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태국산 옥수수사업, ‘비온뒤 땅이 더 굳어졌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29. 22:18

/체르노빌 원전사고와 태국산 옥수수사업, ‘비온뒤 땅이 더 굳어졌다.’

두산그룹=두산곡산과 미원그룹=미원식품에 태국산 옥수수계약을 하였는데 체르노빌 원자력사고가 나서..옥수수 가격이 폭락, 계약취소 위기에도, 본계약을 유지시키고 또다른 부가계약으로 위기를 돌파해낸 ‘기적’같은 일도 있었다..

정말 ‘위기’를 ‘기회’로 바꿔낸 나의 개인기였다고 나는 지금도 자부한다...그들은 가격폭등을 빌미로 원계약취소의 강수를 두며 압박하여 왔다. 바이어는 왕이었고 셀러는 울며겨자먹기식으로 어찌되었든 받아들여하는 것이 국제상거래상 약육강식의 권력관계가 엄연한 현실 아닌가.

두산과 미원의 고위임원들이 우리본부의 본부장실로 찾아와 으름장을 놓고갔다. 나는 대응논리를 개발해서 우리본부장에게 주었다.

(바이어가 왕이다 하며 으름장을 놓은 것처럼, 마찬가지로 나는 우리해태그룹과 그들의 관계야말로, 바이어 대 실수요자 관계임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으름장을 되받아쳤다.)

귀사가 기존 옥수수수입계약을 파기하면 우리 해태그룹의 전분당.물엿.과당등 주원료 사용을 재고 하겠노라...맞불작전으로 대응하였다. 해태회장실에 태국산옥수수의 사업경위와 한.태구상무역에서 태국산 옥수수의 대응구매실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며 회장실의 도움까지 요청해놓았다...

결과는 생각지않게 추가계약까지 끌어내는 대성공.

단가를 조정해주는 대신에 그 감액만큼 추가계약을 몇건 나누어서 했으니 꿩먹고 알먹고 또 병아리까지 얻은 셈이 되었다.

불투명한 곡물시장을 감안하면 당장의 단가조정없이 추가계약을 몇건 더 체결한다는 것은, 수출업자로서는 기존재고를 아무 문제없이 처리하면서 향후 불안정한 시장에서 선제적으로 물량을 처리하게 되는 것이니 얼마나 ‘특혜적’인 조건인가?

그 위기에서 큰 기회로 바꿔버린 한국의 Mr.Park은 Chaiyong group의 회장 입장에서는 ‘귀인’도 그런 ‘귀인’이 없다 하였다.

(그는 나중에 나에게 우리부부 유럽전지역 여행권을 주었으나 내가 정중하게 거절한 바 있었다. 내가 방콕지사장으로 1986년 부임하자 음으로 양으로 나의 방콕생활을 도와주었으며, 그가 타계할때는 내가 직접 서울에서 문상까지 와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지금도 그의 아들 Mr.Boonchai 와는 소식을 주고 받는 사이이다.)

 

태국산 옥수수의 첫선적이 우여곡절 끝에 신용장없이 선적을 끝내고 태국산 옥수수가 가격면에서 미국산에 비해서 전혀 뒤떨어지지않고 품질면에서는 오히려 경쟁력이 있다 평가되니(항해기간이 짧아 훈증소독량이 많지않아도 되고, 구곡이 아닌 햇곡/신곡이므로 당연히 품질이 더좋을 수밖에 없었다), 한국의 대량실수요자(한국사료협회, 축현, 옥수수가공협회등)너도나도 태국산옥수수 구매를 하기 시작하였다.

우리 해태상사는 그들보다 한발 앞서서, 해태그룹의 구매력을 활용하여 두산.미원등에게 태국산 옥수수를 더많이 팔 수 있게 되었다. 한달에 한번꼴로 나는 현지물품검사한다는 명분으로 옥수수바이어회사의 관련직원들(구매담당.생산담당.품질관리담당등)을 펙키지로 하여 태국출장초청하면서 그 다음판매까지 미리 포석하였다. 나의 태국산옥수수 판매는 타종합상사는 물론 국제메이저들도 감히 따라붙지못하는 승승장구였다.

 

태국산옥수수판매와 더불어서, 사료용 타피오카펠렛을 한국시장에 최초로 소개하여 또 빅힛트상품을 만들었다.

열대고구마로 불리우는 ‘타피오카’를 펠렛타입으로 성형하여 운반성과 저장성을 높여, 동물사료의 탄수화물 쏘스로 대환영을 받았다.

태국산옥수수와 마찬가지로 Chaiyoung Group의 전폭적인 협조에 힘입어 대성공을 거두었다.(태국산 타피오카칩을 소주원료인 주정용으로 한국시장에 이미 판매하였는데 여기에 더하여 사료용으로 타피오카펠렛까지 한국사료시장에 판매하니, 해태상사와 Chaiyong Group은 국내외 농산물시장에 이름을 드높이게 되었다.

(곡물과장으로서 찬밥취급을 받던 나로서는, 미개척지인 한국 사료시장에 태국산 옥수수와 타피오카펠렛을 소개시켜 빅히트상품을 만들고나서, 1983년 과장진급하고 1985년 차장으로 특별승진까지 하게 되었고...1986년 드디어 모든 직원들의 로망이었던 방콕지사장에 낙점되기에 이르렀다...운명의 여신은 정말 있는 것일까? 내가 태국산농산물 시장개척에 성공하지않았다면, 나의 방콕지사장 임명은 가능하였을까? 빨리 승진하는 것이, 또 좋은 보직에 남을 앞질러 자리를 잡는다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일까?

나의 방콕지사 3년을 평가해보면 답이 나올까? 승승장구하던 나는 1986년 11월 방콕지사장으로 임명되어 방콕으로 떠나게 된다. 기대하시라, 내가 어떤 길을 걷게 되는지 nn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