 것.)

 

그러면서 나는 이제 ‘지사장’이 아닌 ‘농산.식품담당 주재원’이 되어 관련된 사업을 더 열심히 추진하였다.

이때 개발한 것이, 태국농산식품중 미국의 한인사회에 맞을 식품을 개발하여, 미국에 수출하는 것...베트남 조기.깐녹두.청포묵 가루.새끼낙지.멸치액젓등은 지금도 미국내 한인사회의 주요수입품목들이다.

 

한편으로 나는 본사 복귀후 나의 장래를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래도 박사장 체제 아래에서는 나의 자리가 마땅치 않을 것은 자명한 일,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고민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 타당할지 검토하기로 했고

또다른 대안으로는, 다른 종합상사에 나의 자리가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나의 경력=서울대 식품공학과출신으로 종합상사 근무경험이 있고, 거기에 농산물.식품사업경험자는 매우 희소성이 있었다. 특히 영어.일본어 능통은 그래도 제법 쓸만한 스팩이었다.)

마침, 그 당시 동부그룹도 해외사업창구인 종합상사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동부산업’을 중심으로 그 역할을 하게 하였다.

‘동부산업’은 주요일간지와 경제지에 ‘종합상사’ 경력사원 초빙 광고를 대문짝하게 내게 되었다. 나는 그들의 주문대로 자기소개서와 함께 나의 사업계획서를 보냈다.

(단, 나는 현재 방콕에 주재하고 있으므로 본사복귀가 언제 이루어질지 확실치 않으니, 본사복귀가 확정되는 대로, 근무여부는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주십시오 조건부 입사지원서였다.)

얼마 있지않아 합격통지가 왔고, 나는 나의 입장을 다시 한번 리마인드시키며 서울에 가는대로 다시 연락하겠다 하였다.

(본사 복귀후, 상당기간이 지난후, ‘동부산업’행의 결과를 여기에 정리하면,

동부그룹 동부산업에서 간절한 근무요청이 왔었지만...내가 ‘대기’상태일때만 해도, 동부산업으로 이직이 거의 이루어질 뻔하였지만, 그뒤 우여곡절끝 농산사업부장을 맡으면서 없던 일로 처리하였다. 만일, 내가 동부산업으로 갔더라면 나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운명의 여신은 어디로 나를 불러냈을까?).... (농산사업부로의 복귀는 후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