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태상사(주)에서(1980-1995)

해태상사에서...일본땅콩수출사업 시작; ‘그는 나에게 돈봉투를 내밀었다’

햄릿.데미안.조르바 2018. 12. 22. 21:01

/해태상사에서...일본땅콩수출사업 시작; ‘그는 나에게 돈봉투를 내밀었다’

 

1980년 12월말 어느 날, 년말 해태상사 송년식 자리.

나는 화장실에서 피땅콩(껍질을 깐, 알땅콩이 아닌, 껍질이 있는 땅콩) 샘플을 씻고 있었다.

회사 송년식이 열리고 있는 사이에 나는 모임에 참석하지않고 수출용피땅콩견본을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조치원 소재 땅콩 수집상에게서 넘겨받은 샘플이었다.)

일본수입업자들이 한국산 피땅콩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를 볶아서 일본에 수출하기 위해서였다.

(일본은 국내땅콩 수요가 우리나라 한국보다 훨씬 많은데 특히 우리의 대보름에 해당하는 ‘절분’에 맞추어 볶음피땅콩 수입하였는데 늦어도 1월에는 선적을 해야 그 수요에 맞출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회사송년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채 마지막 견본의 품질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본 땅콩수출사업의 성격상, 기술적인 문제를 더 부연설명하자면, 원료땅콩은 중공땅콩을 홍콩무역상을 경유하여 수입하고, 다시 그 수입땅콩을 해태산업오징어땅콩공장에서 볶음가공하여 일본에 수출하는 것...문제는, 수입땅콩 대신 일본국내산 피땅콩과 거의 비슷한, 국내산 피땅콩을 볶음가공수출하고, 수입땅콩은 국내탈각공장에서 탈각하여 해태산업의 오징어땅콩 원료로 대체사용하는 프로세스...오징어땅콩의 동글동글한 균일한 규격이 절대적인데 이에 맞는 원료피땅콩으로 중공산을 수입대체하는 것. 엄밀하게 말하자면, 수입산과 국내산을 대체해서 수출하는 것이므로 실정법상 절대적으로 적법하지 않은 것이지만 그때는 법적인 문제를 고려할 여유도 없이 그냥 가공수출을 하는 것만으로 ‘큰문제없이 괜찮다’고 밀어붙인 것이었다...후일, 감사원의 수출용 원자재 수입량 재고조사 때, 감사원의 지적사항이 되었다(후술)

(절차상 법적인 문제를 떠나면, 당시 ‘가공수출무역사업’의 전형적인 본보기가 되었다.

원료를 수입하고, 국내에서 가공하여 수출가득액을 높여, 수출하여 외화를 벌어들이는 것.

그 과정에서 원료를 잘 가공하여 ‘기술소득분’을 관세환급을 받아 영업이익을 한단계 높이기까지 할 수 있으니, 꿩먹고 알먹고의 사업이었다.

거기에 해태그룹의 경우, 해태산업의 부실주류사업의 손실을 ‘오징어땅콩’의 수익으로 상쇄시키기까지 할 수 있었으니 또 ‘꿩먹고 알먹고’가 되는 것이니, 해태그룹입장에서는 남고 또 남는 사업이 되었다. 더하여, 오징어땅콩 원료에 딱 알맞은 균일한 규격싸이즈의 중공산땅콩을 오징어땅콩제품에 쓰이니, 국내오징어땅콩제품의 후발주자인 해태산업으로서는 또 ‘꿩먹고 알먹고’가 되었다. 소위 시쳇말로 ‘따.따.따.’의 사업.)

(해태산업은 오징어땅콩 공장을 주류생산공장과는 별도로, 그러나 자체공장을 설립하지않고, 대신에 대전산업공단의 제일제침을 임대하여 시작하였다. 초기 리스크를 분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일본땅콩수출이 본궤도에 들어서면서 양질의 원료땅콩과 기술소득분의 추가이익까지 더해지니 날로 번창하게 되었다....몇년후 3년후? 나중에 청주에 최신식 스낵공장을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오징어땅콩사업등을 펼치게 되었다.)

(나는 해태상사의 ‘스타’가 되었다. 중공산땅콩을 수입하고...그때는 중공과의 직교역이 불가능하여 홍콩무역상을 통하여 거래하였지만 중공산원료를 수입한다는 자체가 ‘큰뉴스’가 되었고...거기에 그 땅콩을 우리의 공장에서 가공하여 기술소득분을 추가로 챙기고, 거기에 또 일본에 가공수출까지 하는 것이니, 거기에 또 ‘오징어땅콩’원료로까지 쓰이게 되는 것이었으니...해태상사내에서 그리고 해태그룹의 해태산업에서까지, 해태상사의 박대리 곧 박과장은 ‘유명인사’가 되었다. 거기에 또 일본말까지 유창하니 떠오르는 뉴스타였다.

덕분으로, 나는 승승장구하였다. 80년 4월1일 3년차 사원 입사, 81년 1월1일 대리, 83년 1월1일 과장...85년 곡물과장으로 전보, 사료사업개발과 태국산농산물사업총괄, 86년 차장으로 승진하여 86년 10월 방콕지사장으로..)

 

에피소드 하나;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누가 아나? 도처에 운명이다!!

앞서 송년식에도 참석하지못하고 화장실에서 땅콩샘플을 씻고 있었다고 하였다.

그날 나는 국내땅콩수집상과 함께 조치원의 원료선별공장을 방문하여 피땅콩선별과정과 원료콩 품질을 확인하였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속에서, 그 수집상은 나에게 흰봉투하나를 건내지 않은가!

나는 순간적으로 즉각 거부하였다.

나; 최 00 사장님, 이러시면 아니됩니다. 노.노.노~~~~

최; 받아두세요요요요요

나;노노~~~~~~~노!!!!

나의 성격상, 절대로 용납되는 일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받을 수가 없었다.

(최사장은 나의 얼굴을 봤는지 더 이상 가망없다고 판단했는지 봉투를 거두어들였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는 우리부서 박영0부장의 절친의 절친이었다. 그때 내가 그의 봉투를 받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박부장은 나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어찌된 노릇인지, 박부장은 훗날, 내가 하는 일에 일체의 간섭도 하지않았으며,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는 토를 달지않고 무조건 결재해 주었다. 그 돈봉투사건으로 나를 믿은 것일까?)

(솔직히, 나도 그 봉투를 거절하고나서는, 한편으로는 나도 봉투를 못이기듯 받을 걸 그랬나? 하고 잠시 흔들리기도 하였다. 곧 절래절래 머리를 저었지만...돈의 유혹이 잠깐 내머릿속으로 들어왔다 다시 나갔다. 나는 이겨냈던 것. 그걸 냉큼 받아챙겼다면? 나의 앞날은 어떻게 되었을까? 돈과의 운명적 첫만남! 나는 그걸 멋지게 거절하였던 것. 앞으로 나의 운명은?)

 

나는 본능적으로 업자의 돈봉투를 거절하였지만, 사실 영업부서의 직원들은 업자들과 그렇고 그렇게 상부상조하기 마련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그래도 나는 꿋꿋이 나의 본능적인 거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자랐는데 어찌 달리 업자와 타협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도 나는 부하직원들에게 간섭하며 조언한다. ‘업자들하고는 여자있는 술집에 절대로 가지말라.’ ‘업자의 돈은 받으면 안된다. 공짜 점심은 없다...’)

 

물론, 영업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나도 사회의 관행을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너무 맑은 물에는 고기가 살수 없다고 하듯이, 업자를 너무 경계하기 시작하면 사업을 펼쳐나가기 쉽지않으므로, 크게 잘못되지 않는 선에서 가끔 업자의 편의를 받아주기도 하였다. 그 경우라도, 나는 아무에게나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고, 정말 믿을 수 있는 거래선에 한정지었고 부하들과 내용을 공유하는 선에서 타협아닌 타협을 하였다...거래선 관리에 대해서는 또 ‘후술’ ‘나는 보험.선박.운송회사등 비교적.상대적.사회적약자 협력업체로부터는 단 한푼도 요구하지않았다. 오히려 ’일‘만 해줄 것을 요구하였다. 혹자는 이를 ’이상한‘친구라고 하였지만 나는 ’대원칙‘을 고집하였고 그래도 보란 듯이 승승장구하였다.

 

/첫 해외출장, 후꾸오까로; ‘박대리, 빨리 일본출장 다녀와야겠다!!!’

1981년 4월 어느날.

우리부서 박부장님; ‘박대리, 빨리 일본출장 다녀와야겠다!!!’

나; ????................

그때는 해외출장이 일반화되기전이라 일반회사원이 해외출장 간다는 것은, 회사내에서도 친구들사이에서도 ‘큰뉴스’가 되었다. 그때는 또 해외에 나가려면, 중정인가 안기부인가로부터 해외출장을 가려면 ‘안보교육’을 받아야했다.

해태상사에 입사한지 1년도 채 되지않았는데, 생각지도 않게 나는 ‘큰뉴스’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여권도 없었던 나는 여권만드랴 ‘안보교육’받으랴 솔직히 정신이 없었다.

거기에 일본말이라고는 ‘안녕하세요, 어떠신지요? 저는 누구입니다’ 정도의 기본인삿말만 하는 정도. ‘박성원’의 일본어책을 달달 외우듯이 끝내긴 끝냈지만 일본인들과의 실제 대화는 어림반푼어치도 없을 것은 명약관화.

걱정이 앞섰지만, 나는 이런 경우 이골이 나있었다. 그정도는 걱정거리 축에도 들지않았다. 부딪치면 되는 것. 안되면 몸짓 발짓 하면 되고 또 안돠면 못하는 영어로라도 들이밀면 되지 않겟나 싶었다.

 

해태제과에 땅콩납품하는 회사의 소개로 일본 규슈 후꾸오까 소재, 볶음땅콩수입업자와 거래하게 되었다. 이름하여 ‘마메쇼=두상=콩 두 상업 상’. 순우리말로 말하자면 ‘콩상인’인데 바로 ‘땅콩상인’이라는 상호.

작달막한 키, 정말 ‘왜인’이라할 50대 중반의 별매력없는 전형적 일본소상인.

그래도 ‘바이어’인데 한국에만 오면 극진히, 고급요리집에서 그를 대접하여 보냈다.

볶음피땅콩이 대성공을 거두자 나는 볶음알땅콩으로 품목을 확대하였다.

피땅콩보다는 가공단계가 단순하여 ‘기술소득분’의 추가소득이 짭짤하여 큰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일본내 시황이 갑자기 좋지않게 되었다. 성공 뒤 악재였다.

 

‘마메쇼’는 여러차례 가격인하를 줄기차게 요구하였다. 나는 원칙대로 받아주지않았다. 계약은 계약인데 시황을 이유로 가격인하를 요구하는 것은 국제무역원칙에 근거해서도 받아줄 수 없다고 강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그의 요구가 받아들일 기미가 전혀 없게 되자 마지막 수단을 쓴 것. 일본내 제과신문에 한국의 H제과로부터 알땅콩을 수입하였는데 검사결과 ‘아프라톡신’이라는 발암물질이 검출되었다고 대서특필하게 하였다.

그 신문 카피를 해태상사 사장실로 보내서 최종적으로 그의 주장을 관철하려 하였다.

사장실에서는 나를 급히 후꾸오까 현지에 출장가서 현안을 풀어내라는 것.

사장실도 사장실이지만, 우리부서의 박부장의 자세. 그는 꿈쩍도 하지않고 이제 초임대리에 불과한 나에게 전권을 주면서 출장가서 해결하고 오라는 것. 구체적 지시도 없고 뚜렷한 가이드라인도 없이, 무조건 가서 담판짓고 오라는 것.

폴짝 뛰고 뒤로 나자빠질 일이었지만 나로서도 달리 어찌할 바가 도저히 없었다. 그저 부딪쳐볼 뿐이라는 것.

해외 첫출장 간다고 기뻐할 겨를도 없이 나는 불이야불이야 출장준비에 들어갔다.

되든 아니되든, 그동안의 수출경위.경과등을 영어로 요약하고, 후꾸오까 총영사관.후꾸오까 대학 식품공학과.후꾸오까세관등 앞으로 우리의 수출내용과 한국에서는 ‘아프라톡신’이 검출되지않았다는 시험증명서를 제출하기로 하였다.(물론, 한국에는 발암물질인 ‘아프라톡신’에 대한 인식자체가 없었으나, 시험증명서 발급받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서류상 형식상 만드는 것이므로 나는 크게 신경쓰지않았다. 그냥 해태제과 연구소에서 형식상 서류로 만들어달라 하였다...국제무역절차상 좀 말이 되지않긴 해도 그때는 어찌할 다른 길이 없었다...후일, 이를 계기로 나는 카이스트 생화학실에 연구용역을 주어, 국제규격에 맞는 공식 시험성적서를 발급받아 일본수출에 대응하였다. 한국카이스트의 생화학실장은 나만 보면 카이스트 생화학실의 ‘영웅’이라고 치겨세워 주었다. 열악한 환경의 카이스트생화학실에 우리 해태상사가 목돈으로 연구비를 제공하는 것이니 큰도움이 되고도 남는다고 크게 좋아하였다.)

 

해외 첫출장 간다는 기쁨.즐거움을 누릴 겨를도 없이 나는 후꾸오까에 도착하자마자 이곳저곳, 당초 가고자했던 곳곳을 방문상담하였다.

내주장의 초점은, 한국에서 가공수출한 알땅콩제품은 발암물질인 ‘아프라톡신’이 검출되지 않았고 일본에서 통관중 검출되었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이해가 되지않는다는 것.

과거에 중국산 제품수입의 경우에도 ‘아프라톡신’의 검출 정보는 하나도 없으며, 이번 제품은 중공산원료를 볶음가공한 제품이라는 것. 한국에서는 우리제품이 처녀수출인데 우리는 한국내 유명제과회사로서 회사품질관리규정상 발암물질 ‘아프라톡신’검출은 회사존망이 달린 중차대한 문제인데 이를 간과할 수 있겠느냐 역지사지해보면 금방 알수 있는일이며,

결국 일본수입업자의 알땅콩 시장경기의 불황으로 인한 ‘마켓클레임’이 농후하므로, 일본관계당국의 협조가 요망된다등등.

일본말은 짧았지만, 젊디젊은 한국청년이 어눅한 일본말로 진지하게 설명해드니 모두들 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듯하였다. 나의 외모가 크게 나쁘지않을뿐더러 또 진실성이 얼굴에 보이는 모양이었다. 열심히 설명하는 동안은 나의 부리부리한 눈동자가 상대방에게 뭔가 설득력있게 내용이 전달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마메쇼’가 당초 주장을 철회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현지출장하여 관계당국과 만나서 상황을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마켓클레임의 소지를 주장하니, 그들로서도 더 이상 문제를 크게 키울 형편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일부 수량은 통관을 하고, 통관하지않은 일부수량에 대해서만 ‘언페이드’ 즉 물품대금거절하는 것으로, 결국은 반반. 표면적으로는 무승부였지만 내용적으로는 우리 해태상사는 수출품의 50%에 해당하는 금액을 받지못하였으니 어쩌면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었다.

(그는 반은 통관하여 국내시장가격에서 할인된 가격으로 재고처분하였을 것이고, 나머지 반은 물품대금이 결제되지 않았으니 그에게는 큰손해가 되지는 않았을 것.)

 

나는 10여일 동안 후꾸오까 이곳저곳 쫓아다니며 동분서주하였지만, 큰성과를 내지도 못하고 귀국하게 되었다.

출장보고를 하니, 회사에서는 손해본 금액에 대해서 아무런 보상조치도 요구하지않고 더 열심히 해서 이번의 손해금액을 벌충하도록 하라는 경고 아닌 경고로 끝내주었다.

우리 박부장의 속내를 정말 알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말없는 회사의 조치가 감사할 따름이었지만 그와는 별도로 나는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평하였다.

일본말이 몰라보게 늘었다는 것. 일본 수입상의 잔꾀를 똑똑히 보았다는 것. 해외사업은 겲코 만만하게 봐서는 큰코다친다는 것. ‘아프라톡신’이라는 발암물질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는 것(식품을 전공했다는 자가, ‘아프라톡신’을 가볍게 여겼다는 것은 부끄러움이 되었고, 나중에 한국카이스트 생화학실에 연구용역을 주어, 완벽하게 대비하게 된 것은 또다른 자부심.)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해외출장에 대한 선입관으로, 해외출장을 위로행사하듯 그저 관광하며 놀고 오는 것으로 이해할 뻔 하였는데, 나의 잘못선입된 가치관이 제대로 교정되었다는 것.

해외출장이라는 것은, 놀고먹자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일’‘사업’을 하러 가는 것이므로 준비를 철저히 하고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자칫 ‘첫출장’을 가볍게 놀고 구경하다 왔더라면 해외출장 갈때마다 줄곧 ‘놀고먹기’로 일관했을 터인데 첫출장부터 ‘진짜출장’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축복받은 사나이인가?

하늘이 내게 준 ‘운명의 여신’이 큰미소를 내게 선물해준 것이었다.

‘하늘은 미리 시련을 주어 나중에 크게 되게 하신다.’는 또 ‘참’이었다.

(나는 매 해외출장때마다 이 대원칙을 지켰으며, ‘놀고먹으러 가지 않는다’는, 새로 들어오는 내 부하직원들에게 언제나 오제이티=On the job training 현장실무교육에서 강조.강조하면서 해외출장에 임하게 하였다...지금 그들은 거의 모두 자기사업을 하는데 그때 ‘대원칙’을 잘 배웠다고 모두들 나에게 감사감사한다. 매우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돈이 많다고, 좋은 자리에 있다고, 힘있는 곳에 근무한다고, 거들먹거리는 것이 행복한 것은 아니지않은가? 가치있는 일을 해야 다른이에게 감사받을 수 있는 있는 것이지, 행복한 것이지..자기 잘났다고 시세에 약삭 빠르게 움직여 돈자랑하는 것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고, 행복할 수는 더군다나 안되는 일 아닌가? 내가 지금 오바하고 있나요? 하하하.)